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아율 - Easy on me (prod. glowingdog)
어릴 때에는 꾸물거리며 오는 시간 앞에 서서 도대체 저 시간은 언제오나, 하고 기다렸는데 지금은 허둥지둥 쫓아가기도 벅차다. 열심히 쫓아가는데도 뒤쳐지는것 같다, 싶으면 시간은 멱살을 잡아서라도 있어야 할 곳으로 데려다준다.(그렇게까지 친절할 필요는 없는데...) 그렇게 멱살잡혀 온 11월의 마지막 날. 내일이면 12월이고, 만우절의 거짓말 같았던 2020년의 한 해도 끝나가고 있었다. 늘 말도안되는 시간의 속도가 놀라울 뿐이다. 시간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는데 앞으로의 시간은 얼마나 더 빠르게 흐를까.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며 성산항으로 가는 길.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우도이다. 감격스럽게 맑은 날씨와 푸른빛의 바다는 마음을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음악은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것 만으로도 오늘 하루를 다 가진 것 같아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부자가 되는 법은 참 단순하고, 행복은 참 별거 아닌 곳에 있다.
그 별거 아닌 행복에 너무 심취해있던 탓이었을까. 우리는 원래 타려던 배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하하하하)
어쩐지 순탄하다 했다, 하지만 배를 놓쳤다고 침울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관광 후 나올 수 있는 배만 있으면 된다. 아직 배는 많고, 시간은 더 많다.
성산항에서 우도까지는 십여분남짓. 우도에 도착하자마자 해야 하는 일은 맛집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전기차'를 대여하는 일이다. 우도를 한 바퀴 돌아보기 위해서는 넘치는 체력과, 튼튼한 두 다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탈것'이다. 튼튼한 두 다리로 걸어 다녔다가는 한 바퀴는커녕 제주로 돌아가는 배가 끊기기 전까지도 다 돌아보지 못할 것이다. 자전거를 타기에는 너무 춥고, 바람이 너~어무 많이 분다. 우리는 그 '탈것'으로 전기차를 선택했는데, 배에서 내리자마자 전기차 대여점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자신의 가게로 오라며 손짓한다. 다 비슷비슷하지만 전기차 모양이나 앉는 좌석이 미묘하게 다 다르니, 잘 보고 골라야 한다. 잘 고르는 좋은 팁 같은 것은 없다. 그냥 좋아 보이는 걸 타면 된다.(하하하하)
자동차로 분류되는 전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면허가 필요하다. 장난감같이 알록달록한 색상과, 스쿠터에 지붕을 씌운 것 같은 생김새에, 두 개도 네 개도 아닌 어정쩡하게 세 개의 바퀴, 2인용 자전거 같은 승차감, 그와중에 핸들과 브레이크의 구색을 갖춘 제법 자동차같은 전기차가 신기했다. 수동으로 열어야 하는 창문이 이 차의 포인트랄까?하하하. 이 작은 섬을 돌아보는 것으로 딱 제격인듯 하다.
우리는 대여점에서 나눠준 지도를 탐색하다가 제일 먼저 서빈백사로 향했다. 10년 전 수학여행 이후로 처음이었다.(당시 이곳에서 뭘 했는지 기억나는 것은 없다.) 이 바다의 유명세는 수심에 따라 다른 에메랄드 빛깔의 바다와 백색의 해변에 있다. 해변을 구성하고 있는 백색의 퇴적물은 일반적인 모래가 아닌 바닷속에 자라고 있는 홍조 단괴가 쌓인 것인데, 팝콘 같기도 하고, 석기시대 초콜릿같이 생긴 모양이 특이하고 예쁘다.
혹시라도 이 단괴들이 마음에 든다고 함부로 주머니에 넣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우발적이든, 고의 적든, 타의적 든, 이 단괴들을 가지고 비행기를 타다가 발견되면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하니, 눈에만 담기로 했다. 본래 자연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점심으로 보말칼국수를 든든하게 먹고, 우도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는 땅콩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던 중, 발견한 우도의 독립서점 <밤수지맨드라미>. 제주바다에 사는 멸종위기의 분홍색 산호의 이름을 따온 이 책방은,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책방이 되겠다. 어쩌다 이렇게 멀고 외딴곳에 책방을 차릴 생각을 했을까. '너무 외딴곳이라 오는 사람이 있으려나...?'라는 생각은 괜한 걱정이었다. 잊고 있었다. 이곳은 관광지라는 것을. 책방을 들어서니 이미 발 디딛기 조심스러울 만큼 북적이고 있었다.
