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성묘하는 길에 찾아온
마흔 아들의 슬프고, 아픈 마음
오전 8시 큰집, 작은집, 그리고 우리 집 식구들까지 3 가족이 모여 설 차례를 지냈다. 조상님들께 한잔, 두 잔 잔을 올리고, 절을 올렸다. 제일 앞 열에는 큰아버지, 아버지, 작은 아버지가 자리 잡으시고, 뒤이어 큰집의 사촌 형 3명, 우리 집의 나와 형 그리고 작은 집의 사촌 형과 동생이 섰다. 나를 뒤이어 열 명이 넘는 조카들이 자리했다. 가장 큰 조카는 군대까지 다녀왔고, 가장 어린 녀석은 바로 나의 아들 5살짜리 아들이다. 나이 차이도 무려 20년이 넘는다.
새삼 나이를 생각했다. 마흔 하고도 넷이 된 나 그리고 바로 앞 줄에 계신 아버지를 보았다.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 메마른 체형 너무나 왜소해 보였다.
차례를 마치고, 차례상 위에 놓였던 음식들로 대가족이 둘러앉아 간단히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가 마무리되어 갈 때쯤 큰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성묘 가자!”
그 말에 한 사람, 두 사람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성묘 준비를 했다. 이동할 차를 준비하러 가는 사람, 성묘에서 쓸 재수를 준비하는 사람, 벗어놓았던 옷을 챙기는 사람...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산소 근처에 차를 세워 두고 먼저 산소로 향했다. 묘지와 묘지 주변은 작은 아버지와 형들의 벌초로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먼저 산소에 도착해서 어르신들이 오시는 모습을 보았다. 큰아버지(백부)와 아버지가 나란히 걸으시면서 산소로 오고 계셨다.
큰아버지(백부)는 팔순이 넘으셨다. 몸에는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여의셨고, 한 손에 지팡이에 의지해서 걸으셨다. 한 발자국 내딛는 모습만 봐도 얼마나 힘들어하시는지 알 수 있었다.
큰아버지는 2년 전 큰어머니(백모)와의 이별하셨다. 그 이후 급격하게 기운이 빠지셨고, 가끔 정신을 놓으시기도 하신다는 이야기를 아버지에게도 들었다. 아버지는 내게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제 얼마 남지 않으신 것 같다고 한탄해하셨다. 동생으로써 아주 긴 시간 동안 의지했던 형이 기운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힘든데, 정신마저도 놓으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상상이 되었다.
큰아버지 옆에서 걷고 계신 나의 아버지도 올해 팔순이 되신다. 다행히 아버지는 큰 아버지에 비해 아주 많이 건강하시지만, 예전에 비해선 부쩍 기운을 많이 잃으셨고, 늙으셨다. 얼마 없는 머리카락은 아주 오래전에 하얗게 변하셨고, 몸도 예전에 비해 많이 부쩍 여위어져 있었다. 큰아버지와 아버지 두 분 모두 키가 160cm가 조금 안되시는 조그마한 분들이시다. 그런 두 분이 나란히 걸어오고 계셨다. 오른쪽으로 햇살을 안고, 왼쪽으로는 산 그림자를 안으시면서 아주 천천히 한걸음, 한걸음 옮기시고 계셨다.
그런 두 분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문득 죄송함이 밀려왔다. 어제 새벽 시골집에 도착해서 아버지에게 했던 짜증스러운 나의 행동과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제저녁 늦은 10시경에 설 연휴의 교통지옥을 피해서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가 계시는 고향(경남 지리산 아래의 시골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서울 집에서 고향까지는 300 킬로미터가 훨씬 넘는 거리다. 명절이 아닌 평상시 주말에도 차로 평균 4시간 정도를 달려야지 도착하는 아주 먼 길이다. 그 길을 민족 대이동이 이뤄지는 명절(설날, 추석)에 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간을 요구될 뿐만 아니라 대단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남들처럼 아침에 일어나 대략 9시나, 10시 정도에 출발하게 되면, 오후 5시 이전에 집에 도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거의 7시간에서 8시간을 차에서 머물러야 한다. 7시간에서 8시간이라고 하면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을 테지만, 실제로 좁은 차 안에서 경험하면 정말 말도 못 할 고통을 안겨준다. 11년 전 추석에 그 고통을 직접 경험하였다. 그땐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시절이니 다행히 나의 아내와 어린 아들은 그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다.
11년 전 설날이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집에 있다가 아침 9시경에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언제 내려 오냐?”
아버지의 이 한마디에 갑자기 집에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랴부랴 준비를 하고서 10시가 조금 되지 않아서 차에 올랐었다. 그리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서 서울 톨게이트까지 가는데 무려 2 시간 하고도 40분이 걸렸다. 집에서 서울을 벗어나는데 필요한 거리가 불과 40킬로미터 정도이니 차가 시간당 14킬로미터 정도의 속도로 움직인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는 온통 차로 가득했다. 이동이라도 하고 있다면 다행일 정도로 붐볐다. 고속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길 위의 차량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 움직이나 싶다가도 멈추는 것을 반복했다. 움직이는 시간보다 멈춰 서 있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움직이지 않는 차는 한 평 남짓한 감옥이 따로 없다. 발을 뻗지도, 허리도 한번 제대로 펼 수 없는 감옥 말이다.
