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밑줄 긋고, 메모하며 읽기

중국어원서는 읽었는데 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까?

by 윤셰프








책을 정말 깨끗하게 보는 사람이 있다. 책에 흠집 하나 없이 읽고 덮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책장 하나하나를 조심스레 넘기고, 표지도 손때 하나 없이 고이 간직하려는 사람도 있다. 아마 책을 ‘소장품’처럼 아끼는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는 거리가 멀다. 국문서든 원서든, 나는 책을 가능한 지저분하게 본다. 밑줄을 긋고, 귀퉁이를 접고, 떠오르는 생각을 그때그때 휘갈겨 적으며 읽는다. 처음에는 책을 망가뜨리는 기분이 들어 망설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이 방식이 내 머릿속에 책을 가장 오래 남기는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책이 점점 너덜너덜해질수록 내 안에는 오히려 그 내용이 선명하고 깨끗하게 남았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생기는 고민이 있다. 읽을 때는 다 이해한 것 같은데, 막상 책을 덮고 나면 책 속의 말들도, 읽으며 떠올렸던 생각들도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특히 누군가 책에 대해 물어봤을 때 말문이 막히는 경험,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줄거리조차 흐릿하고, 인물의 이름이 가물가물하고, 그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국문서도 이러할진대, 낯선 언어로 된 중국어 원서는 오죽하겠는가.



글항아리 편집장 이은혜 씨는 “독서는 의외로 휘발성이 강한 행위다. 저자로부터 흘러나오는 이성과 감성의 양분을 오래 간직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느꼈던 심정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 말에 깊이 공감한다. 원서를 한 권 끝까지 읽고도 기억에 남는 문장이 하나 없다면, 그 독서는 헛헛하고 허무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마치 긴 여행을 다녀와 사진 한 장 없이 돌아온 기분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적극적으로’ 읽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책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씹어 먹겠다는 마음으로 읽는다. 효율적인 학습을 위해선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더 집중해서 기억해야 할 것을 구분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시작은 바로 밑줄 긋기와 메모다. 마음을 울린 문장, 기억하고 싶은 표현, 잘 이해되지 않는 문장, 문화적 차이가 엿보이는 문장 등에 표시를 하고, 떠오르는 생각이나 질문을 즉시 적어둔다.




<메모의 습관>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깨끗하게 읽으면 깨끗하게 잊힙니다.” 정말 그랬다. 다시 봐야 할 부분을 표시해 놓고, 반복해서 봐야 기억이 남는다. 그래야 뇌리에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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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권의 책을 대체로 세 번 읽는다. 물론 매번 정독으로 세 번을 읽을 수 있는 여유는 없다. 그래서 회독마다 초점을 달리한다. 1 회독은 가볍게, 흐름을 따라가는 데 집중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구분해 놓는’ 작업이다. 잘 모르는 단어가 여럿 나오는 문장, 다시 훑어보고 싶은 문장, 멋진 표현이 있는 문장에 밑줄만 쭉쭉 긋고 지나간다. 특히 소설일 경우에는 등장인물에 네모 표시를 하고, 주요 사건이나 배경에 밑줄을 친다. 의미 있는 문장이지만 왜 밑줄을 쳤는지 나중에 기억이 가물가물할 수 있으니, ‘공감’, ‘ㅋㅋㅋ’, ‘이거 나중에 다시 보기’ 같은 짧은 메모도 함께 남긴다.




2 회독은 밑줄 친 부분을 중심으로 다시 읽는다. 이때는 처음에 넘겼던 단어나 표현을 찾아가며 읽는다. 모르는 단어를 무작정 다 찾겠다는 부담은 버리되, 핵심 표현만큼은 꼭 확인한다. 단어를 모른 채 책만 읽는다면 읽은 권수는 늘어날 수 있어도, 머릿속은 텅 빈 채일 수밖에 없다. 마치 좋은 재료만 쌓아두고 요리를 못 하는 것과 같다. 어떤 문장이 ‘좋아 보인다’는 감각만으로는 실력을 쌓을 수 없다.




3 회독은 메모를 정리하거나 필사를 하면서 내 언어로 다시 말해보는 시간이다. 특히 책 한 권에서 몇 문장이라도 완전히 내 것이 되었다고 느껴질 때, 비로소 그 독서가 내 안에 스며들었음을 실감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책과 내가 주고받은 대화가 하나씩 쌓이는 과정은 내면의 풍경을 조금씩 바꾸어간다.




또 한 가지, 책을 읽으며 생기는 질문은 그때그때 책 한편 에라도 메모해 둔다. “작가는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여기서 주인공은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처럼 짧게라도 남기면, 재독 할 때 그 생각의 흐름을 이어받을 수 있다. 물론 포스트잇에 정리해도 좋지만, 육아 중에 책을 읽다 보면 빠르게 기록할 수 있는 쪽이 더 낫다. 중요한 건 ‘즉시’ 적는 것이다. 생각은 놀라울 만큼 빨리 사라지기 때문이다.



책은 조심조심 다루기보다, 나의 생각과 감정으로 덧칠하며 읽는 것이 더 큰 울림을 남긴다. 처음엔 너덜너덜하게 보였던 그 책이, 시간이 지나고 다시 펼쳤을 때 단 5분, 10분 안에도 핵심 내용을 떠올릴 수 있게 해 준다. 이건 내가 밑줄 친 문장들 덕분이고, 그 문장 안에서 또 중요한 것을 추려내다 보면 작가의 메시지가 더욱 선명해진다. 낡은 페이지 위에 새겨진 나만의 흔적이 곧 나의 독서력이 된다.



책을 정말 기억하고 싶다면, 원서를 진짜 ‘읽고’ 싶다면, 조심스럽게만 읽지 말고 나의 생각과 감정으로 능동적으로 읽어보자. 책을 덮은 뒤에 단 한 줄이라도 기억에 남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독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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