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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원 Oct 15. 2021

황새냉이

   꽃말 : 사무치는 그리움

그리움에 대하여....     


‘그리워하다’를 국어사전에서는 ‘보고 싶거나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라고 풀어쓰고 있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일은 그리워하는 이가 없을 때보다 가슴이 아리지만 지는 해를 바라보는 맛이 달라서 좋다. 어쩌다 오십이 넘으니 누군가를 그리워한다고 하면 눈치 볼일이 많다. 은교를 탐하는 노인네가 떠오르기도 하고 지난 인연에 대한 추궁의 빌미를 주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도 숨길 수가 없다. 그런데 정작 그리워할 대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낡은 흑백사진처럼 흐릿해져 간다. 이 지점에서 그리움이란 말이 곱씹어진다. 그리워서 아픈 게 아니라 그리워할 대상이 점점 사라져서 슬프다.     

 


  내가 살면서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한 일은 중학교 2학년 때이다. 사춘기 소년의 마음은 얇은 한지 같아서 쉽게 물들고 스며들어 아슬아슬하다. 눈 오는 날 흰색 파카를 입고 서울에서 이사 온 여학생을 버스정류장에서 보았을 때 온 세상이 하얀빛으로 뒤덮였다. 흰색도 선홍빛만큼 강렬하게 마음을 물들일 수 있다. 그때의 전율은 내 마음에 사진처럼 남아 있다. 그날 이후로 일 년 동안 그 여학생을 마주할 때는 하늘에서 일 년 내내 흰 눈이 내렸고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지 못하는 날은 사진처럼 박힌 흰색 파카 속의 하얀 얼굴을 떠올렸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서 수줍게 말을 걸었고 가을날 갈대밭이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둘이 앉았다. 그 소녀는 이미 사춘기를 지난 듯 조숙했고 수줍은 나를 귀여운 동생 대하듯 여유롭기까지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더 이상 그 소녀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대신 흰 눈 내리는 날 흰색 파카를 입은 서울 소녀는 지금도 나이를 먹지 않고 내 마음에 남아 있다. 그리워하는 대상에 대한 그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헤어져 있으면 그리운데 정작 만나고 보면 실망하고 헤어진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면 또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내 마음에 허상을 만들고 이미지를 덧씌우고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사춘기 소년이나 하는 일을 나이가 먹어도 여전하면 인생 고달프다. 하지만, 내 마음에 나만 아는 별을 가진 것처럼 혼자서 즐겁다. 흰 눈 내리는 날이면 그 소녀가 어떻게 늙었을까 생각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그 사이 제정신이 좀 들었다.           


  어느 날 뜬금없이 그냥 안부가 궁금하고 지난 일 들이 떠오르며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은 그러고 다시 사그라든다. 만나지도 연락할 길도 없기에 길게 생각해 보아야 헛일임을 몸이 먼저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그리움에도 결이 다른 구석이 있다. 내 마음에 허상을 심고 욕망하는 그리움이 있는가 하면 지난 세월 속에 삶의 지문처럼 남겨 놓은 사람은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면 순간 잉크 번지듯 스며 퍼질 때가 있다. ‘잘 살고 있나?’ 마음속으로 물으며 차 한 잔을 마신다. ‘잘 살고 있겠지’ 하며 그러길 바라는 마음과 그럴 거라고 믿는 마음을 포개어 생각을 내려놓는다.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 힘들어서 애당초 만남도 건성인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그런 사람이다. ‘오월 꽃잎 날리듯 그렇게 헤어지기로 해’하며 돌아서서 뒤돌아보지 않고 갈 자신이 없었다. 딱히 연인이 아니더라도 사람들과 깊게 정이 들면 헤어지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마음의 벽을 쌓고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안정감이 생겼다. 지나온 사람들에게 내 마음은 당신들이 보았던 나보다 훨씬 마음 깊이 당신들을 사랑했음을 고백한다. 그냥 여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냉랭하게 굴었던 것뿐이다.   

     


 사건과 경험이 존재의 차원이라면 그리움은 생각의 차원이다. 그리움에 이어서 오는 감정은 복잡하다. 사람의 언어로는 그 마음을 풀어놓기에 너무도 빈약하다. 누군가는 그리움이 병이 되기도 하고 입가의 미소가 나오기도 하고 슬프지만 마음 한구석에 기쁨이 있기도 하다. 그리움이 가져오는 갖가지 감정들로 삶은 살아있음을 느낀다. 오늘처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것들을 그리워해야 한다. 한 낮 햇살이 몸에 양분을 만들 듯 하루 한 번은 그리움으로 감정을 부추기며 지내야 한다. 어느 순간 그리운 것들이 다 사라지기 전에 지난 앨범을 간혹 들춰야 한다. 여행을 다녀온 후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데 사진이라도 찍어야 그리울 때 꺼내 볼 수가 있다. 그리움은 지나온 일들에 나만의 의미를 담고 엿처럼 굳어버린 감정을 살살 녹여낸다. 오늘은 입가에 미소 번지는 일들을 그리워한다. 그때의 그 사람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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