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으로 읽는 중국어원서

필사로 완성하는 중국어원서 읽기

by 윤셰프












책을 읽고 나면 묘한 허전함이 남는다. 분명 페이지를 넘기며 문장 하나하나를 따라갔는데, 시간이 지나고 다시 펼쳤을 때는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할 때가 많다. 단지 눈으로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문장이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방식으로, 문장을 눌러 쓰기 시작했다.



중국어 원서를 꾸준히 읽은 지 2년이 지났을 무렵, 실력에 대한 의문이 밀려왔다. 처음엔 그저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성취감이 있었다. 한 페이지, 한 챕터, 한 권을 끝낼 때마다 뿌듯했고, 독서모임에서 책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나도 이 정도는 읽을 수 있어”라는 자신감을 쌓아갔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을 중국어로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표현은 떠오르지 않았고, 문장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읽기만 했기 때문이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읽는 행위만으로는 내 언어의 항아리가 가득 차지 않았다. 읽기와 이해, 그리고 말하기 사이엔 분명한 간극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간극을 메우는 방법이 바로 ‘인출’이라는 작업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읽은 것을 끄집어내고, 다시 말하고, 다시 써보는 반복과 재구성의 과정. 그 시작점이 바로 필사였다.



'적어보자. 써보자. 내 손끝으로 중국어 문장을 한 번 더 살아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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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는 생각보다 강력하다. 눈으로 읽을 때는 스쳐 지나갔던 문장도, 손으로 따라 쓰는 순간 깊이 박힌다. 문장을 읽고, 잠시 기억한 다음 써보려 애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암기하게 된다. 의미를 새기게 되고, 구조를 이해하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 마치 작가의 숨결과 손끝이 전해지는 것처럼, 문장과 더 깊은 교감을 나누게 된다.


나는 필사를 할 때 음악을 틀지 않는다. 오롯이 문장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한 문장을 외우려 애쓰다가 중간에 막히면 다시 책을 들춰보고, 또 외워서 써본다. 단순히 베껴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넣어 적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책을 ‘읽었다’는 만족을 넘어서, 책을 ‘이해했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처음에는 노트 한 면에 빼곡히 필사를 했다. 하지만 반복해서 읽고, 정리하고, 테스트해 보기에 불편했다. 그래서 내 나름의 방식을 만들었다. 노트를 반으로 접어 왼쪽에는 필사를 하고, 오른쪽은 여백으로 남겨둔다. 필사를 마친 뒤에는 오른쪽에 모르는 어휘, 번역이 어려웠던 문장, 표현하고 싶은 말, 그리고 책을 읽으며 떠오른 질문들을 메모한다.








뒷면은 공란으로 남겨둔다. 여긴 필사하면서 찾아본 문화적 배경, 역사적 맥락, 음식이나 사회적 의미가 있는 표현 등을 적는다. 이 페이지는 단지 정보를 쌓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내가 진짜 궁금했던 것을 모아두는 보물창고 같은 공간이다.



책을 여러 번 읽는다고 해서 모든 문장을 외울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고, 모르는 것을 집중해서 다시 보면 기억은 훨씬 오래간다. 이것이 바로 ‘메타인지’다. 필사는 이 메타인지를 높이기에 딱 좋은 방법이다.


책을 처음 읽을 땐 재미와 흐름에 집중하고, 필사를 할 땐 모르는 것에 집중한다. 모르는 표현엔 표시를 하고, 의미를 찾아보고, 짧게 메모를 남긴다. 이렇게 정리된 필사 노트를 다시 펼쳐보면, 다시 읽는 데 시간이 훨씬 단축되고, 반복의 효율도 높아진다. 단순히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노트에 손으로 쓰는 필사만을 고집했다. 하지만 손목이 아프고 속도가 너무 느려지면서 책을 완독 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디지털 필사를 시도했다. 타자를 이용한 필사는 팔의 부담을 줄이고, 훨씬 많은 문장을 빠르게 다룰 수 있다. 또한 중국어는 한자라는 특성상 정확한 음을 알아야 입력이 가능하기 때문에, 필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낭독과 단어 확인, 암기까지 이루어진다.




디지털 필사는 특히 ‘문장 암기’에 탁월하다. 키보드를 치는 동안 그 소리와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문장이 뇌에 각인된다. 음을 모르면 입력이 되지 않기 때문에 무조건 소리를 떠올려야 하고, 그 과정에서 억지로라도 한 번 더 복습이 이뤄진다.


처음부터 책 한 권 전체를 필사하겠다고 달려들면 지친다. 포기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처음 필사를 시작할 때 에세이나 자기 계발서처럼 문장이 짧고 쉬운 책을 골라서, 한두 문장만이라도 옮겨 적는 연습부터 했다. 그렇게 습관을 들이고 나면 어느새 내가 적고 싶은 문장을 찾고, 외우고,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부분 필사에도 기준은 있다. 단순히 예쁜 말이 아니라, 나와 관련 있는 말, 인용하고 싶은 말, 표현이 매력적인 문장 등 내 마음을 움직이는 문장을 선별해 적는다. 그런 문장들은 다시 봐도 감동이고, 반복해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 감동이 공부의 동력이 된다.



중국어 원서 읽기가 두려운 사람에게 나는 말한다. “읽기만 해도 충분해요. 하지만 정말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손을 한번 움직여보세요.” 필사는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지만, 단 하나의 문장이라도 내 것이 되는 경험을 한다면 절대 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전체 필사를 시도하고, 또 어떤 때는 부분 필사만 하더라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읽은 책에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눈으로 스친 문장을 마음에 남기기 위해 손으로 눌러 담는 것, 그것이 내가 원서를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을 통해 책과 내가 더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작가의 문장을 읽고, 손으로 옮기고, 생각을 더하고, 때로는 문장을 바꾸어보며 나의 언어로 다시 써보는 그 모든 순간들이 내 안에 쌓여간다. 한 권의 책이 내 것이 되는 경험. 그건 정말 짜릿하다.



완벽할 필요도 없고, 모든 문장을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한 문장, 한 단어, 한 페이지씩 차근차근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당신도 책 한 권을 온전히 소화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건 단순히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통해 나를 다시 읽는 일이다. 필사는 그 여정을 더욱 깊고 선명하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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