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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칩코 Aug 18. 2022

놀기만을 위한 놀이

<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나는 놀 줄 모른다. 잘 못 논다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그다지 재밌는 사람으로 날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놀기만을 위한 놀이'는 특히 못 한다. 어떤 날을 기념하거나, 아주 오랜만인 누군가를 환영한다거나, 어떤 도움이나 배움을 주는 자리라면 몰라도. 그냥 놀기 자체가 목적이라니! 내가 제일 난감해하는 부류가 보드게임이다. 어떤 의미를 찾을 수도 없이 그냥 놀기가 아닌가. 이건 내 상상 밖의 영역이다. 보드게임을 대체 왜 하는지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전에 한번 새벽 1시가 되도록 뱅뱅뱅을 한 것은 내 아침형 인간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다.


산내 친구들은 좀 달랐다. 놀기 위해 노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엔 그게 좀 당황스러웠다. 아무 날도 아닌데 갑자기 집에 오거나 놀자고 불러내었다. 산내는 작은 시골 마을이니 도서관에 가든, 장 보러 가든 누굴 꼭 마주치곤 한다. 그럼 인사만 하고 지나치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 수다를 떨거나 더 본격적으로 놀기 위해 누군가의 집으로 향했다. 별의별 이유로 놀고, 아무 이유 없이도 놀았다. 같이 계곡을 별안간 가자는데... 나에게 계곡은 일주일 전부터 계획할 하나의 일정이라 아주 엄청나게 더운 날이 아니면 번개 계곡(?)을 가는 일은 없었다. 산내 친구들은 집 앞마당 놀러 가듯이 갔지만.


난 어릴 적부터 이사를 해마다 다녔다. 임대로 전전했던 까닭이었는데, 나는 '동네 친구'랄 게 도저히 생길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동네에서 놀던 사이'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동네에서 누구와 놀아본 적이 없었다. 학교 친구들은 학교에서만 놀고, 학교 밖에서 따로 시간을 내어서 놀 필요성은 굳이 느끼지 못했다. 전에 말했듯 나는 집에 또래 친언니가 있어서 집에서도 심심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게 바로 동네 친구라는 건가?' 싶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면 바로 만날 수밖에 없는 친구. 마주치면 아파트 이웃 만나듯이 인사만 꾸벅하고 지나가기에는 너무 친해진 사이. 산내 사는 또래 친구들을 동네에서 만나면 물론 반가웠다. 그 반가움이 시간을 내어 더 놀자는 제안으로 이어지는 전개가 어색했을 뿐이었다.


나는 점차 이 갑작스러운 놀이 제안에 익숙해졌다. 이건 시골이 아니면 누리기 어려운 문화였다. 가령 친구들이 노는 가장 빈번한 이유는 '채소가 많아서!'였다. 레파토리는 이렇다. 토마토를 많이 나눔 받았으니 토마토 없는 집은 가져가라고 누군가 제안한다. 그럼 토마토를 가지러 어쨌거나 만나야 한다. 만나는 김에 토마토 파티를 하게 되는 식이다. 토마토수프, 토마토 비빔국수, 토마토 마리네이드 등등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마구 나열한 뒤 날짜를 잡아버린다. 당근 파티, 가지 파티, 호박 파티 등 어떤 채소의 수확 철만 되면 잔치하기 딱 좋은 핑곗거리가 된다. '번개 계곡'도 그렇다. 아무 날도 아닌데도, 아무 사전 약속이 없는데도 계곡에 홀 홀 놀러 갈 수 있는 것은 산골짜기 사람들만의 특급혜택이었다.


역시 나 같은 내향형 인간은 자주 놀다 보면 피곤하기도 했다. 그러나 피곤함이 한층 가시고 돌이켜 보면, 그냥 놀기 위한 놀이는 기억에 많이 남았다. 말 그대로 논 기억만 남아서 좋았다. 요즘은 산내를 떠나 구례에서 혼자 지내는데, 한가하고 고요하게 흐르는 날이 훨씬 많다. '이게 나한테 맞아' 싶다가도 산내의 그 들뜬 분위기가 그립기도 하다. 놀고, 놀고, 또 놀고! 지겹게 놀던 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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