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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 영국 런던 #3

런던에서의 셋째 날 (2016년 6월 9일)

by 정원철
버킹엄 궁전 ⓒ 정원철

매일 오전 11시가 되면 버킹엄 궁전의 근위병들은 교대식을 한다. 런던에 온 관광객은 모두 이 교대식을 보기 위해 버킹엄 궁전에 몰려든다.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너무 서둘렀나 보다. 교대식이 있기까지는 1시간도 넘게 남았다. 버킹엄 궁전 길 건너편에 있는 그린파크의 벤치에 앉았다. 날씨는 청명하고 공원의 공기는 상쾌했다. 공원 안에 있는 플라타너스는 혼령이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크고 오래되어 보였다. 나무만 보아도 이 공원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말해주었다. 그 옛날 이 플라타너스 길 위를 말과 마차를 타고 지났을 것이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눈을 감으니 바람에 나뭇잎이 스삭거리는 소리가 신비롭게 들렸다. 지친 마음에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불어왔다. 근위병 교대식만 아니었으면 한동안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시간에 맞춰 자리를 잡으니 근위병 교대식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서울 광화문에는 수문장 교대식을 보러 온 외국인들이 많다. 그들과 나의 생각이 비슷할지 모르겠다. 근위병 교대식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었다.


내셔널 갤러리 ⓒ 정원철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내셔널 갤러리에 갔다. 천재화가 라파엘이 그린 교황 율리오 2세의 초상화가 이곳에 있었다. 유럽에 오기 전 기억의 저편에 있던 유럽사를 다시 들춰 보았다. 교황 율리오 2세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을 짓고 조각에 미친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도록 강요했던 인물이다. 실제로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늙은 교황이 더욱 괴팍해 보였다. 미술에 특별한 관심이 없기도 해서 내셔널 갤러리에 입장할 때 별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화가의 생생한 붓 터치가 살아있는 대작 앞에서 발길을 뗄 수가 없었다. 중세의 종교화는 그림으로 신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탄생하였다. 그래서, 성경책의 이야기를 옮겨놓은 그림책 같았다. 근세에는 화가에게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주문했다. 화가는 자본의 요구에 맞는 그림을 그리는 장인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앞에 학생들 수십 명이 앉아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한국교과서에 실린 고흐의 ‘해바라기’ 사진은 내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학 가는데 필요 없는 지식은 시간낭비이고 의미도 없었다. 밀레의 ‘이삭 줍기’도 그 진가를 다시 알게 되었다. 밀레는 한 통의 물감도 사기 어려웠다. 그런 그가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적 욕구로 어느 누구도 사지 않을 그림을 그렸다. 미술관에서 중세와 근세 그림을 보고 있으니 미술사를 자연스럽게 배우고 있었다.


그리니치 천문대 ⓒ 정원철

런던에서 이틀 정도를 보내니 런던이 조금 답답하게 여겨졌다. 회색 건물 숲에서 어디론가 분주히 움직이는 차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니 덩달아 내 마음도 바빴다. 가장 효율적인 동선으로 런던의 명소를 둘러보는 계획을 세웠다. 열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온 나에게 실패와 낭비를 안겨줄 수 없었다. 이틀 동안 걷고 보고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나무와 숲과 바람이 참을 수 없이 간절해졌다. 오후 늦게 다녀올 만한 런던의 근교를 찾아보았다.

그리니치 천문대가 서울로 치면 팔당 정도에 있었다. 오후 5시가 다 되어 전철에 올랐다. 저녁 9시는 되어야 해가 지니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었다. 지하철에서 지상 경전철로 갈아탔다. 서울의 외곽 국철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경전철은 런던을 차츰 벗어나 시 외곽으로 향했다.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도시 여행이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차 창 밖을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자니 어느새 커티삭 그리니치 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내려 그리니치 천문대까지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자전거를 탄 착하게 생긴 소년에게 길을 물었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로 친절히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나, 너무도 친절히 설명해 주어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럴 때는 그냥 알아듣는 척하고 웃으며 ‘땡큐’라고 말한다. 못 알아들어도 다시 묻지 않았다. 다시 말해주어도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다시 시도해 보는 편이 나았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호텔 안에만 있었어야 했다. 영어를 능숙하게 잘하면 여행에서 더 많은 것을 풍부하게 경험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여행에서 영어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생각보다 실행하는 용기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낯선 세상 속으로 들어갈 때 너무 많은 계획과 생각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보다 신발부터 신고 길을 나서면 시간의 흐름 속에 나는 밀려가듯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시작부터 원대한 목표와 완벽한 계획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보다 오늘 아침밥 든든히 먹고 신발 신고 길을 나서는 작고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다 보면 하루는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여행의 하루가 어디론가 흘러가고 나는 여기 그리니치에 있다. 그런 나에게 스스로 대견하다 말해 주었다.

그리니치 천문대에 도착하니 해가 서서히 져가고 있었다. 천문대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었고 공원을 지나야 했다. 천문대로 가는 공원 잔디에 앉아 해가 져가는 런던을 보았다.


그리니치 피에르 ⓒ 정원철

그리니치에서 숙소로 돌아갈 때는 그리니치 피에르에서 템즈강의 수상버스를 타기로 했다. 이런 여행정보들 대부분은 여행 블로거들의 소개를 통해 얻었다. 한국 여행 블로거의 소개는 대단하다. 우리는 유발 하라리의 말대로 데이터교를 숭상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블로거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숙소까지 노을 지는 템즈강을 배를 타고 가보기로 했다. 런던은 지하철, 버스, 수상버스의 교통수단 간의 연결이 체계적이었다.

수상버스 승강장 위에 도착했을 때 영국의 중년 여성이 뜨개질을 하며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타야 할 배가 출발했는지 물었다. 그녀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는 짧은 대답 후에 나에게 쉴 새 없는 질문을 이어갔다. 템즈강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그녀의 수다가 실려왔다. 바람 속에서 나는 대답 없이 마냥 웃고만 있었다. 그렇게 영국에서의 마지막 하루가 저물어 갔다.

템즈강 수상버스 ⓒ 정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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