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 줍는 아이들》《자기 앞의 생》
Whatever you left behind, life goes on...
Hello 필화 님.
저도 하루쯤 더 쉬었다가 답장을 쓸까 했으나 달력을 보니 지금 제가, + 우리가 그리 호기롭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색하고 자리를 고쳐 앉고 다시 컴퓨터를 켭니다. 그러고 보니 20대 때의 슬로건이 새삼 떠오르는군요. 휴식은, 나중에 죽고 나서 많이 많이. 밀린 잠도 그때 가서 몰아 자기. ㅋㅋㅋ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네… 이러니까 다들 나랑 일하기를 싫어한 거야…
편지를 읽다가(그런데, 우리가 처음엔 분명 ‘메일’이라고 정확히 불렀는데, 어느새인가 레터, 혹은 편지로 바꿔 부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덕분에 메일이라는 이름에 붙어 있던 사무적인 느낌이 훨씬 덜한 것 같아요. 우리가 업무 메일이라고 하지 업무 편지라고는 하지 않잖아요… 하핫)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요.
세상의 많고 많은 이야기들이, 현실의 어떤 측면을 비춰주거나 혹은 잠시 현실에서 도피하고픈 소망, 혹은 욕구를 채워주고 있는 것으로 양분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어떤 분들은 전자가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보실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후자야말로 그 역할에 의미가 있다고 하실 것 같습니다. 저요? 저는 두 쪽에 다 손을 듭니다. 왜냐면 저는 박쥐니까요… 아시잖아요…
정말 좋은 책은 그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성취하고 있죠. 놀라운 작품성과 그 세계 안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입력. 아득히 멀리 보이는 환하게 반짝이는 별을 동경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책장 앞을 기웃거리고 왔습니다만 아직 딱 이거다 싶은 책이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일단은 쓰기 시작했습니다. 몇 문단을 쓰다 보면 분명히 떠오르는 책이 있을 거라는 걸, 이젠 경험으로 알아요. 야, 나 벌써 세 문단째 쓰고 있는데 왜 안 오니, 영감님. 미스터 인스퍼레이션, 제발 좀 와 줘. 나 시간 없단 말야. ㅠ.ㅠ
갑자기 저를 픽션의 세계에 깊이 발 담그게 했던 과거의 독서기록이 포트폴리오처럼 펼쳐지는 기분이네요. 그러니까, 그림책 같은 건 다 뛰어 넘고, 아주 예전에 몇 라운드에서였나 잠깐 언급했던 모험 이야기 등등도 건너뛰고 중학교에 입학해서였나, 문제작이라 할 만한 V.C.앤드류스에 입문하여 눈이 화등잔만해졌던 기억이… 저는 이게 우리나라에서만 그렇게 메가히트를 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즐겨 듣는 팟캐스트 중에 <What Should I Read Next>라는, 엄청나게 재미있는 방송이 있는데 거기에 제 또래의 게스트가 출연했던 어느 회차를 듣다가 저는 진짜 그때 너무 웃느라고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어요…
호스트가, 지금까지 독자이력을 간단히 소개해 달라는 말에 그분이 문제의 그 작품을 언급하면서 그 시기의 틴에이저들 중에 과연 이 작품을 한 번쯤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완전히 탐식을 해서, 블라블라블라… 이런 얘기를 했단 말이죠. 그 시점부터 저는 이미 ‘맞아요! 바다 건너 이쪽에서도 난리도 아니었어욧!’을 외치고 있었는데, 진짜 박장대소는 그 다음 대화였습니다. 호스트가 ‘오오, 맞아요. 그런데 혹 지금 자녀가 그 책을 읽겠다고 하면 그러라고 하실 건가요?’ 라고 묻자, 게스트가 갑자기 막 웃더니 진지하게 이러는 겁니다. “아뇨, 절대로. 당연히 안 되죠.”
ㅋㅋㅋㅋㅋㅋ 그렇죠… 우리는 이렇게 어른이 되었던 겁니다…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훌륭한(???) 꼰대에게도 어른들 눈치를 보며 불량한 책들을 읽던 시절이 있었건만, 그랬건만… (그런데 이 순간 드디어 적절한 책이 생각났습니다. 오늘은 부팅이 좀 오래 걸렸네, 뇌에 기름칠 좀 해야 하나)
네. 그러니까 그 책 얘기는 그만하고, 다소 조숙했던 어린 시절 제가 몇 번이고 거듭해 읽었던 책들 중에서, 지금껏 제가 갖고 있는 책을 꺼내오도록 할게요. 돌이켜 보니 중학생 때였는데, 아주 어린 것은 또 아니네요.
