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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칩코 Oct 05. 2022

밥 짓는 시간을 아껴서 무엇하리

<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전깃불을 안 켜기로 했다. 성냥과 양초를 중고로 구매했다. 필요한 물품은 다 중고 사이트를 뒤진다. 아무리 친환경적으로 생산하는 물건이라 한들 새로 공장에서 찍어낸다면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성냥 켜기도 익숙지 않아서 엄지손가락을 홀랑 태워 먹었는데, 이젠 요령이 생겼다. 새벽과 밤에 촛불로 방을 밝혔고 장마철 눅눅할 때도 촛불을 여러 개 켜서 습기를 없앴다. 촛불은 예쁘기도 예쁘다. 가끔은 촛불만 바라보면서 명상도 하고, 은은한 온기가 있어 겨울에는 손을 가까이 대고 있는다.


전깃불을 켜지 않으면 여러모로 자연스럽게 살게 된다. 촛불은 밝기가 충분하지 않아 여러 활동하기에 어둡다. 그 덕에 해가 지면 그냥 빨리 잠을 잔다. 태양이 허락하는 동안에만 활동한다. 촛불 생활 이후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고 저녁 9시면 취침하는 루틴이 생겼다. 나중에야 안 사실인데, 시골의 올빼미족은 밤에 전깃불로 곤충이 날아들어서 골머리를 앓는다고 했다. 날벌레는 대개 전깃불이 달인 줄 알고 달려들었다가 죽고 만다. 촛불은 그렇게 밝지도 않아 날벌레를 죽이지 않고, 나도 벌레로 소란스럽지 않아서 좋다. 시골의 노인들이 왜 해만 지면 잠자리에 드시는지 이해가 된다. 나중에는 촛불만 아니라 태양광 충전 라이트를 중고로 구매했다. 이걸로는 핸드폰 충전도 가능했다.


냉장고, 밥솥, 전기포트 등의 전기용품도 집을 떠났다. 세탁기는 이불 빨래용으로 가끔 사용하지만, 이불 외의 빨래는 손으로 한다. 여름에도 에어컨과 선풍기를 쓰지 않는다. 핸드폰은 태양광으로 충전하니, 아마 내가 쓰는 전기는 노트북 충전이 유일하다. 이렇게 생활하기 시작한 첫 달 차엔 전기 고지서를 손꼽아 기다렸다. 전기 요금이 얼마나 적게 나올까 기대했는데 웬걸 고지서가 오지 않았다. 다음 달에 확인하니 요금이 너무 적어 두 달 치를 한 번에 요청하겠다는 메시지가 있었다. 요금은 평균 1,200원 정도다. 한전 기본료가 900원이니 아마 실제 사용한 요금은 300원으로 추정된다. 마음이 이렇게 흐뭇할 수가. '다음 달은 더 줄여봐야지!' 하는 오기가 생긴다!


장작불을 사용하니 가스를 살 필요도 없다. 온수를 사용하지 않으니 기름보일러도 텅 비었다. 또 이전에 말했듯 장을 거의 보지 않는다. 생필품도 살 일이 없다. 베이킹소다는 세제용으로 필요한데, 이건 한 번 사면 일 년은 넘게 사용하니 부담이 없다. 이런 생활을 하면 돈 나갈 일이 적어진다. 내가 아낀 돈으로는 길고양이 사료를 사거나(사료는 공장식 축산의 산물이라 더욱 중고로 산다) 주위 비영리단체에 기부한다. 돈을 많이 벌 필요가 없는 일상은 자급에 한 발짝 다가간다는 의미였다.


이런 방식대로 사는 건 쉽지 않다. 매일 아침 2시간은 집안일에 든다. 일단 밥을 짓는 시간만도 1시간은 기본이다. 가스 레버만 돌리고 냄비만 올려도 끝날 일을, 나는 장작을 줍고, 부싯돌로 불을 피우고, 장작으로 불을 피우고, 조리하는 내내 불에 부채질한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불 피우기만 한 시간이 훌쩍 간다. 숯검정 묻은 냄비는 설거지할 때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아니면 옷가지마다 검댕이 묻은 꼴을 피할 수 없다. 설거지할 때는 그릇 몇 개를 씻다 말고 하수받이 물통을 두세 차례 마당에 붓고 오니 시간이 배는 걸린다. '오늘은 그냥 외식할까...' 하는 유혹이 들면 이렇게 되묻는다. 밥 짓는 시간을 아껴서 무엇하리!


