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을 읽다》 《장미의 이름》
우와아, 벌써 28차 라운드라니 믿을 수가 없네요.
필화 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쓰는 원고란 원고는 모조리 출력해 두는 버릇이 있잖아요. <책장담화>의 출력원고 볼륨이 생각보다 꽤 된다는 거 알고 계세요? 우리가 회차당 평균 3장(편차가 있지만 대략 6000-7000자 정도 되지 싶습니다)을 쓰고 있는데, 참… 대애단하다 싶네요.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요. ㅋㅋㅋ
이건 흡사 꼭 10대 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도 든단 말이지요. 엄마한테 등짝 맞아가며 집 전화를 전세 내다시피해서 한 시간이 훌쩍 넘게 전화로 수다를 떨고는, 마지막 인사로 “응 그럼 내일 만나서 다시 얘기해~”하던 그런 기분 말입니다. 우스운 것이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일수록 할 말이 더 많아진다는 거죠. 신기하고 흥미로운 일입니다. 자, 그건 그거고.
인간적인 품을 넓히는 일
《자기앞의 생》. 결국 이 책을 선택하셨군요.
저는 이 책이야말로 불편하고 괴롭지만 우리가 소설을 읽어야 할 가장 중대한 윤리적 당위와 문학적인 촉구를 모두 갖춘 그런 작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절대로 쉽게 읽을 수 없고 또한 가볍게 덮을 수 없지만, 살면서 반드시 한 번쯤은 읽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은 그런 책이요. 매일매일의 고단한 삶에 쫓기다 보면 도저히 이룩할 수 없는 고매한 목표 - 말하자면 인간적인 품을 넓히는 일 같은 것 - 에 비교적 근접할 수 있게 돕는 이야기 아닐까요. 물론 어떤 종류이건 간에 성숙, 혹은 성장에는 아픔이 따르게 마련이니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느껴야만 하는 심적 둔통은 기꺼이 견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 역시도 이 책을 두 번은 못 읽겠습니다. 그런 고통은 정말이지 한 번으로 족합니다. 실은, 필화 님의 답신을 읽으면서 이 책의 한결같은 메시지를 그대로 담고 있는 책 두 권이 바로 떠올랐는데… 이 책들을 추천할까 말까 몹시도 망설였습니다. 사실 지금도 망설이고 있어요. 그러나 최근 제가 소개했던 일련의 책들을 돌이켜보건대, 이제 좀 무겁고 뻐근한 책을 이야기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한 번 더 묵직하게 가 보겠습니다. 눈물샘, 준비해 주세요.
《그 아이만의 단 한 사람》은 《자기앞의 생》의 논픽션 버전이라고 할 만합니다. 하지만 너무도 직설적으로 전달하는 내용이라 조금 비껴난 책을 소개할게요.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이 뒤떨어진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이 책도 정말이지 좋은 책입니다만, 가끔은 어떤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전달하기보다 에둘러 전하는 것이 훨씬 가슴 깊이 남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요.
《소년을 읽다》
《소년을 읽다》 이 책을 쓰신 국어 선생님은 조금 특별한 교육 경험이 있으십니다. 소년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셨죠. 소년원에서 머물게 된 그 현재까지, 이 아이들은 바로 그 단 한 사람을 갖는 행운을 갖지 못했기에 - 이 표현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거듭 고치고 또 고쳤습니다만 정말이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분명 거슬리는 표현이지만, 혜량하여 주시길… - 이곳에 이르게 됩니다. 이 책을 꽤 많은 분께 권했고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들은 기억이 납니다. 물론 원망도 꽤 들었습니다. 엄청 우셨다고들… 하하.
단언컨대 이 책을 읽으신 분들이 세상을 보는 눈은 조금쯤 달라지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교육청 파견 교사로서 소년원에 첫발을 디딘 선생님께서도 자신의 우려를 가까스로 감춘 채 아이들을 만나시지만, 놀랍게도 그 아이들은 선생님이 알고 있는 보통 아이들의 모습에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것이라면, 그저 보통의 아이들이 당연한 듯 갖고 있는 애착의 경험, 혹은 정서적 지원이라는 걸 받아본 경험이 전무全無하다는 것이려나요.
