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을 보살피는 일
어느 날 집에 화분 하나를 들고 왔다. 그 어느 날은 내가 다니던 회사가 건설한 빌딩의 준공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내가 근무하던 부서가 그 준공식을 준비해야 했기에 직원 모두가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삐 움직였다. 우여곡절 끝에 전철역 바로 옆자리 좋은 곳에 빌딩은 완공이 되었고 준공식도 차질 없이 진행이 되었다. 개업식 같은 행사에 화분 보내는 일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준공식을 기념하는 화분과 화환들을 가져오는 차들이 계속 들어왔다. 밀려오듯 들어온 화환과 화분이 건물 입구와 복도를 가득 채우고 빌딩 앞 인도까지 나와 자리를 잡았다. 거의 말단이었던 나는 계속 배달되어 오는 화분이 그리 반갑지 않았다. 크고 육중한 화분에 담긴 키 큰 해피트리 나 고무나무들은 보기에도 별로였는데 적당한 자리를 잡아 옮기는 일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팀에 이 일을 거들어줄 내 아래 직원은 팔다리 가느다란 여자뿐이었으니 화분 배치는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내 일이 되어 있었다. 행사를 마친 후 화분들의 운명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대부분은 햇빛도 공기도 통하지 않는 복도에서 말라죽거나 빌딩 입구에서 좋은 공기 마시다 결국 말라죽었다. 그중 값이 좀 나가는 난 종류는 누군가의 승용차에 실려 어디론가 가서 또 조용히 말라죽을 게 분명했다.
준공식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내 차 안에도 넘쳐난 화분 중 하나가 실려 있었다. 나무 이름은 ‘서황금’이었다. 관음죽의 일종으로 ‘무늬 관음죽’이라고도 한다. 무늬 관음죽을 집에 두면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기에 집에 가져갈 생각으로 따로 빼두었다. 내가 고른 서황금 화분도 다른 화분과 마찬가지로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게 분명했다. 그전에도 집에 화분이 몇 개 있었지만 대부분 일 년은 고사하고 계절을 넘기지 못했다. 겨울이 오면 빈 화분을 버리는 일이 귀찮아 봄에 화분을 집에 들이는 일에 주저할 정도였다. 서황금 화분을 보고 결국 죽게 되더라도 집으로 가져가 키우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집으로 가져온 서황금은 개업식 화분치고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서황금의 빛나는 황금빛 잎을 보고 있으면 왠지 나무의 생기가 느껴져 마음이 밝아졌다. 이 서황금의 운명은 그날 준공기념의 다른 화분들과 달랐다. 내 집 거실에 자리를 잡은 이 화분은 말라죽지 않고 10여 년을 넘게 살다가 화분 대신에 땅에 심겼다. 어쩌면 이 화분은 내가 집에서 식물을 기르기 시작한 첫 화분이나 다름이 없었다. 서황금은 식물에 대해 외계인만도 못한 집주인 탓에 잎도 줄기도 죽다 살기를 반복해 약해지고 볼품이 없어졌다. 이사를 할 때 이삿짐센터에서는 화분이 몇 개가 있는지 세어보고 견적을 한다. 나와 아내는 세월이 지나 볼품이 없어진 이 서황금만큼은 가지고 이사하는 것에 이견이 없었다. 그래도 같이 지낸 세월이 있어서인지 다시 이삿짐 트럭에 실렸다. 어느 날은 나무에 병이 들어 하얀 진딧물로 잎과 줄기가 뒤덮였다. 이번에는 이 녀석과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잎을 모두 잘라낸 다음 진딧물 약을 듬뿍 주고 베란다 바람 통하는 곳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한 달 이상을 쳐다보지도 내다보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다 죽은 나무에서 여리고 초록한 새잎을 돋아나고 있었다. 아마 그날 나는 이 화분에게서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다.
요즘은 집에서 가꾸는 화분이 수십 개다. 대부분 야생초나 야생화이고 나무는 한두 개 정도이다. 나와 작별한 서황금 이후에 새로 들여온 서황금도 10년 이상 베란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 녀석은 자리를 잘 잡았는지 이십 년도 끄떡없을 것 같다. 베란다에서 화분을 키우다 보면 오래 장수하는 식물도 있으나 대부분은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한 해를 넘겨 보기가 어렵다. 월동하는 식물이라 해도 베란다에서 겨울을 견디고 살아가는 일은 버겁다. 봄에 새로 잎을 낸다 해도 예전만큼 탐스런 꽃을 피우는 화분은 드물다. 그래도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은 화분들이 새싹으로 봄소식을 전해올 때의 감격은 꽃보다 진하다. 감탄할 일이 적어진 세상에 살고 있는지 탄성을 지르는 일에 무뎌진 것이지 점점 세상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어느새 3월 중순을 향해 가던 어느 날 그 지루함 끝에 감탄이 왔다. 베란다에서 겨울을 보낸 화분들이 새순을 움터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없이 더디게만 크던 만병초에서 두 개, 다 죽었다고 허리를 잘랐던 자엽아카시아에서 네 줄기, 꽃이 잎이 되어버린 수국 밑으로 엄지손톱 같은 새잎, 하얀 꽃에 반했던 치자나무에 나비 같은 잎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모두가 봄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었다. 곧 봄의 한가운데로 들어서는 데에도 황금 담쟁이만은 시계가 거꾸로 흐르듯 아직 단풍에 물들어 있었고 끝내 겨울을 이기지 못한 식물들은 화분만 남겨두고 기억에서 지워졌다. 겨우내 철을 모르고 계속 꽃을 피우는 화분도 있다. 거실에 둔 화분 중에 우이엽과 사랑초는 철을 모르고 꽃을 피운다. 미안할 정도로 마를 겨를 없이 계속 꽃을 피운다. 계속 올라오는 꽃대를 보고 마냥 좋아하다 보면 한편으로 염치가 없어진다. 우이엽과 사랑초에게 쉬지 않고 일을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해지기 때문이다.
