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의 리더 RM은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UN에서 통역 없이 연설을 하고, 해외 인터뷰에서도 영어로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면, 많은 이들이 그가 유학파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순수 국내파다. 학창 시절, 어머니가 사준 미국 드라마 <프렌즈> DVD 박스를 한글 자막 → 영어 자막 → 무자막 순서로 반복해서 보며 독학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영어 자막이나 무자막으로 보기보다는, 한글 자막으로 충분히 내용을 이해한 후 영어 자막을 거쳐 무자막으로 넘어가는 방식이 그의 공부법이었다.
이 방식은 단순한 외국어 학습 전략을 넘어, 꾸준함과 몰입을 가능하게 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언어를 배운다는 건 결국 그 안의 세계에 들어가는 일이다. 그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일 때,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이 자막이고, 번역서다. 많은 사람들이 ‘원서로만 봐야 실력이 는다’고 말하지만, 나는 이제는 그 생각이 조금은 무모하게 느껴진다. 처음부터 원어로만 보겠다는 결심은 종종 이해도 재미도 놓치게 만들고, 결국 책을 덮게 만든다.
중국어 원서도 마찬가지다. 번역서를 먼저 읽고 전체적인 흐름과 주제를 파악한 뒤 원서를 펼치면 훨씬 수월하게 다가갈 수 있다. 특히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을 붙잡고 있을 때는 번역서라는 ‘사다리’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방법이다. 번역서를 본다고 해서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원서를 읽었다고 해서 모든 문장을 내 것으로 만든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얼마나 내 마음에 남았는지, 얼마나 오래 머릿속에 살아남았는지다.
예를 들어, 싼마오의 에세이 《사하라 사막》은 일상적인 이야기와 짧은 챕터 구성으로 되어 있어 초심자에게 무척 좋은 원서다. 나는 이 책을 번역서로 먼저 읽었다. 그리고 인상 깊었던 챕터 몇 개만 원서로 골라 다시 읽었다. 마치 단편소설 몇 편 읽는 기분이었다. 그런 방식이 오히려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었고, 기억에도 오래 남았다. 완독에 대한 부담 없이,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하며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번역서를 읽는 것은 단지 이해를 돕는 도구 그 이상이다. 원서 읽기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문장의 구조는 알겠는데, 이걸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어떻게 옮겨야 할지 모르겠을 때’다. 이럴 땐 모국어 실력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번역 전문가들이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다. “모국어가 번역의 기초다.” 결국 좋은 번역은 언어 실력보다도, 문장을 섬세하게 다듬는 감각에서 나온다. 번역서를 정답지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스터디 친구처럼 곁에 두고 비교해 보는 연습이 도움이 된다. 직접 번역해 본 뒤, 번역서를 통해 차이를 살펴보고, 더 자연스럽게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 보는 것. 그게 진짜 공부다.
물론, 나도 처음엔 무작정 원서만 읽으려 했다. 번역서를 보는 건 마치 ‘편법’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읽으면 왠지 ‘제대로 읽은 게 아니다’라는 자책이 들곤 했다. 하지만 ‘장한가’ 같은 고난도 작품을 접하면서 결국 번역서에 의지하게 되었고, 그 경험이 내 시야를 바꾸었다. 중국인조차 어렵다고 말하는 책을 억지로 읽는 건 결국 시간 낭비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스파르타식 독서를 하다 보면 문득 의문이 든다. “내가 지금 정말 실력이 느는 걸까?” 단어는 계속 찾지만 다시 보지 않고, 중요 표현도 그냥 흘러간다. 책을 끝까지 읽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 안의 문장 하나를 어떻게 내 언어로 다시 써보느냐다. 그래서 요즘은 더디더라도, 짧더라도, 내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외우고 써보는 연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결국 우리가 중국어 원서를 통해 얻고 싶은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언어로서의 중국어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로서의 중국이다. 그런데 이 둘은 원서만으로는 절대 다 담아낼 수 없다. 문화는 맥락 속에서 피어난다. 번역서는 그 맥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번역서를 읽는 것이 원서 읽기의 방해물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독서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완독하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내가 그 책에서 무엇을 얻었는지다. 번역서든 원서든, 짧은 한 문장을 통해 더 깊은 이해와 감동을 얻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독서다. 원서 읽기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번역서부터 읽어도 괜찮다. 그 길도 충분히 당신을 원서의 세계로, 언어의 본질로, 그리고 더 넓은 문화의 바다로 데려다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