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어린아들이 잠결에 던진 한마디에 찾아온
마흔 가장(家長)의 슬프고, 아픈 마음
오후 10시 30분!
퇴근시간에서 4시간 30분이 더 흘렀다. 그런데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노트북 작업으로 뻐근해진 목을 붙잡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무실엔 여전히 많은 동료들이 있었다. 모두 자리에서 바삐 노트북의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나처럼 프로젝트 일정이 얼마 남지 않은가 보았다. 잔뜩 긴장한 근육도 풀고, 머리도 식힐 요량으로 손에 커피믹스를 들고 다과실로 향했다. 걸어가면서 누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모두들 마감 기일에 맞춰 보고서를 완성하기 위해 작업 중이었다. 어떤 동료는 인사전략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고, 어떤 동료는 경영전략 보고서를 , 또 어떤 동료는 고객중심 경영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나를 비롯해서 남아 있는 동료들의 모습과 행동에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 공통점은 자리에 앉으면 기본 2시간 이상을 앉아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부족해서 이기도 하지만, 보고서 작업이라는 것이 현상, 문제, 개선이라는 논리를 만들고, 강화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두 번째 공통점은 한번 자리에서 일어나면 목을 붙잡거나, 관좌놀이를 꾹 누르고 있다는 것이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바라보고, 자판을 두드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깊은 사고를 2시간 이상 지속함으로써 받는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이다. 세 번째 공통점은 얼굴은 피폐해 있지만, 눈에는 열정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일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특별한 추가(야근, 주말 등) 수당도 제공되지 않는 일에 이렇게 다들 열심히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진하게 커피 한잔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보고서 작업을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되었을까? 타 놓았던 커피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따스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커피 한잔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식어가는 줄 모르고 보고서 작업에 열중한 탓이었다. 한 모금의 냉랭한 커피를 마시고 다시 보고서 작업에 열중했다. 손이 저려 왔다. 보고서 기획에 맞춰 각 페이지마다 담고자 하는 정보들로 채워갔다. 각 장표에는 어디서 어떤 자료들을 가져와 빈 공간을 메워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기술해 놓았기 때문에 쉴 사이 없이 자료를 끌어오고, 붙이고, 해석하고, 의미를 함축해 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오늘만 만든 보고서가 30페이지가 넘는다.
‘30페이지!’
말이 쉽지 각 장표마다 중요한 정보들로 채우고, 그 정보들을 논리적 흐름대로 구성하고, 프로젝트를 맡긴 고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 일을 몇 일째 반복하고 있다. 손에는 파스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사무실에서 이뤄지는 조용하고, 아주 치열한 전쟁이다.
‘시간과의 싸움!’
‘아픔과의 싸움!’
사무실의 불이 꺼졌다. 회사에서는 "일-가정 양립(Work and Life Balance)”을 표방하여 6시부터 한 시간 단위로 강제적인 소등 정책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시간까지 일하고 있냐고?’
대부분의 직업이 그렇겠지만, 나의 직업도 일과 가정 모두를 다 챙기기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일-가정 양립(Work and Life Balance)”제도는 일과 가정 둘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제대로 하려는 것에 방해가 될 때가 더 많다. 짧은 프로젝트 기간, 무수히 쌓여만 가는 자료, 그 자료를 주간단위로 정리하고,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프로젝트가 최초 목적한 방향으로 제대로 가는지 확인할 수 있고, 최종 결과물이 프로젝트를 의뢰한 기업의 성과를 높이고, 고객의 행복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진행과정에 대한 고객사와의 잦은 공유는 그래서 컨설팅에서 아주 중요한 활동이다.
오늘 어느 정도 해야 할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시계를 보았다. 역시나 자정을 넘겼다. 오늘도 지난 며칠처럼 하루를 넘겨서 집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동안 작업한 파일을 저장하고, 노트북 전원을 끄고, 선을 정리하고, 자리를 정리한다. 오늘도 눈은 건조하고, 머리는 문제가 잘 안 풀리거나, 구성이 맘에 들지 않을 때마다 손이 올라가 긁으면서 흐트러져 있고, 바지 속으로 잘 들어가 있었던 와이셔츠는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집으로 갈 생각에 마음은 조금 가벼웠다. 어린 아들이 떠올랐다. 어린 아들 생각에 맘은 행복으로, 얼굴엔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생각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나를 미소 짓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녀석!
‘잠시 후면, 4살 아들의 잠자는 모습이라도 보겠구나.’
‘자는 모습이 정말 천사 같은 녀석.’
‘그런데 녀석의 깨어있는 모습을 본 게 언제였지?’
