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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꼬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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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칩코 May 20. 2019

진실의 무게

2019년 5월 11일 자정.


나는 갈색 눈을 가졌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은 내 눈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지난 날 “눈이 갈색이구나”라고 말해주었던 이들은, 꼬리가 내게 일찍이 그랬던 것처럼, 내 눈을 깊이 마주한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음을 알았다. S는 포옹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누구와도 빨리 친해질 수 있는 유쾌함과 장난기를 가진 사람. S는 내 눈이 갈색인 걸 바로 알아챈 사람이기도 했다. S와 처음 단둘이 있던 날, 그가 내 눈을 바라보는 걸 느끼면서 나는 이대로 입을 맞출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S는 먼저 내게 키스했다. 난 S의 도톰한 입술 감촉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꼬리의 입술이 아니었으니까. 내게 익숙한, 동그랗고 조그만 입술이 자꾸 떠올랐다.


난 무서워졌다. 난 꼬리가 누군가와 입맞추는 걸 견딜 자신이 아직 없었다. 꼬리도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우리는 폴리아모리가 되기로 약속했다. 그게 우리 사이를 더 진실되고 영원하게, 또 우리 각자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믿음과는 별개로 우린 여전히 단단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저 우리 사이의 출렁이는 감정들을 직시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기로 약속했을 뿐이었다. 난 꼬리 생각으로 키스를 잘 하지 못했고, S는 웃으며 그게 느껴졌다고 했다. 난 S에게 솔직했다. 그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꼬리에게도 솔직해야했다. 하필 각자의 일정으로 바쁜 날이었다. 꼬리의 얼굴은 자정에야 볼 수 있었다. 꼬리와 낮에 연락을 하는 내내 꼬리에게 솔직할 수 없는 상황이 낯설어 조바심이 났다. 그래도 내 감정은 어떤 것이었는지, 어떻게 말을 시작하면 좋을지 하루종일 고민할 수 있었다. 


자정에 침대에 걸터앉아서 말했다. 나는 지나치게 엄숙한 표정을 지어버렸다. 할 말이 있다고 하는 목소리도 형편없이 떨렸다. 꼬리는 순식간에 동요했다. 꼬리의 눈동자에 초조함이 빠르게 차올랐고, 떨리는 목소리로 무슨 일이냐고 여러번 재촉했다. 나는 꼬리가 무슨 말을 떠올렸는지, 어떤 무서운 상상을 해버렸는지 알았다. 아, 그런 게 아닌데. 나는 절대 너한테 그런 말을 하지 않아. 우리 헤어짐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무서워서 몸서리가 쳐지는데. 나는 찬찬히 낮에 정리했던 대로 말했다. 나는 S를 좋아하고 키스를 했다고 했다. 앞으로도 S와는 만날 적마다 그렇게 서로 좋아하는 사이로 남을 것 같다는 말. 그러나 난 S와 자주 만나는 사이가 아니었다. 꼬리를 변함없는 크기로 사랑하고, 꼬리를 사랑할 시간을 다른 곳에 쓸 수 없어서 내 삶의 대부분을 꼬리와 함께 보내고 싶다는 말. 


꼬리는 날 안아줬다. 자신이 겁내던 말보다 무섭지 않다고 안도했다. 난 조금 전 꼬리의 눈을 보고 무너져내릴 것 같던 내 감정을 떠올렸다. 꼬리가 내게 헤어짐을 말할 거라고 상상한다면, 꿈이 아니고 꼬리가 하루를 마치고 돌아와서 매일 앉는 침대에 앉아서 내게 그런 말을 할 것 같다면. 이마가 뜨거워지는 긴장. 꼬리가 입을 열고 말을 모두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이 내게 너무 아찔하고 잔인할 것 같았다. 꼬리가 방금 그런 감정을 느꼈으리라고 생각하니 난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내가 요란하게 울어서 그랬는지 꼬리는 침착해져 있었다. 내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안다고 했다. 그렇지만 정말 괜찮지만은 않다고 어렵게 솔직함을 뱉었다. 꼭 도를 닦는 기분이라며 울면서 웃으면서 말했다. 


이후 난 자주 울었다. 꼬리의 고통을 가늠할 때마다, 죄책감이 밀려올 때마다, 꼬리가 내게 실망하고 날 싫어하게 될까 두려울 때마다 울었고, 꼬리가 오히려 힘든 것을 마음껏 토로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아챌 때마다 울음을 참았다. 꼬리는 내가 힘들어 보인다고 했다. 난 힘들었다. S와의 대화, S의 표정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S에게 느낀 감정이 한없이 사사로워져서, 어처구니 없게도 S를 원망하는 마음이 조금씩 자라남을 느꼈다. S는 그날 이후 종종 연락을 해왔다. 나를 사랑해주는 S의 눈부신 마음에 비해 내 감정이 너무 추해서 고통스러웠다. S와 입을 맞췄을 뿐인데, 이렇게 작은 사건이 이렇게 큰 고통을 주다니. 난 분명 S에게도, 꼬리에게도 솔직하려 애썼다. 솔직함을 택한 대신 너무 큰 것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진실은 원래 이렇게 불공평한가? 많은 것들을 후회했다가, 후회하지 않았다가를 반복했다.


이후 꼬리와 질투심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난 고해성사를 하듯이, 철없이 투정부리듯이 내 질투들을 고백했다. 꼬리에게도 그래주기를 부탁했다. 분명 질투심은 자신과의 싸움같았다. 감정과 마주하고, 타자에게 전가하지 않고 오롯이 그 무게를 자신이 끌어안는 것. 끝내 나 자신을 더 깊이 사랑하고, 상대를 더 행복하게 해주는 것. 그러나 우리가 각자 스스로를 위해 고민할 때 함께 있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난 여전히 꼬리를 염려하느라 마음껏 S와 눈을 맞추지 못하지만, 그날과 변함없는 S의 명랑한 모습을 사랑했다. 사랑이 늘 넘치는 S를 미워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꼬리의 성숙한 고민의 흔적들, 조심스레 고백하는 질투심과 불안들을 무섭도록 사랑했다. 그리고 꼬리도 내게 똑같은 사랑과 믿음을 주고 있음을 하루하루 더 선명하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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