《조개 줍는 아이들》이라는 제목의 소설입니다.
《조개 줍는 아이들》
이 책이 국내에서 아주 잘 팔린 책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이 책을 미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낼 때 읽었거든요. 저희 어머니는 소설을 잘 읽지 않으시는데, 당시 어머니와 친하게 지내시던 친구분이(당시 연세가 지금의 저보다 어렸군요… 새삼 충격이다) 이 책을 가지고 오셔서는 열심히 권하셨어요. 당신께서 너무나 감동적으로 읽으신 책이라고, 여주인공이 참으로 불쌍해서 많이 우시면서 읽으셨다고.
아는 사람만 알지만 저희 어머니는 허구의 인물에게 이입을 전혀 하지 못하시는 냉철한 현실주의자십니다(그런 분 밑에서 저 같은 실존은 하지만 어떻게 봐도 허무맹랑한 NPC같은 인간이 출생했다는 게 세상의 신비입니다. 아, 참고로 제 동생은 프로게이머 출신입니다 ㅋㅋㅋ). 저는 그분이 귀가하신 뒤로 그 책을 조용히 제 방으로 날랐습니다. 어차피 구석에 밀쳐질 걸 알았으니까요.
한창 감수성 예민하던 사춘기 소녀는 그야말로 폭풍오열을 하며 그 소설을 읽었죠. 왜 아니겠어요. 도대체 이 작가는 여주인공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렇게 고난투성이의 삶을 선물한 것인가. 아니 저주를 한 것인가. 제가 늘 강조하지만 등장인물에게 강하게 이입한 독자는 객관적이며 전지한 평론가적 포지션에 앉을 수 없습니다. 작가 나빠, 빌런 자식 나빠, 무한히 계속되는 이 비난의 굴레 속에서 목메어 우는 소리는 정도를 더해가고…
비판적으로 보자면 이 소설은 흔하디 흔한 그저 그런 통속소설입니다. 그런데요, 16세 여학생은 여기서 놀라운 삶의 진리(제게는 진리였어요) 하나를 터득하고 본인 인생의 금과옥조로 삼게 됩니다. 그게 무엇이냐고요?
이런 것이죠.
인생이란 원래 부침의 연속이다. 삶은 어떤 좌절의 순간에조차 버텨나가야 하고, 그러다 보면 또 버틸만한 것이 된다.
놀랍지 않은가요? 저는 성인이 된 지 꽤 지난 후에도 이 낡은 책을 몇 차례 씩 거듭해 읽곤 했는데 그 감상이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답니다.
주인공인 페넬로피(원작에는 다른 발음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원래 발음으로 쓰겠습니다) 킬링은 저명한 화가의 딸입니다. 어머니는 자유분방한 프랑스인이었고, 부모님은 부부라기보다는 부녀간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정도로 나이 차가 났죠. 그러니 당연히 ‘평균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개성을 갖고 자라납니다. 성인의 초입에서, 2차 대전이 발발하고, 페넬로피는 즉흥적으로 군에 입대합니다. 그곳에서 남편인 킬링 중위를 만나 결혼하지만, 이것은 그녀 인생 최대의 실수였죠. 그럼에도 그녀는 어떻게든 누더기가 된 삶을 기워 이어나갑니다. 그러다 페넬로피는 일생일대의 사랑이라고 할 만한 남자를 만나게 되지만, 전쟁은 그녀에게서 그마저도 빼앗아 갑니다. 이제 우리의 여주인공은 무엇에 기대어 살아갈까요?
나쁜 시절을 기억하는 것도 괜찮아.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거니까
여기까지만 보면 흔하디 흔한 전개라고 할 만합니다. 사실 그 뒤의 이야기도 그렇게까지 특출난 부분은 없이 예측가능한 선에서 결말을 맺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소설이 10대 여자아이에게 그토록 깊은 인상과 감동을 남겼을까요? 그만한 나이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된 지금, 돌이켜 봐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 소설책을 들고 와서 읽어보라 권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던 그 친구분의 감상평이 저를 미리 흔들어 두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 것들을 잊어 버리지 마.」 소피가 타일렀다.
