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ryce Vine - La La Land
12월이 되었다. 이 의미는 제주에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는 것과 동시에 제주에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집에 너무 가고 싶다. 객으로 떠돌아다니면서 지내는 것이 아닌, 편히 있을 수 있는 곳. 오롯한 나의 공간이 있는 집에 가고 싶다. 집 밥이 먹고싶다. 가족들이 보고싶다. 익숙한 동네거리가 그립다. 짐을 쌀까 말까를 고민했지만 '그래도 이왕 온거 한달 다 채우는 게 낫지 않아?' 라는 친구에 말에 오기가 생겨 이 여행을 계속 하기로했다.
윤희 언니와의 마지막 날. 원래의 일정은 내일까지지만, 변동된 일정에 하루 먼저 육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쉽다. 오늘을 어떻게 보내야 잘 놀았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다가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함덕해변의 델문도를 가기로 했다. 일주일 가까이 함덕에 있었지만 가지 않았던 델문도. 왜 아직도 안 가봤냐는 타박과 함께, 언니가 가보자고 했다.(그러게, 왜 안 가봤을까...?)
델문도는 아침임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함덕의 사람들은 다 이곳에서 아침을 시작하는 듯 하다. 매일 느지막이 일어나 점심즈~음 활동하던 나에게 이 아침의 풍경은 어색하고 낯설다.맥도날드의 아침 풍경같은 느낌이랄까? 어쩌면 함덕의 맥도널드와 맥모닝은 델문도가 책임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다가 보이는 인기 좋은 실내 창가 자리는 이미 만석이었다. 바다를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은 실외 테라스에 앉아 겨울바람을 맞으며 빵과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만석이었다. 미어캣 처럼 목을 길게 쭉 빼고 두리번 거리다가 마침 난 빈자리에 기꺼이 겨울바람과 함께 테라스 자리에 앉았다.
"괌에 온 것을 환영해! 근데 왜 이렇게 춥냐"
주문한 메뉴를 받아오는 중 시작된 언니의 상황극에 웃음이 빵-. 깔깔깔깔. 재치 있게 받아치고 싶었지만 실패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MBT가 'I'로 시작되는 노잼 인간이다.) 에메랄드빛의 함덕해변에 오게 된다면 이런 상황극은 누구나 해봤으리라.
한참을 깔깔 대다가 "다 식겠어, 빨리 먹자."라는 말에, 아몬드가 잔뜩 올라간 파운드와 커피를 입으로 밀어 넣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바삭하게 구운 아몬드와 적당히 달고 꾸덕하고 푹신한 파운드가 생각보다 커피와 잘어울려 놀랐다. 매일 아침 출근도장을 여기로 찍었어야 했는데...(일주일 동안 뭐했니).
델문도에서 아침을 먹고 전날 계획해 둔 절물 자연휴양림을 갔다. (아, 중간에 만춘 서점을 또 갔다. 그냥 지나칠 수없어서 언니와 책을 또 한 권씩 샀다. 제주에는 재미있는 독립서점이 많은데, 어떤 여행사에서 이 서점들의 지도를 만들어서 배포한 것을 지난번 방을 같이 썼던 룸메가 주었다. 책 한 권 이상 구매할 경우 도장을 찍어주는데, 도장이 찍힐 때마다 왠지 모를 뿌듯함과 쾌감이 나를 자꾸 서점으로 이끌었다.)
이곳은 원래 절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없어지고 30년 넘은 삼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빽빽하게 심어져 있던 사려니숲길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숲은 까마귀 울음소리와 축축함으로 가득했다. 축축이라고 해야 할지, 촉촉이라고 해야 할지... 그 중간 즈음의 촉감이 코끝과 손끝으로 느껴졌다. 자칫 음산한 분위기가 들 수도 있지만 삼나무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의 일렁거림과, 빛의 그림자가 숲을 따뜻하고 신비롭게 만들었다. 그 안의 좋은 에너지가 온몸으로 들어오고 있음이 느껴졌다.(이것이 바로 피톤치드의 효과!?)
숲은 산책길, 공원, 절물오름과 이어져 있어서 원하는 코스로 걸을 수 있다. 가족들이랑 함께 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실제로 가족단위의 관광객이 많았다.) 이제 좋은 공간을 가거나 맛있는 것을 먹으면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난다. '오면 참 좋아할 텐데, ' 하고. 어릴 적 주말마다 각종 유원지나 축제에 나와 동생을 데리고 다녔던 부모님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숲길 구석에서 언니와 평소라면 절. 대. 하지 않을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어디서 본건 있어가지고) 결과물은 처참했지만 웃고 떠들었던 시간들이 사진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어서 좋았다. 우울할 때마다 보는 앨범에 저장해둬야겠다.(역시 남는 건 사진뿐 이다.)
배가 찢어지게 웃고 한바탕 놀고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우리는 해물라면을 먹기 위해 애월로 향했다. 애월의 한담, 목 좋은 곳에 유명한 해물라면집이 있다는 얘길 언니에게 듣고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휴무날이었다. 위는 이미 해물라면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데, 받은것도 없는데 빼앗긴 기분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근처 아무 곳이나 들어가 밥을 먹었다. 먹고 나오니 저 멀리고 쿵짝쿵짝 들리는 소리에 이끌려 간 곳에서 눌러앉아버렸다.
그곳은 옛날에 말로 만들었던 유명 연예인이 운영한다는 카페.(지금은 다른 사람이 인수했다고 한다.) 애월 몽상이었다. '이게 여기 있던 거였구나?!' 카페와 함께 칵테일바를 운영하는 곳에서 DJ가 한참 믹싱 한 음악을 들려주고 있었다. 괌은 함덕에만 있는 게 아니라 애월에도 있었다. 모래바닥 위에 소파와 밀짚 파라솔과 썬베드가 여기가 진짜 괌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한껏 취한 분위기와 함께 커피를 홀짝였다. 공간을 꽉 채운 음악도 한몫했는데, 디제잉 한 음악이 나올 때마다 음악의 제목과 가수를 알아내기 위해 핸드폰이 분주했다. 우리의 음악이 또 하나 생겼다.
언니와 공항에서 헤어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오늘은 함덕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함덕에서 안 좋았던 컨디션과, 내내 흐렸던 날씨 탓에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사실 숙소가 함덕에 있긴 했지만, 함덕을 열심히 다니진 않았던 것 같다. 무엇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더 많다. 이것이 함덕에 또다시 올 이유가 되지 않을까. 이번 여행에서 함덕에 남긴 것은 함덕 해수욕장과, 서우봉, 서점, 감자 빵, 마늘빵, 짬뽕, 흑돼지, 우럭, 방어...(죄다 먹는 것뿐이잖아?) 먹는 게 남는 거지 뭐.
오늘의 우당탕탕 제주도
델문도-> 만춘서점-> 절물자연휴양림-> 애월 ->애월드 몽상 -> 김만복김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