나 만의 속도로 걷는 길

by 정원철


. 나만의 속도로 걷는 길


산에 혼자 다니는 사람의 속내는 제각각이다. 혼자서 산에 오르는 사람들 대부분이 수긍할 만한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 아닐까 싶다. 산에 오르는 속도가 서로 맞지 않아서이다. 서로의 걸음을 맞추어 산에 오르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 어려운 일이다. 가끔 북한산이나 관악산을 혼자 오르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지리산을 다녀오곤 했다. 말은 진실을 다 담기 어렵다. 그 정도면 혼자서 산에 다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혼자서 산행을 즐긴다는 말이 등산전문가로 들린다면 곤란하다. 나의 혼자만의 산사랑 이야기에 거래처 직원이 반색하며 같이 산에 가자고 했다. 그 당시 그의 말을 딱 잡아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주말에 북한산 아래에서 만나 산행을 시작했다. 산에 오르기 시작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그와 나는 다른 인간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저히 그의 속도에 맞추어 산에 올라갈 수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가다 서서 허리를 접고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에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그가 위에서 내려다보며 엄살을 부리지 말고 빨리 올라오라고 채근했다. 그날 산행을 마치고 다시는 그와 산에 가지 않았다. 어느 날 그가 설악산 공릉능선을 가자고 했다. 너와는 다시 산에 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거절했다.