「그것들도 모두 그 사람의 일부이니까. 좋은 시절을 기억하는 것도 좋지만, 나쁜 시절을 기억하는 것도 괜찮아.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거니까.」 - 1권, p.335
「내 생각에 사치란 한번에 사람의 오감을 완전히 충족시켜 주는 그런 거예요. 지금이 바로 그런 사치의 순간이죠. 몸은 따스하고 맘만 먹으면 손을 내밀어 당신 손을 만질 수 있어요. 코로는 바다 내음이 맡아지고 호텔 안에서 양파를 굽는 맛있는 냄새도 흘러들어와요. 입으로는 차가운 맥주를 맛보고 귀로는 갈매기가 우짖는 소리,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요. 고깃배 엔진 소리가 기분좋게 통통통 하는 소리도.」 -2권, p.187
「아니, 한 번도 하지 않았어. 40년간을 한 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지. 이름조차 거론한 적 없어. 그런데 요전 날, 도리스하고 같이 있는데 그녀가 비로소 그 사람 이야기를 꺼낸 거야. 금방 방에서 나간 사람 이야기를 하듯이. 정말 기분좋은 일이었다.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난 너무 오래 슬픔을 안고 살아왔지. 이 세상 무엇도 누구도 내 외로움을 달랠 수 없었지. 하지만 세월이 흐르다보니 과거를 정리할 수 있게 된 거야. 나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웠지. 꽃을 기르며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그림을 바라보고 음악을 들으며 사는 법을 배웠어. 그런 일들은 은근하지만 힘이 있어. 사람들을 든든히 지탱시켜 주는 놀랄 만한 힘이 있지. -p.290」
이 책의 정가를 보니 각권 5,500원이라고 인쇄되어 있군요. 세월을 실감할 수 있는 가격입니다. 페이지 바깥으로 완전히 시간의 색을 입어버린 페이지들이 흡사 유물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오늘은 역대급으로(!) 긴 편지를 썼네요. 지루하시지 않았길 바라요. 사실 조금 전 저 인용문들을 옮겨 적으며 조금 코끝이 시큰했습니다. 문장도 그랬지만, 저 문장들에 밑줄을 그으며 곰곰 생각에 잠겼던 그 시절이 다시금 떠올라서요. 함께 나이를 먹어 준 책들을 좀 더 다정히 살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만 줄입니다.
주말 잘 보내시길요!
하이~ 담화님.
잘 지내고 있나요?
프랑스 손님맞이를 앞두고 다락방을 대청소하시는 일은 잘 되고 계신지요? 그 예쁘고 아늑한 다락방이 어떻게 변신할지 매우 궁금해지네요.
저는 이 편지를 무려 세 번째(?) 다시 쓰고 있습니다. 에고고고고… 할 말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반면에 어떤 말을 하는 게 좋을지 고민도 되는 편지였습니다만,, 원인을 알 수 없는 감기 몸살과 다시 도져 버린 비염으로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이제는 그냥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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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주신 편지의 인용문에서 지난 번에 다루었던 《The Town of Turtle》도 생각이 나더군요.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채워가는 일상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다른 한편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고난, 그럼에도 생을 이어가는 고통과 외로움, 이를 돌이켜보는 이제는 나이가 든 여성들의 삶… 이런 키워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머릿속을 휘감았답니다. 하… 그러니 저는 정말 다시 펼쳐보기 힘든 그 책이 떠올랐지요. 바로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말입니다.
《자기 앞의 생》
돌이켜보니 제가 어린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책을 읽기 싫어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책을 읽은 후부터라는 걸 상기하게 되었지요.. 맞아요, 주인공 모모의 생존본능은 그냥 편하게 두고 보기엔 너무 처절하거든요… 그리하여 저는 이 책은 최대한 거리를 두고 싶어서 책장에서 꺼내어 두고 이틀 동안 멀리서 표지만 노려보고 있었어요.
…
이 책은 잠시 그대로 두고 다른 얘길 해볼게요. 이번 추석에 시댁 어르신들을 뵈었는데, 저에게 작고하신 시할머님께서 항상 하고 계셨던 반지와 목걸이를 저에게 주셨어요. "이건 장손 며느리가 가져가야지."라고 말이죠.. 그리고 아직 어린 아들이 결혼하면 며느리를 주라고 하시더이다… 그렇게 저는 부담 백배인 시할머님의 반지를 받아들었습니다.
장신구의 가장자리가 바래지고 낡아진 만큼 오랜 세월,,, 무려 1920년에 태어나 2022년에 세상을 떠나신 할머님께서는 지난 102년 동안 어떤 생을 살아오셨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더군요. **여고 1회 졸업생으로 궁중요리까지 사사 받으신 할머님은 결혼 때문에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8남매를 낳고 범부로 살아오셨다고 합니다. 과연 그 한 세대를 거친 그 생은 어떠하였을까…
시어르신들은 이런저런 시할머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지만, '사랑이야기'만은 빠져 있었어요. 그 시대에도 사랑은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가장 애절하고 절절하게 꽃피어 있었을진대 말입니다.