우리는 부족할지라도 환대의 준비를 했다. 이 시간의 함께 읽기 경험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언젠가 아이들이 알게 될까?
환대로 사람을 맞이하는 경험, 자신이 주체로 활동하는 경험은, 나도 타인도 소외시키지 않는 연습이다. 사람의 온기를 느끼는 연습이다. 이런 연습이 쌓이면 삶에서 적어도 '나'를 소외시키지는 않을 것 같다. 막 살지 않을 것 같다. 길 밖으로 떨어지더라도 자신을 돌보며 다시 삶의 길 위에 올라서게 되지 않을까. 두 다리에 힘 주고 걸어가게 되지 않을까. -p.50
의도를 지닌 이야기였다. 그렇게 짐작되었다. 소년의 마음에 '하고 싶은 일' 하나 만들어주고 싶은 의도.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무작정 방치하지 않는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돈을 모으든 공부를 하든, 어떤 노력이건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길 안의 삶'을 살게 된다. 박찬일 작가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슬쩍, 작은 일 하나 보여 주고 "이거 하고 싶지 않니?"라는 말을 가만히 건넨다. 그 일 하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자신을 돌보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이 마음이 소년들에게 맑은 물로 스미고 있었다. -p.54
"아, 그러면 나는 처음으로 민우에게 책을 읽어준 사람이 된 거야? 17년 만에?"
"예, 그렇습니다."
"우아! 영광이야."
민우는 생애 17년 만에 첫 번째인 일이 두 가지 생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재미있는 책을 만났고, 자신만을 위해 책을 읽어준 최초의 어른이 생겼다. 이 사실이, 나는 눈물겹다. -p.155
나도 좋은 삶을 살고 싶다.
소년이 이런 삶을 원하게 되는 것, 이것이 사회와 사회의 어른들이 소년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다. 욕망이 가는 길을 바꾸는 것이 최고의 교정/교화가 아닐까. 소년이 좋은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좋은 삶을 욕망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p.216
[얇은 책인데 읽는 데 오래 걸린다. 책등을 세워 엎어둔 채 자꾸 앞 베란다 창을 통해 멀리 있는 산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흐리멍덩한 날에는 산의 윤곽만 흐릿하게 보일 때도 있고, 그나마도 안 보일 때도 있는데, 유난히 맑고 쨍한 날에는 신기하게도 지독한 난근시에 시달리는 내 눈에조차 산에 빽빽하게 심긴 나무들의 실루엣이 도돌도돌하니 엠보싱 무늬처럼 들어와 박히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 딱 그렇게, '갈 만한 짓을 했으니 갔겠지' 하며 한데 모아 생각했던 소년원 아이들이 제각각 심겨 있는 한 그루 나무처럼 도드라져 읽힌다. 글을 쓰신 선생님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던 질문이 내게서는 계속 떠나지 않는다. 하나하나는 이렇게 순한 마음이 여전한 아이들인데, 왜 이 아이들은 거기에 가 있을까.]
… 라고 제가 썼던 리뷰의 한 대목을 가져와 봤습니다. 책을 다시 펼쳐서 읽으며 쓰기엔, 네, 짐작하시다시피 못하겠어요. 슬퍼요. ㅠ.ㅠ
즐겁기 위해서도 책을 읽고,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해 외면하고 있던 현실을 공부하기 위해서도 책을 읽는 것이었죠, 네. 새삼' 책은 도끼다' 라는 명언을 되새기며 또 주책맞게 나와버린 눈물을 슬쩍 닦고, 메일을 보내려고 하는데… 메일 받을 준비 하시라니까 왜 기겁을 하시는 거죠? 카톡창이 소리를 지르는 줄 알았다고요~
안녕 담화님.
담화님이 즉각 보내주신 답장에서 《소년을 읽다》인용문을 읽다가 울컥 눈물이 날 뻔한 대목이 있었습니다.