씨앗이 움트고 꽃이나 나무로 자라나는 화분을 집에 두고 보살피는 일이 즐거운 이유는 단순하다. 내 마음에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생채기 내는 생명을 보살피는 일은 없다. 가족만은 예외이다. 가족도 가족 나름이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가족은 어지간해서는 보살핀다. 보살피는 일은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것부터 시작이다. 야생화 화분이 집에 들어올 때는 곱디고운 새색시 같다. 어느 날은 너무나도 곱고 예뻐서 밤중에 일어나면 베란다로 나가 새로 들어온 화분을 지켜본다. 수국은 꽃 중의 꽃이다. 베란다에 소담하게 피어난 수국을 보고 있노라면 다른 화분들은 잠시 잊는다. 복주머니 모양으로 분홍색 꽃이 주렁주렁 매달린 금낭화에 마음이 뺏기기 전까지 수국은 베란다의 가운데를 차지하고 사랑을 받는다. 꽃이 붉어야 십일이라는데 수국은 꽃이 한 달 이상이고 꽃이 다시 잎처럼 변하는데 몇 달을 지속한다. 꽃이 아름다운 화분이 있는가 하면 꽃보다 나뭇잎이나 수형이 아름다운 화분도 있다. 수국은 꽃이 지면 풀잎처럼 생겨 월동을 마칠 때까지 베란다 한구석으로 밀려나게 된다. 꽃이 있을 때 보다 은근한 관심을 받는 식물은 단연코 만병초이다. 프레지던트 루스벨트 만병초의 붉은 꽃이 부풀 듯이 필 때도 좋지만 허리를 굽히고 휘어가며 조금씩 뻗어가는 줄기와 노란 물감을 덧칠한 듯한 잎이 더욱 내 사랑을 받는다. 보랏빛 꽃이 주렁주렁 엉겨있던 보라싸리는 지금은 헝클어진 잎만 남아 한구석에 밀려나 있다. 식물도 꽃을 피워야 사랑과 관심을 받는다. 아름다운 꽃에 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꽃이 피지 않더라도 애지중지하는 화분도 있다. 무늬 백화등이 그런 화분이다. 백화등의 꽃말처럼 은은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하얀 꽃과 첫 대면 이후 몇 년째 키우는데 첫 대면만큼 꽃이 풍성히 피지 않고 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그 화분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있다. 내년을 다시 기다려 본다.
식물을 기르며 가장 어려운 일이 물 주기이다. 물을 조금 주면 마르고 많이 주면 뿌리가 썩는다. 시원하게 말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식물은 그렇지 않아 물을 주는데 애를 먹는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도 주고 이주가 다 되어 주기도 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물을 주다가 화분 하나하나를 살피게 된다. 나무젓가락 꽂아 화분의 습도를 알아보기도 하고 손가락을 집어넣어 겉흙의 수분을 재어도 본다. 그리 애지중지하다가도 나의 외도가 길어지면 화분은 잎을 늘어뜨리고 넋을 놓는다. 잎이 늘어진 화분을 보고서야 물을 주고 환기를 시켜주면 다음 날 잎은 다시 꼿꼿하게 일어나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인간관계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지혜라고 말한다. 그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일이 인간관계에서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화분의 잎이 한순간 늘어지는 것처럼 관계도 소원해지면 시들해진다. 이럴 때 화분에 물을 주듯 사람들은 만나 소주 한 잔을 기울인다. 때로는 아무리 정성을 쏟아도 결국 빈 화분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화분을 보살피듯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화분은 물을 주지 않는 것보다 너무 자주 주는 물로 망쳐진다. 아무 생각 없이 너무 자주 주는 물은 뿌리를 썩게 할 뿐이다. 돌이켜보면 사람들 사이에 의미 없는 너무 많은 말들이 상처 주고 결국 관계를 망치게 한다. 누군가를 믿고 잠시 입을 닫고 묵묵히 지켜보는 일이 그 상황에 맞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지나치게 많은 물을 주며 살아간다. 누군가를 말없이 바라보고 기다리는 일을 식물을 보살피며 배운다. 겨울을 보낸 베란다의 화분들이 나의 기다림에 움트는 새잎으로 화답해 준다. 식물을 보살피는 일에서 기다리는 마음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