입장이 바뀌면 생각도 달라진다. 체력이 못한 사람들에게 나는 얼마나 으스댔는지 돌이켜보면 어쩌구니가 없다. 아들이 7살쯤이었을 때 같이 오르던 북한산길을 떠올리니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했다. 그 당시 별다른 특기가 없는 나에게 등산은 그야말로 가성비 좋은 취미였다. 주말에 혼자서 등산 다녀오는 일이 미안해져 아내에게 건강을 이유로 같이 산에 다니자고 했다. 아내는 산에 오르는 게 싫다고 투정했으나 건강에 등산만큼 좋은 게 어디 있냐며 거의 끌고 갔다. 맞다 거의 끌고 간 것이나 다름없다. 그 옆에 착한 아들은 그냥 엄마 손을 잡고 이끌리는 대로 정릉 북한산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 그 이후 두 번 정도 같이 산에 오르고 온 가족의 등산은 무산되었다. 이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 가족과 함께 오르는 산길의 시작은 너무나 행복하다. 문제는 행복은 시작과 함께 너무도 짧게 끝이 나고 뒤이어 고통의 길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데에 있다. 아내와 아들은 산에 오르는 고통을 자진해서 찾아가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산에 오르는 도중 아들은 주저앉아 계곡물에 돌멩이를 던지며 시위를 했고 아내는 아들의 시위를 도왔다. 결국 혼자서 정상에 다녀올 동안 아내와 아들은 계곡에서 쉬며 놀았다. 거래처 직원과의 등산 도중에 나도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혼자서 정상에 다녀올 동안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입장이 바뀌어 봐야 상대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아내는 뭘 해도 과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철인 3종 선수라도 될 듯 날뛰는 것도 아니다. 나로서는 좀 억울한 면이 없지 않지만 아내와 나는 서로 다른 속도를 가지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일은 아내와 나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서로 속도가 맞는 일이 점점 많아져 가고 있다. 나는 점점 느려지고 멈추기를 반복하는데 아내는 예전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보다 아내가 보기에 지금도 과해 보이는 나의 속도를 그래도 맞추려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지리산 1박 2일 산행도 같이 해냈다. 중산리에서 거림을 통해 올라 세석산장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장터목을 거쳐 천왕봉을 올랐다. 어느 해인가는 노고단에서 반야봉을 거쳐 끝없이 기다란 뱀사골계곡을 내려와 아내는 쓰러져 몸살을 앓았다. 아내도 나와 같이 걷기 위해 좀 과하게 애를 쓴 것이다. 이제 아내와 나는 산에 가는 대신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남산 둘레길, 안산 자락길, 북한산 둘레길 등 산책길을 아내의 속도에 맞춰 걷는 것이 이제는 오히려 편하고 여유롭게 느껴진다. 누군가와 같이 걸으려면 자기만의 속도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나와 같이 걷는 사람이 지치면 같이 쉬어주고 그만 걷자고 하면 그만큼에서 멈추는 배려가 필요하다. 그만 멈추자고 말을 꺼내는 아내가 계속 가고자 하는 나에게 미안해하며 어렵게 꺼낸 말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누구나 나만의 삶의 속도를 가지고 살아간다. 같이 걸으려면 나만의 속도는 배려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틀어진다. 그래도 조금만 속도를 맞추면 같이 걷는 길은 혼자일 때보다 분명 덜 힘들고 더욱 행복하다. 때로는 같이 가던 길 중간에 계속 가고자 하는 사람이 혼자 걸어가도록 놓아주는 것도 커다란 배려이다. 힘들어서 돌아가는 사람이나 더 멀리 가고픈 사람이나 모두가 선택이 자유로울 때 세상은 평화롭다. 내가 나의 속도로 갈 자유를 느끼며 걷는 길 옆에 핀 수선화가 더욱 사랑스럽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책이 한때 사람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에 사람들이 왜 호응했는지 알 만한 글들이 실려있다. 그런데 난 요즘 들어서 방향보다 속도가 더욱 중요해 보인다. 방향이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어떤 길로 갈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정하는 일로 숱한 밤이 지나갔다.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걷는 것처럼 막막한 날들이 많았었다. 대부분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성공할 길을 찾고자 방향을 찾는다. 그 방향만 정해지면 무소의 뿔처럼 정진하는 일에는 자신만만해한다.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지 방향만 올바로 정해지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일도 아니다. 그런데, 내가 이제껏 겪은 실상은 좀 다르다. 방향은 틀리지 않았으나 그 방향으로 가는내내 수없이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속도를 내지 못하면 가고있는 방향을 의심하며 가지 못하고 돌아선다. 방향은 삶을 관념으로 채우지만 속도는 삶을 살아내는 일이다. 속도는 삶 그 자체이다. 방향이 선명하지 못할 때 속도가 그 길을 찾아 주기도 한다. 일단 꾸준히 가보면 길이 보이기도 하는 법이다. 사람은 누구나 방향과 속도를 가지고 살아간다. 되돌아보면 나에게 있어서 방향은 늘 옳았는데 속도가 문제였다. 너무 빨리 도달하고픈 욕심 탓에 오버페이스로 주저앉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주말 속도를 즐기는 라이더와 바람을 즐기는 따릉이가 한강 변을 달린다. 앞서 달리는 라이더를 보고 따릉이가 시샘하지 않는다. 모두가 자기만의 속도로 한강을 달리며 즐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실체는 이처럼 아름답지도 순조롭지도 않다. 조금만 여유를 부려도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삶의 속도를 가속시킨다. 나만의 속도로 가는 길을 걸으면 가는 만큼 즐겁다. 내가 살아가는 하루가 너무도 지루하거나 숨 가쁘도록 벅차다면 다시금 나만의 속도를 돌아볼 일이다.


나만의 속도와 여유를 상기시키며 살아가는 방법을 곳곳에 숨겨두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여름의 폭염이 숨구멍을 막아도 그래봐야 한두 주 지나면 더위가 꺾일 것이라고 주문을 걸며 하루를 보낸다.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이 따분하다기보다 괴롭지 않으면 행복이라는 말에 수긍하고 감사한다. 불어난 체중을 관리하며 평생 이렇게 건강을 챙기다 사는 일이 인간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하루도 멈추지 못하고 이 세상에 내던져져 살아가는 모습에서 시지프스 신화 탄생의 전말을 이해하게 된다. 고난이라는 브레이크는 수시로 내 발목을 잡는다.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의 발이 가장 큰 고난이다. 그럴 때 나보다 느린 사람 만나면 조금 기다려 주고 빠른 사람 만나면 먼저 가라고 손짓하며 가던 길 가면 된다. 그렇게 가다 보면 내 옆에 나와 속도를 같이 하는 사람이 있다. 나와 같이 가는 사람들이다. 추운 겨울 이른 아침에 버스에 올라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에게서 내가 걷는 걸음에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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