생각해 보니 거의 일주일이 넘은 것 같다. 물론 화상통화로 아들이 깨어 있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그래도 직접 얼굴을 본 것이 참으로 오래된 것 같았다.
어제 화상통화에서 아들이 한 말이 떠올랐다.
아들 “아빠!, 보고 싶어”
나 “아빠도 우리 아들 보고 싶어”
아들 “아빠랑 플레이도우(Play-Doh)하고 싶어, 일찍 와!”
나 “아들 어떡하지? 오늘도 늦을 것 같은데...”
아들 “아빠랑 밥도 같이 먹고 싶단 말이야”
나“...”
아들 “아빠랑 보드판(화이트보드)에 자동차랑, 세계 랜드마크들도 그리고 싶어”
나“...”
아들 “아빠! 오늘은 일찍 올 거지?”
나 “아들, 아빠가 일이 좀 많아서, 어떡하지?”
아들 “뭐야! 아빠 싫어!”
나 “미안해 아들”
아들 “아빤, 매일 늦게 오고...”
아빠가 보고 싶다는 아들의 그리움은 대화 중간에 화로 변했고, 전화를 끊을 때쯤엔 상실감으로 변해 있었다.
‘아들과 함께 놀았던 때가 언제였지?’
아들과 함께한 기억을 되새기며,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자정이 넘었지만 동료들의 차량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아마도 오늘 밤을 지새우는 동료들이 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얀색 소나타에 올라타고, 시동을 켰다. 이차를 구매한지도 10년이 다 되었다. 나와 함께 달린 거리도 20만을 훌쩍 넘긴 녀석이지만, 여전히 움직이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집으로 갈 때면 더 힘을 내는 것 같은 녀석이다. 아들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다는 내 맘을 아는지 엔진 소리가 더 우렁차게 들렸다.
라디오를 켰다. 자정이라 라디오에선 잔잔한 음악들이 주를 이뤘다. DJ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회사와 집까지 거리는 대략 18km. 올림픽 대로를 이용하면 평균 40분 정도 소요된다. 그렇지만 이 시간대에 이용하면 10분 정도면 집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 10분간의 라디오 청취. 음악은 마마무의 최신곡이 흘러나왔다.
별이 빛나는 밤
손끝이 시리더니 벌써 봄이 왔네.
꿈같은 바람이 불어 곳곳에
여느 때 와는 다른 듯 한 이 기분이 반가워,
내일은 좀 다른 날이 되려나.
중략
겨울이 지나고 또다시 꽃은 피고,
따뜻한 공기 냄새가 날 감싸
달라진 거 없는 똑같은 일상이 반복돼.
그래도 내일을 기다려봐.
유난히 한 줄의 가사가 가슴속에 자리 잡았다.
“달라진 거 없는 똑같은 일상이 반복돼”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00시 23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조용한 적막을 깨는 기계음 소리.
집 앞 현관에 섰다. 00시 26분.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조심스럽게 입력했지만, 버턴을 누를 때마다 나는 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다. 걱정되었다.
‘혹시 아내와 아들이 잠에서 깨진 않았을까?’
현관문을 열고, 조용히 집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가방을 옷 방에 내놓고서 바로 안방으로 갔다. 다행히 아내와 아들은 잠이 들어 있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아들의 발을 들어 넣으려고 했다. 아들이 눈을 떴다. 조심한다고 조심했지만 누군가 자신의 발을 붙들고 있는 것이 신경 쓰였나 보았다.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아들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아들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들게 한번 올려 떴다. 그리고 잠에 취한 듯한 목소리로 나에게 한마디 하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아빠, 왜 매일 늦게 와?”
아들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옷 방으로 향했다. 재킷과 바지를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샤워장으로 들어가 샤워기를 돌렸다. 물줄기가 쏟아졌다. 쏟아지는 물줄기에 온몸을 맡겼다. 4월에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는 것이 조금 이른 감이 없진 않지만, 차가운 물줄기는 나의 피곤과 스트레스를 씻어내주었다. 정신이 맑아졌다. 그 기분 좋은 느낌을 조금 더 즐기고 싶었다. 5분쯤 그 기분을 즐겼을까? 문득 잠결에 아들이 내게 한 말이 생각났다.
“아빠, 왜 매일 늦게 와?”
하루 종일 나를 기다렸을 아들.
나와 함께 놀고, 스킨십을 기대했을 아들.
난,
오늘도 아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제 겨우 4살 아들이 잠결에 한 한마디 말.
내 가슴 깊이 파고드는 아픔과 슬픔이 느껴졌다.
난,
친구이고 싶다.
그것도 그냥 친구가 아닌 좋은 친구.
아들의 좋은 친구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