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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꼬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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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칩코 Apr 15. 2019

춤추는 나무


2019년 4월 13일 아침.


머리를 밀 땐 홀딱 벗는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목욕 전 머리를 민다. 꼬리의 숏컷이 무거워졌다. 윗머리만 남기고 아랫머리는 밀어주기로 했다. 우린 팬티만 걸친 채 욕실 거울 앞에 나란히 섰다. 비슷한 높이의 어깨, 작고 뾰족한 가슴, 말랑한 배, 하얀색 팬티. 우린 너무 닮았잖아! 마주볼 때는 몰랐는데, 거울 속의 우리를 함께 보니 정말 닮았다. 꼬리가 세워둔 카메라가 돌아가고, 꼬리의 뒷머리부터 밀어주었다. 바리깡의 얕은 진동과 함께, 새끼손가락 길이의 머리칼들이 내 손등과 꼬리의 뒷목 위로 가볍게 떨어졌다. 나는 어쩐지 배와 입술에 힘을 주고 있었다. 살짝 까치발을 선 발끝도 아슬아슬했다. 몸을 조금 돌리려고 꼬리의 어깨를 만질 때마다, 꼬리의 따뜻한 체온이 내 찬 손끝을 자꾸 놀래기도 했다. 맨발에 닿던 서늘한 욕실타일 위로 머리카락이 낙엽처럼 폭신하게 밟혔다. 머리를 미는 내내 카메라와 고양이가 우릴 빤히 바라봤다. 카메라 속 나는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빙글빙글 움직여가며 머리를 밀고, 꼬리는 함께 빙글빙글 몸을 돌렸다. 하얀 팬티를 입은 자작나무 두 그루가 빙글빙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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