밖의 세계와는 조금 다른 시간이 흐릅니다. 틀림없이 효율주의의 반대쪽을 향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효율적인 가게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효율적인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효율적인 책방이 손님에게 두근거림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밤 수지맨드라미 창문에 있던 글>
효율주의의 반대쪽을 향한 이곳에서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갈까, 문득 궁금해진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과, 책을 읽는 사람과, 엽서를 고르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책 한 권을 들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 거리 헤매기>. 이전에 즐겨 들었던 N사의 오디오 클립에서 읽어준 내용이 흥미롭기도 했고(공유의 목소리가 좋았기 때문이었을지도...) 그냥, 왜인지 한 권쯤 사고 싶었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책방에 온 것을, 이 효율적이지 않은 책방에서 느낀 두근거림을 기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날씨 요정인 윤희 언니와 함께한 우도는 날씨가 정말 좋았다. 맛있는 땅콩아이스크림 파는 곳을 찾다가 아무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와 땅콩아이스크림 하나를 주문했다. 커피는 카페인이 필요한 우리들에게 필요한 수혈 같은 것이었고, 땅콩아이스크림은 바닐라맛 하겐다즈 위에 땅콩가루 조금 올라간 것이 다였지만, (실패할 수 없는 조합이지만 땅콩아이스크림이라고 하기에는 아쉽다.) 이 카페가 마음에 들었 던 것은 취향저격의 음악 선곡이었다. 나오는 노래마다 검색하다가, 화장실 안에서 까지 검색을 했는데(화장실 안에서 음악 검색은 처음 해봤다.), 나오자마자 언니가 하는 말이 '방금 좋은 노래 나왔는데 검색을 못했어ㅜㅜ' 라는 것이었다. 내가 이러려고 화장실에서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구나! 그렇게 카페 화장실에서 훔쳐온(?) 음악을 공유하고, 그 음악은 드라이브하는 내내 우리들의 귀를 책임져 주었다. 지금도 언니와 만나면 가끔 얘기한다.
" 우리, 그때 그 노래 뭐였지?"
" 무슨 노래? "
" 그때~ 그 우도에서 들었던 그 노래 있잖아~~"
" 아ㅋㅋㅋ 그 노래 좋았지 이아율 - Easy on me!!"
우도에서 나온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성산에서 가까운 백약이 오름이었다. 1일 1 오름 하기로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첫날 갔던 용눈이 오름이 좋았던 탓이었다. 평일 늦은 오후 시간이라 그런지 오름을 올라가는 사람은 우리와 어떤 커플뿐이었다. 어제의 오름은 정신 못 차리게 부는 바람에 허우적 대었는데, 오늘은 바람 한 줌 없이 고요했다. 앞서 올라가는 사람의 숨소리마저 들릴 만큼의 고요함이었다. 억새와 나무는 미동 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우리는 가쁜 숨을 쉬며 올라갔다. 언덕 하나를 남겨두고 하늘을 보니 그윽한 분홍빛의 노을이 감돌고 있었다. 더 높은 곳에서 이 광경을 보고 싶어 헐레벌떡 언덕을 마저 올라가니, 눈에만 담을 수 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숲의 소리를 느껴본 적이 있는가. 처음 느껴보는 평화로움이었다. 돗자리나 신문지 없이 바닥에 철퍼덕 앉아본 것이 언제인지, 그렇게 앉아있다가 누웠다. 롱패딩을 입고 누워보니 침낭에서 야외취침을 하는 기분이다. 누워보고나니 뭐랄까, 자연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억새가 부딪히면서 내는 소리, 풀벌레 소리, 바닥의 차가운 공기, 코 끝과 얼굴을 쓸고 가는 바람에 오름과 하나가 된 기분. 이렇게 계속 누워있으면 돌이 될 것 같다. 오랜 시간 한자리에 있다가 돌이 되었다는 설화의 이야기가 진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다가 달이 뜨는 것을 보고 서야 내려 올 수 있었다. 이 감각은 꽤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이러다 맨날 아무 데나 눕는 거 아닐까 몰라.)
언니와의 마지막 날 밤. 돌아오는 길에 회 한 접시를 포장해서 게스트하우스 부엌 테이블에 앉아 부엌의 문이 닫힐 때까지 떠들었다. 하루 종일 같이 있고도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함께 쌓은 추억에 할 얘기가 더 많아지나 보다. 이 밤이 아쉽다.
시간이 빠르게 간다고 느낀다면, 시간을 즐겁게. 잘. 보내고 있는 것이라는 택시 아저씨의 말이 떠오른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며드는 자잘 자잘한 행복에 충만한 기쁨을 느낀다.
오늘의 우당탕탕 제주도
성산항-> 우도 한 바퀴(보말칼국수와 밤 수지맨드라미, 그리고 땅콩아이스크림, 검멀레 해변 )-> 백약이오름-> 회 한 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