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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꼬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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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칩코 Nov 19. 2022

입동제



꼬리와 입동제를 했다. 겨울은 한 해의 끝이 아닌 시작이다. 겨울부터 씨앗이 봄을 준비하기 때문이란다. 입동제를 잘 지내야 다음 해를 잘 맞이할 수 있다고 했다. 제사상에 올릴 것들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나는 아침 안개를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신은 아침 안개의 얼굴을 했다는 릴케의 시 구절이, 신비로운 아침 산책마다 떠올랐던 까닭이다.


아침 산책길은 좁은 오솔길이라 나란히 걸을 수 없다. 뒤따라오는 꼬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안개를 담은 것을 주웠다. 솔방울, 낙엽, 꽃, 나뭇가지 등을. 산에서 작은 신들을 모셔가는 대신으로 우린 직접 가을볕에 말린 곶감을 선물했다. 산책 중에 굵직한 소나무를 꼬리와 함께 두 팔로 끌어안아도 보았다.


집에 와서 제사상을 장식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음과 또 한 해를 준비하는 마음을 종이에 적어 올렸다. 같이 요가명상도 하고 노래도 지어불렀다. 끝이 유야무야되긴 했지만... 꼬리가 겨우 시간을 내어 지리산에 하루 온 날이라, 오후 데이트 일정이 빼곡해 어쩔 수 없었다.


꼬리가 떠나고도 한동안 제사상을 그대로 두었다. 제사상의 솔방울을 빤히 다. 예쁜 단면이 보이도록 올려두니 감쪽같다. 꽤 큼직한 솔방울이 있길래 주웠는데 알고보니 뒷면이 삭아 온전치 못했다. 다시 내려놓으려던 차에 꼬리가 그래도 좋으니 데려가자고 했던 것이다. 나는 망설인 티를 내지 않으려고 냉큼 바구니에 넣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솔방울이 꼭 나 같다. 어느 한 구석이리 모난 걸 알면서도 꼬리는 내 곁에 있다. 그리고 모난 구석이라곤 없는 것처럼 예쁜 면을 바라보고 예뻐해준다. 나는 꼬리에게, 삭은 뒷면을 본 순간에도 망설이지 않는 법을 배운다. 솔방울은 제사상에서 제법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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