밥 짓는 일은 원래 오래 걸려야 맞다. 가스 불의 편리함은 내가 볼 수 없는 어느 먼 곳의 산이 파헤쳐지고 그걸 바다 너머로 옮기고 석탄 발전소에서 가공했기에 가능하다. 가스 불 한 번을 사용하는 동안 돌이킬 수 없는 무수한 생명이 착취당해야 그 편리함을 누릴 수 있다. 그 시간을 아껴서 유튜브를 보느니 한나절이 걸려도 불편하게 밥을 짓는 편이 낫다. 또 이는 내 마음이 마구 바빠질 때 방지턱이 된다. 할 일이 많으면 매일 집안일에 쓰는 2시간마저 아깝게 느껴진다. '내가 생태적으로 살아보자고 내려왔는데, 바빠서 그렇게 살지 못하면 무엇하나!'하고 나를 다그친다. 생태적인 삶은 시간이 많이 들지만, 그만큼 돈 버는 일을 덜 해도 되니 시간을 벌기도 한다.


생태적인 삶은 강인한 체력과 정신이 모두 필요하다. 조금만 나태해져도 다 귀찮아서 외식을 찾게 되거나 집이 엉망이 된다(도시에 살았다면 배달 음식을 찾았을 테다.) 게으름과 탐욕을 매일 청소하는 마음으로 한다. 무엇하나 내게 당연하게 주어지지 않듯이, 삶의 의례를 후딱 해치우지 않고 소중하게 해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식사도 설거지도, 생태 화장실도 손빨래도 모두 일종의 기도다. 내 삶을 지탱하는 존재들의 선물을 하루에도 수차례씩 떠올린다. 깨끗한 물과 공기와 새소리와 햇빛 같은 존재들을. 일과의 피곤함은 가라앉고 되갚을 수 없는 감사함만이 가득 차오른다. 그럼 내일도 약속한 듯이, 그들의 선물이 찾아온다.


모두가 이런 생활을 하자고 외치는 건 아니다. 나 역시 몸에 장애가 없고 아직 젊으니 가능한 것일 테다. 사지가 멀쩡해도 마음의 장애가 있어서 실천하기 어려울 수 있다. 나는 남들은 귀찮아할 법한 일을 내가 곧잘 하는 게, 내 특별한 재능이나 의무처럼도 여긴다. 누군가는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일이니까, 나 같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 몫만큼 더 실천한다고 친다. 처음에는 이런 실천을 해내면서 오만함을 느꼈다. 무슨 섀도 복싱하듯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경쟁한다. "이것 봐, 나는 이렇게나 에너지를 아낀다고!" 하는 자만심이 커지고 누군가의 인정을 받고 싶어진다. 이건 사실 우습다. 사람마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지구에 감사함을 표현하고 산다. 내 실천을 글로 남기는 건 생태적인 삶을 실천하고 싶은 누군가에게 도움주기를 위해서이지, 자랑은 아니다.


누군가 양치할 때 물을 콸콸 틀어둔다면 마음이 아프지만, 속으로는 이렇게도 생각한다. 저건 지구가 그에게 허락했을 거라고. 나 역시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지금보다 더 낭비적인 생활을 해왔지만, 지구가 다 인내해준 덕에 그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사람을 지구와 연결하기 위해 지구는 천 번, 만 번을 가르친다. 부모가 아이를 천 번, 만 번 가르쳐야 하듯이. 그 과정을 내가 도울 순 있겠지만, 내가 어떤 사람을 비난한다면, 지구가 주제 넘는다고 일침을 가하지 않을까. 일단 나부터 정화하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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