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파리로 가는 '유로스타'를 타기 위해 런던 세인트 판 크로스역으로 향했다. 런던과 파리를 잇는 이 해저터널의 영어이름은 채널터널이고 1994년 5월 6일 완공되었다. '유레일패스'를 타는 파리에서부터 다른 유럽국가로의 이동은 도시 간의 이동처럼 제한이 없지만 런던에서 파리로의 이동은 출국심사를 거쳐야 했다. 오전 10시 28분 파리행 유로스타의 좌석에 앉았다. 기차가 해저터널을 지날 것이라는 상상만으로 객차 안은 심연의 정적이 흘렀다. 런던 세인트 판 크로스 역을 출발한 지 2시간 30분 만에 파리 북 역에 도착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파리는 런던과는 전혀 다른 도시의 풍광이었다. 뭐랄까? 학교에서 공부만 하다 나이트클럽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터져 나오는 흥분 같았다. 거리의 카페에는 삐딱하게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방인의 눈에 파리는 자유분방하고 수다스러운 십 대 소녀였다. 그런 파리가 런던보다 더 편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호텔로 이동하기 위해 지하철 티켓인 까르네(carnet)를 구입했다. 이 지하철 티켓에 대한 경이로움도 어느새 평범한 일상으로 바뀌어갔다.
파리 개선문 ⓒ 정원철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가장 먼저 개선문을 가기 위해 지하철 노선을 찾았다. 개선문을 시작으로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콩코드 광장과 루브르 박물관까지 천천히 걸어볼 작정이었다. 파리의 지하철은 영국과 같은 듯 달랐다. 벽면의 흰색 타일만 보고 가다 보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 잃어버리고 방향을 다시 찾아 헤맸다. 노선은 엉키고 성긴 거미줄 같았고 안내 표지판을 따라가다 보면 다시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하철 안은 런던과 다른 낭만이 있었다.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뮤지션들이 지하철 플랫폼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을 잡아끌었다. 지하도에서 울려 퍼지는 연주와 노래로 지하철 안은 공연장이었다. 이들은 지하철에서 버스킹 하며 돈을 벌어 여행하는 뮤지션이 아니었다. 파리는 지하철에서 공연할 자격을 오디션을 통해 준다. 라이선스를 가진 뮤지션이고 악기통에 쌓이는 동전은 부수입이었다. 그런 파리가 영국보다는 좀 지저분하고 무질서해 보여도 자유롭고 낭만적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나오자 높이 50M의 개선문이 육중한 모습이었다. 개선문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파리의 한 복판에 있음을 실감했고 기분 좋은 설렘이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흔들렸다. 개선문의 전망대로 오르기 위해 줄을 길게 늘어선 사람들과 사진을 찍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개선문 주위는 번잡했다. 이 번잡함을 벗어나 샹젤리제 거리 쪽으로 나와 길을 따라 걸었다. 개선문의 위용, 자동차로 가득 메운 대로, 명품샵이 즐비한 이 거리가 낭만적일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일직선으로 늘어선 샹젤리제 거리의 플라타너스 가로수 아래를 걸었다. 어디선가 이브 몽땅이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고엽’을 부르는 상상을 했다. 샹송이 흐르는 샹젤리제 거리를 걷는 상상을 하며 이곳에 왔다. ‘낭만적이어야 하는 것 아니야’라는 불만에서 ‘낭만적이어야 하는데’라는 불안으로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질 즈음 인도 한복판에 있는 노상카페에 앉았다. ‘낭만’이라는 의미를 포탈에서 검색해 보았다. ‘다양성을 인정하며 느낌, 충동, 열정 등으로 자유로운 창조력으로 표현하는 콘셉트이다’라고 적혀있었다. 그렇다면 파리의 거리는 낭만적이었다.
콩코드 광장 ⓒ 정원철
사람들 속을 유유히 걷다 보니 오른쪽에 쁘띠 팔레와 그랑 팔레가 있고 조금 더 내려가니 콩코드 광장이 나왔다. 이곳은 18세기 프랑스혁명으로 루이 16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곳이다. 화합이라는 뜻의 콩코드는 루이 16세의 처형 이후 화합을 소원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광장 중앙에 이집트 람세스 2세 때 제작된 룩소르 신전의 오벨리스크가 서 있었다. 이집트에서 옮겨 놓는데 4년이 걸렸다. 루브르 박물관에 도착하기 전 뛸르히가든을 지났다. 그런데, 가든을 끼고 걷는 길은 그냥 단단한 흙길이었다. 발밑에서 조그만 돌들이 발길에 스쳐 구르며 소리가 났다. 서울 같았으면 남는 예산으로 보도블록을 깔았을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으로 들어서는 길이 먼지 나는 맨땅이라니 나의 통념과 상식 밖이었다. 맨땅은 파리 시민들의 보행권이 보장되지 않았거나 개선시킬 시민의식이 부족해 보였다. 그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여행객이기에 푸대접하는 것 아닌가 하는 억측도 불러왔다. 더 좋고 더 편리한 것이 있으면 고치고 바꾸는 개발도상국의 나라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낸 나에게 파리는 고칠 것 투성이었다. 플라타너스 아래 누가 앉을지도 모르게 버려진 듯 한 의자에 앉았다. 40년 이상 지켜온 파리에 대한 로망에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오랫동안 가슴앓이 한 사랑한 사람을 직접 만났는데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자꾸 나를 괴롭히는 꼴이었다.
지나고 보니 지금까지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데 지나치게 엄격했다. 무엇이든 내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고 고치고 바꾸는데 열 열했다. 그러지 않으면 무용한 인간으로 전락할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혔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 진짜 모습을 잃어버렸다.
루브르 박물관 ⓒ 정원철
루브르 박물관에 도착했다. 루브르 박물관 주광장에는 유리로 만든 피라미드가 자리하고 있었다. 박물관 안은 다음에 들어가기로 하고 센 강 선착장으로 향했다. 어두워 지기를 기다렸다가 센 강의 유람선을 탔다. 한강의 유람선과 비슷했다. 유람선만 그런 게 아니라 승객들도 대부분이 한국 관광객이어서 정말 한강 유람선에 탄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밤에 조명받아 빛나는 에펠탑이 이곳이 파리라는 것을 겨우 상기시켜 주었다. 그리고, 파리의 밤공기는 감흥이 제대로 강림하신 어머니들의 탄성으로 술렁였다. 프랑스의 유명 건축가인 귀스타브 에펠이 이 탑을 세울 당시 많은 반대가 있었다.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인간은 경계심을 갖게 된다. 그 당시에 살았다면 아마도 반대 집회에 참석했을지도 모른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경계심과 불안으로 뛰어드는 것이 여행이다. 불편함과 편견 투성이인 채로 걷다 보니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있었다. 그러한 나를 알아차리고 생각이 이쯤에 이르니 이제 겨우 세상은 보이는 대로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