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으면 질경이를 따라가>
만물에 존대할 때 아리송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존대해야 하는 지가 문제였다. 동물과 곤충과 식물에 존대하는 건 비교적 자연스럽다. 계곡과 바람과 둘에도 꽤 어색하지 않게 인사했다. ‘그런데 바람에 인사하면 결국 공기에도 인사해야 하지 않나… 아니, 그럼 세상 만물에 공기가 깃들지 않은 곳이 어디 있지…’하는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결국 사물마저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존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로!
혼자 살 집을 구했을 때 내가 처음 한 일은 집과 친해지기였다. 분명 인간은 나 말고는 살지 않았지만, 인간 외의 존재들은 집주인과 계약하지 않고도 이미 살고 있을 것 같았다. 하물며 나는 인간 집주인에게만 허락은 받은 신세가 아닌가. 비인간 집주들에 허락을 미처 받지 않고 들어온 세입자였다. 집안의 모퉁이마다, 문지방마다 매일 정성껏 기도했다. 옆집에 떡을 돌리는 심정으로, 원주민 정령들에게 ‘잘 부탁드립니다’하고 인사했다. 내가 아늑하고 편안하게 잠드는 까닭은 원주민 정령들이 이 집을 잘 수호해왔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촛불 생활 경험을 말할 때 하나 빼먹은 말이 있다. 내가 생각보다 어둠을 무서워한다는 것. 난 원래 귀신도 그다지 무섭지 않다. 물론 공포영화는 무서워서 안 보지만… 일상에서 귀신에 대한 상상력은 크지 않다. 그런데 칠흑 속에서는 상상력이 무궁무진해지는 뜻밖의 재능을 발견했다. 물건들이 소리를 낸다! 꼭 귀신을 안 믿는 사람이더라도, 물건에서 간혹 나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있을 것이다. 바람 때문이든, 어디 가구 모서리가 낡아서 삐걱거리는 소리든 물건은 작은 소란을 일으킨다. 혼자 불 끄고 있으니 그런 소리가 무진장 잘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양초도 아끼겠다고 새벽 명상과 요가 때는 촛불도 켜지 않았는데, 도무지 무서워서 집중이 안 되었다. 희한하게 촛불 하나라도 켜면, 고작 작은 불빛인데도 확실히 위안이 되었다.
이렇게 호되게 물건 정령의 강렬한 존재감을 깨달은 후... 그렇다. 벽과 물건과도 대화하기에 이르렀다. 무당이나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과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이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나는 비건 퀴어 페미니스트 무당 ‘홍칼리’님의 유튜브를 즐겨 보는데, 그분은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를 살펴보려면, 평소에 자신이 물건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지켜보라’고 하신다. 문을 쾅쾅 닫고, 핸드폰을 휙 집어 던지고, 신발을 내팽개쳐둔다면 내 마음이 편안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나 역시 설거지하거나, 문을 닫는 순간에도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차리지 않으면, 금세 사물을 함부로 대하거나 깨버리는 등의 실수를 한다. 내 주위 온갖 정령들에게 실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신하게 행동한다.
또 혼자 살면서 친해진 존재가 있다. 바로 벌레들! 시골집에는 온갖 벌레가 다 있다. 물론 도시와는 사이즈부터 남다르다. 대부분은 나보다 오래 산 원주민들이다. 이웃을 만나듯이 눈인사하긴 하지만 악수까지는 못 한다. 이 벌레들이 이토록 예의 있는 줄 몰랐다. 벌레는 보통 밤에 생활한다. 나는 9시면 잠이 드니까 나와 바통터치를 하고 이 집안을 공유하는 동거자라고 보면 된다. 간혹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보면 그들과 정면으로 마주칠 때가 있다. 대부분 벌레는 놀라울 만큼 조심스럽고 친절하게 자리를 비켜준다. 내가 먼저 그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나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다. 바퀴벌레, 꼽등이, 거미, 개미, 모기, 귀뚜라미, 콩 벌레, 그리마, 민달팽이… 모두가 벌레는 아니지만 대충 내 작은 동거자로 통칭해보자면 이들과는 대개 친해졌다. 서로의 성격을 잘 이해했달까.
그런데 딱 한 분. 바로 지네만큼은 여전히 내 두려움의 대상이다. 시골에 오래 산 사람치고 지네에 물려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내가 본 모든 시골집에는 지네가 있었다. 심지어 지네는 인간과 서식지 취향이 통하는 구석이 있다. 푹신하고 아늑한 곳을 좋아한다. 지네는 꼭 인간의 이불 속에 있다가 인간에게 돌연 공격당해서 후다닥 놀라며 공격을 되갚아준다. 난 아직 지네에 물려보진 않았지만, 매일 두려움에 떨며 잠을 자다가 지금은 모기장을 사계절 내내 쳐두고 잔다. 한 번은 집에서 무지막지하게 통통한 지네를 만났는데, 새끼 뱀과 별로 다르지 않은 크기였다. 집안에서 그를 독대했을 때 그 존재감이란… 금방이라도 손을 들어서 내게 인사할 것 같은 굵기의 팔다리… 그렇게 큰 분이 어디 숨어 계시다가 나타나셨는지는 몰라도, 지금까지라도 마주치지 않았던 것에 새삼 감사를 드렸다. 또다시 마주치지 않으면 좋겠다.
물건 정령과 벌레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침묵에 가까운 존재다. 아마 내가 들레네와 살 때 이들을 잘 느끼지 못했던 것은 사람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동물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그보다 조용하고 작은 존재들은 늘 곁에 있으면서도 있는 줄 몰랐다. 혼자 살고 보니 새삼 이들과 내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침묵으로써 깨닫는다.
예전에는 소란이 ‘차 있는’ 상태라면, 침묵이 ‘비어있는’ 상태인 줄 알았다. 지금은 다르다. 침묵은 침묵 그 자체로 존재하는 상태이다. 홀로 방 안에 있을 때 ‘고요’라는 하나의 상태가 나와 함께 머문다. 결국 소란도 침묵도 ‘차 있는’ 상태이다. 성격이 다른 동거자일 뿐이다. 둘 다 내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침묵은 더 귀하게 느껴진다. 내 작은 방을 떠나면, 바깥에서 침묵이라는 존재는 좀체 만나보기 어렵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