누군가가 한 세대를 살다 가신 할머님의 사랑이야기를 기억해준다면 좋았을 것을… 그러니 저는 이 생각에까지 미치자, '그래,, 슬프지만 이 책을 펼치자'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담화님도 이 책을 좋아하신다고 하셨지요? 저도 이 책이 참 좋았어요. 담담한 어조인데 결코 담담히 읽을 수 없는 것이 슬프고 아픈 이야기였지요.
주인공 모모는 창녀들의 아이들을 키워주는 나이 많은 로자 아주머니와 함께 삽니다.
유태인 학살로부터 겨우 살아남은 로자 아줌마는 신분을 감추고, 사회의 그늘로 숨어들어 창녀로 살다가 그늘의 그늘이 되고 마는 창녀의 아이들을 먹이고 키우며 살아가지요. 비록 거칠고 험해 보이는 사회의 비주류, 불법이민자, 창녀, 동성애자들, 포주와 창녀들 사이에서 살지만 적어도 그녀는 위선없는 삶으로 아이들에게 사랑을 줍니다.
모모는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인지도 정확히 모르고, 부모애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지요. 그저 거리의 아이들과 즐겁게 지내고, 거리에서 물건을 훔치고, 작은 사기를 치면서 살아가죠. 모모는 소유욕이 강하여 물건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자 그런 행동들을 합니다.
또 빅토르 위고와 친구였다는 하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곤 합니다. 할아버지의 지혜에 감탄하며 말이지요. 언제가는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가감없이 쓰겠노라 결심도 하면서요.
행복이란 높은 요물이며 고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놈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어차피 녀석은 내 편이 아니니까 난 신경도 안 쓴다. (중략) 하지만 나는 행복해지자고 주사를 맞는 짓 따위는 안 할 거다. 빌어먹을, 나는 이제 행복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 그러다가 또 발작을 일으키면 큰일이니까. 그런데 하밀 할아버지는 내가 표현할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을 찾아야 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 바로 거기에 그것이 있다고 말했다. p.100
“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와 함께 한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그것은 프랑스의 것이 아니었다. 하밀 할아버지가 종종 말하기를,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 오는 것이며, 영원을 운반하고 있기 때문에 바쁠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 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 시간에 관해 내 생각을 굳이 말하자면 이렇다. 시간을 찾으려면 시간을 도둑맞은 쪽이 아니라 도둑질한 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p.174
이 이야기는 모모를 아낌없이 사랑해주는 로자 아줌마가 병에 걸리고 극도로 쇠약해지기 시작하면서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불안해질 때면 히틀러 사진을 보면서 그 일에서도 살아남은 자신을 위로하며 생의 용기를 가다듬는 그녀, 로자 아줌마는 병원으로 이송되길 거부합니다. 식물처럼 생명 연장만 한 채로 살길 원치 않지요. 자신의 의지로(비록 수시로 코마 상태에 빠지지만) 끝까지 그 생을 살아내길 원합니다.
모모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로자 아줌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고, 끝까지 그녀의 바람을 이루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허물어져가는 인간의 기억, 기능을 잃어가는 인간의 육체가 한 사람을 대변하지는 못합니다. 로자 아줌마에게는 사랑이 있었거든요. 그녀의 비대해진 육체가 정신을 잃곤 하는 시간이 길어져도.. 모모에게 남겨진 것은 사랑 뿐이었어요.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 모모는 하밀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인간은 사랑이 없어도 살 수 있어요?"라는 질문을 합니다. 처음에 하밀 할아버지는 인간은 사랑이 없어도 살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야기의 끝자락에 모모는 대답없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더 이상 답을 구하진 않습니다. 모모는 이미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고 있으니 말이지요.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중략)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아직도 그녀가 보고 싶다. (중략) 사랑해야 한다. p.307”
나를 전적으로 믿고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한 존재, 그 존재가 어떤 모습이든지, 오롯이 사랑을 전해줄 수 있다면 인간은 생을 살아갈 충분한 연료를 가진 셈이라는 걸 보여주지요.
이 생각을,, 머리에서 손과 발로 끌어내려 내 현실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오롯이 사랑을 전해주려면 말입니다.
굿밤 담화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