11년 전의 그 단 한 번의 고통은 나를 변하게 했다. 고향으로 내려가야 할 때면 그때가 명절이든, 아니든 교통상황을 일일이 체크하는 습관을 가지게 했다. 어제도 교통상황에 대한 뉴스를 듣고, 교통정체가 풀리는 시간을 예측해서 고향길에 올랐다. 다행히 예측한 것이 제대로 맞아떨어져서 새벽 1시 30분경 고향집에 도착했다. 서울 집에서부터 고향집까지 3시간 30분이 소요된 것이니, 평상시보다 훨씬 더 빨리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어두운 밤에 운전해서 인지 밀려오는 피곤은 피할 수 없었다. 아내와 어린 아들은 차에서 아직 자고 있었다. 아내를 깨우고, 자고 있는 아들을 조심스레 안고 고향집 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잡았다. 잠겨 있었다. 어제 출발하면서 아버지에게 전화로 도착하는 시간을 알려드렸었는데도 잠겨있었다. 문을 가볍게 두 번 두들겼다. 안에선 인기척도 없었다. 짜증이 밀려왔다. 두 번, 세 번 문을 세게 두들겼다. 그제야 아버지께서 계시는 안방에서 불이 켜졌다.
“둘째냐?”
아버지께서 나오셨다. 피곤한 몸, 안고 있는 아들이 혹시 감기라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어서 나는 예민해져 있었다. 아버지에게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싸늘하게 말했다.
“오는 것 아시면서, 문을 왜 잠가 놓았어요?”
“네 엄마가 습관적으로 문을 잠갔나 보다.”
아버지께서 문을 여시면서 한마디 하셨다. 아버지의 목소리엔 미안함으로 가득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신 산소는 집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산소 앞으로는 지리산에서 시작한 덕천강이 유유히 흐르고, 햇살이 잘 드는 남쪽을 향해 바라보고 있는 곳이다.
매년 이곳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오늘도 변함없이 생각했다.
‘참 좋은 곳이구나!’
준비한 제찬(조상님께 바치는 음식)과 제주(조상님께 올리는 술)를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지 앞에 올렸다. 집에서 차례를 지내던 것과 같이 맨 앞 열에는 큰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가 위치하시고, 나와 형들이 그 뒤에 나란히 섰다. 앞 열의 어르신들이 몸을 숙이셨다. 이어서 곧바로 우리도 몸을 숙이면서 절을 드렸다. 어르신들이 몸을 일으키셨다. 우리도 엎드렸던 몸을 일으켰다. 똑같이 한 번 더 반복했다. 산소에 누워계신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를 드린 후 제찬과 제주를 할아버지와 할머니 산소 위에 정성스럽게 던지고, 뿌려드렸다. 이 모습을 가만히 보시고 있던 큰아버지가 말문을 여셨다.
“두 분 참 어렵게 사셨다...”라고 시작한 말씀이 한동안 이어졌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어떻게 사셨는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으셨던 모양이었다. 큰아버지의 목소리는 과거에 대한 회상과 잃어버리신 기력으로 잘 들리지 않았다. 형들과 나는 큰아버지의 말씀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끝났다 싶었는데 큰아버지가 화제를 바꾸셨다.
“나하고 여기 있는 두 동생들 참 고생 많은 인생이었다...”
그 말씀은 어린 시절 일본에서의 생활, 한국에서의 먹고, 살기 위해 겪었던 치열한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큰아버지의 말씀이 끝나기 전에 아버지가 끼어드셨다.
“얘들한테, 그 무슨 말을 다”
“얘들도 니들이나, 내가 고생한 것 알아야 할 것 아이가?”
큰아버지가 없는 기력에도 불구하고,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큰아버지께선 본인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는 듯, 이 소중한 자리를 빌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고, 당부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다. 큰아버지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개입으로 중단되었다.
큰아버지와 아버지, 작은 아버지 세분이 한 곳을 보고 계셨다. 그곳은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앞으로 흐르는 덕천강이었다. 그리고 조금은 긴 침묵이 시간과 공간을 지배했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분은 덕천강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들을 하셨을까?’
‘팔십 년이라는 시간을 되돌아보셨을까?, 아니면 여기 누워계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해 생각하셨을까?’
아버지가 긴 침묵을 깨셨다.
“형님, 가시지요”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불편한 큰아버지를 부축해서 큰길로 모셨다. 이어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내려오셨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몸이 불편하신 큰아버지를 모시고 앞장서 왔던 길로 걸어가셨다.
나는 세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작은 키, 여위신 몸을 이끌고, 당신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아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걸어가시는 모습, 지팡이에 의지해서도 제대로 걷지 못하시는 큰아버지의 뒷모습, 얼마 남지 않은 하얀 머리카락과 건장 함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는 아버지의 뒷모습, 삶의 무게와 세월의 무게를 힘겨워하시는 세분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세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큰아버지에게 하신 말씀이 머리와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다.
“형님, 가시지요”
그 말씀이 우리에게‘안녕’이라는 말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에게 쏟으신 분들!
이제 사신 날보다 사실 날이 짧으신 분들!
오래오래 우리 곁에 남아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눈에 고이는 눈물을 몰래 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