민우는 생애 17년 만에 첫 번째인 일이 두 가지 생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재미있는 책을 만났고, 자신만을 위해 책을 읽어준 최초의 어른이 생겼다. 이 사실이, 나는 눈물겹다. -p.155,
아아....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쩌면 소년원의 아이들은 다른 세상을 꿈꿔보지 못했던 게 아닐까?’ 라고요. 물론 그곳에 가 있는 이유는 백이면 백 다르겠으니 일반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각자 자신의 생이 아닌 다른 세상을 모르거나, 혹은 알아도 본인의 것이 될 수 있으리라고 꿈꿔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자기가 아는 세상의 모습은 그 현생 뿐인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니 조금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소년을 읽다》의 저자처럼 선함을 기꺼이 흩뿌려주는 분도 계시지만, 선한 얼굴을 한 악마도 어디에나 있지요. 그래서 저는 이 미스터리를 꺼내 들었습니다.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입니다.
《장미의 이름》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책은 가장 최근 판으로 2022년 12월 25일 특별합본판 3쇄이며 무려 3역쇄입니다. 번역자는 책의 말미에 번역에 대한 글을 적어두었습니다. 1986년 초판 이후에 출판사의 권유로 절치부심 끝에 1992년 개역판을 출간하게 되었으나, 이후 한 철학과 교수님이 300여 군데 정도 수정할 내용을 출판사에 보낸 것을 토대로 약 270여 군데를 수정하여 출간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더군요. 그 최종 번역본이 바로 이 판본입니다.
사실 이 책이 중세기독교 역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잡다한 지식들이 총망라(?)된 책이라서 끝을 보기가 쉬운 책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절판시키지 않고 원본에 가깝게 번역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출판사와 번역자의 수고와 노력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잠시 이 세상의 모든 번역자들과 출판사의 노고에 감사를 전해봅니다. 사설이 길었습니다만, 제가 애정하는 작가와 책이니 이해해주세요.
아 그리고 1989년에 장 자크 아노 감독이 만들고 숀 코네리가 주인공으로 열연한 영화도 있음을 알려드리지요. 엄격하고 지적인 수도사 얼굴을 한 숀 코네리의 얼굴은 주인공 이미지에 정말 찰떡입니다. 사실 이 윌리엄 수도사는 셜록홈즈에서 모티브를 따온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윌리엄 수도사는 영국계이고 출신지가 베스커빌이죠(!)
아 그런데 이 소설은 아무리 줄여도 분량과 내용이 적절치 않은 관계로 ‘이 책은 무엇을 말하고 있나?’를 언급하는 것으로 전환하겠어요.;; (줄거리 요약을 두 번 시도했다가 접었습니다;;)
이 책은 얼핏 보기에 '한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 미스터리'《소년을 읽다》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는 '무너져가는 중세 기독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비뇽 유수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증거이지요.
지적이고 총명한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와 수련사 아드소는 처음부터 핵심을 짚지만 이 과정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시시각각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계속 죽어나가고 잡힐 듯 말 듯 잡히지 않는 사건의 실마리 때문에 두 사람은 맘을 졸입니다.
워낙에 방대한 소설이기도 하지만, 작가는 지적 유희라도 하시는 양 지식의 일부를 베어내어 도처에 발라두신 까닭에, 저는 미노스의 미궁에 빠진 양 도저히 범인을 추측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테세우스가 아니었던 겁니다.
겨우 범인이 눈에 들어올 듯 한 즈음에, - 아 이쯤에서 거침없이 범인을 밝히는 만행을 저질러 보겠습니다. (이하 스포 주의!) 무려 30여 년 전에 출간된 책이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요? - 맹인 수도사 호르헤는 인간의 웃음이 왜 그리스도의 재림을 방해하는지에 대해 폭포와 같은 궤변을 쏟아붓습니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지… 그러나 이 즈음에 이르러셔야 저는 이 책이 진실로 말하고자 했으나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것은 바로 중세 기독교의 몰락, 이름만 남은 장미의 실체를 까발리려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종국엔 다 불타버리고 마는 수도원을 모습을 보면서 윌리엄 수도사가 아래와 같은 말을 합니다.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장서관이었다. 아, 그런데 이게 무엇이냐. (중략) 이제는 학문이 가짜 그리스도를 저지할 수 없게 되었으니… (중략) 호르헤 영감의 얼굴 말이다. 철학에 대한 증오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나는 처음으로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중략) 호르헤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두려워한 것은, 이 책이 능히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p.823
범인은 맹인 수도사 호르헤입니다. 사실 범인이라 하기도 참 애매합니다만… 희생자들은 이렇습니다. 첫 번째 희생자였던 아델모는 아름다운 수도사였고, 그는 장서관에서 읽고 싶었던 책을 얻기 위해서 남색을 희생당했습니다. 이를 노수도사 호르헤에게 고해성사했으나 거절당하고 자살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이를 조롱하고 남색하던 자들, 헤프게 웃었던 자들, 질투에 눈먼 자와 읽지 말아야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웃음에 대한 책)을 읽고 싶어했던 자들, 장서관의 비밀을 알아낸 자들이 모두 호르헤의 심판자 역할에 다 죽어나가지요. 그 와중에 장서관 지하의 숨겨진 보물을 자랑하던 물질주의자 수도원장도 아무도 모르게 죽고 맙니다. 이 정도면 왜 기독교의 부패와 추락이 언급되는지 아시겠죠?
소설은 그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입니다. 그리고 온갖 지식의 쓰나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말미에… 소설도 아니고, 작가의 말에.. 저는 또 충격을 받지요.
독자들은 섹스가 있고, 마지막 대목에서 범인이 드러나고, 그러면서도 액션이 철철 넘치는 범죄 소설의 구성을 원한다. 그러나 이런 소설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산송장과 악몽 같은 미궁, 범죄에 대해 죄 없는 회오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낡아 빠진 범죄소설을 읽었다는 사실 자체를 창피하게 여긴다. 그래? 그렇다면 라틴어 무더기를 선사할 수밖에? (중략) 눈치 빠른 독자들은, 내가 독자들을 어떻게 이런 덫 쪽으로 유인해 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왜? 나는 단계단계마다, 틈날 때마다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내가 독자들을 파멸로 이끌고 있다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악마와의 계약에서 가장 멋진 점은, 우리는 악마와의 계약에 서명한 뒤에야 그가 내건 모든 조건들을 잘 알게 된다는 점이다. 악마가 내건 조건을 잘 알고 있었다면 지옥에 떨어지는 징벌을 당할 리가 있겠는가?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를 전율하게 하는 것을 기쁨(말하자면 형이상학적인 전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무수한 플롯 중에서) 가장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구조, 즉 탐정 소설의 구조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p.909
아니, 작가 어르신,,, 이런 성격이셨던 걸까요??? 대단히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에 감탄하다가 휘둘린 이 느낌… 매우 떨떠름합니다만… 작가가 작가이니만치 그러려니 하고 넘어갑니다.
이 편지의 초반에 제가 ‘어쩌면 소년원의 그 아이들은 다른 세상을 꿈꿔보지 못했던 게 아닐까?’라는 말을 했었죠… 《장미의 이름》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아는 세상은 그 생뿐이었던 노수도사 호르헤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차기 수도원장의 보장되는 도서관 사서였지요.. 그에게는 오로지 그것만이 자신이 아는 세상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이야기 속의 장서관은 일대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아름다운 장서관입니다. 그러나, 그 장서관의 수많은 책을 기억하고 있어도 그의 눈은 물리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닫혀 있는 문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아는 책들이 세상을 넓히는 문이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이에게도 또 우리에게도..
담화님 말씀대로 벌써 28회차의 편지를 주고받고 있는데, 독자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다른 세상을 설핏이라도 볼 수 있게 문을 열어드렸는지 모르겠네요.
저에게는 많이 열린 문이었는데 말입니다.
열린 문 앞에 서서,
필화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