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_마지막 회차:《이웃집 방문 프로젝트》《반 고흐》
10월 중순입니다, 필화 님.
이번 시즌의 최종라운드에 드디어 도착했군요. 감개가 무량합니다. 진짜루요.
다소 복잡하고 후련한 기분으로 답장을 씁니다. 확연히 차가워진 가을바람에 겉옷이 없으면 팔을 끌어안게 되는군요. 이렇게 또 계절을 실감합니다.
필화 님은 계절 세리머니 같은 게 혹 있으신가요? 생각해 보니 세리머니보다는 리추얼이 더 맞는 표현 같기도 합니다만. 저는 있어요. 생각해 보니 저의 계절맞이 의식은 모조리 다 먹을 것과 연관돼 있지 뭡니까(...). 갑자기 현타가 오네요.
봄엔 유채김치(이거 한 번도 못 드셔본 분은 봤어도 한 번만 드신 분은 못 봤습니다. 제가 귀찮아서 겨울에 김장을 스킵한 적은 있어도 봄에 유채김치를 안 담근 적은 없어요…) 여름엔 역시 매실장아찌와 오이지지요. 게다가 복숭아 절임도 필수가 되었습니다. 겨울이야 뭐, 김장이겠지만 최근의 2년간은 이런저런 사유로 건너뛰었네요?
가을은 왜 말 안 해 주냐고요? 지금 합니다. 이것이, 좀 성격이 다르긴 합니다만… 베이킹을 1년 중 가장 많이 합니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사과를 넣은 것을 주로 만들어요. 미국 살 때는 사과 잼을 종종 만들었는데, 생과로 먹기엔 상당히 단단하고 시큼해서 영 별로인 그 사과가 잼이나 젤리를 만들면 기가 막히거든요(팔아달라는 소리도 들어봤습니다. 훗… 하지만 어깨 나갑니다, 그런 일 하면 ㅠ.ㅠ). 한국에서 먹는 사과로는 그 맛이 절대 안 나옵니다. 한국 사과는 그냥 먹어야 제맛이죠. 하지만 저는 안타깝게도 사과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 반전. 익힌 사과는 좋아하지만… 뭐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요, 저는.
최근엔 Old-Fashioned Bakery님의 책에서 본 애플 크럼블 치즈케이크를 구웠는데, 투박하게 썬 사과를 따로 조려 얹어 굽는 레시피였어요. 와, 이것이 실로 메가히트를 쳤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꼭 한 번 구워보시기를(과정이 많아 번거로울지는 몰라도 어렵지 않습니다). 치즈케이크를 몹시 좋아하는 큰딸이 이 케이크를 맛본 뒤 최고의 레시피라고 극찬을 했을 정도거든요. 음, 이 얘기는 이쯤 하고.
줄기차게 베이킹 이야기로 밑밥을 깐 이유는 짐작하시다시피 오늘의 책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시즌1 엔딩을 장식할 책으로 무엇이 좋을까 고민을 제법 했는데(답지 않았다), 나름 용기를 내어 이런 기획물로, 누가 계시는지도 모르는 망망대해에 발을 들인 초짜 항해사의 기분은 이 책(프로젝트)을 쓴 분의 심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이 분이 훨씬 더 용감하시죠.
《이웃집 방문 프로젝트》는 실제로 용감무쌍하다고 할지… 놀랍기 그지없는 일을 실행으로 옮긴 저자가 남긴 일종의 프로젝트 보고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웃집 방문 프로젝트》
저자는 남부독일(니더바이에른) 출신의 젊은 아기 엄마로, 베를린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주는 낯선 고독, 삭막한 혐오감을 견디다 못한 저자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기에 이릅니다. 그건 바로 육아휴직 기간 동안 200개의 케이크를 구워(심지어 프로페셔널하게 굽는 것도 아니더군요) 일면식도 없는 이웃들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함께 티타임을 갖겠다는… 실로 야심만만하고 위험천만한 프로젝트였습니다. 그것도, 낯선 타인을 지극히 경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 시대에 말입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하는데요.’ 내 머릿속 골방에서 톰이 이죽거린다. 그러고는 무겁게 머리를 가로저으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여보, 돌아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톰은 내가 해보지도 않고 그만두기를 바랄 것이다. 내가 이대로 돌아가면, 톰은 틀림없이 좋아할 것이다. 어림없는 소리! 등산화를 신고 나갔는데 갑자기 눈앞에 산이 나타났다는 이유로 소리 지르며 달아날 수는 없지! 머릿속 골방에서 맴도는 생각을 외면했다. 턱을 들고 어깨를 편 채 앞으로 내밀고 손가락을 뻗었다. 드디어 초인종을 눌렀다! -p.37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사람 사귀는 것이 숨 쉬듯 자연스러운 극 E성향인 것도 아닙니다. 그녀 자신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벨을 누르기 위해 뻗어야 할 손이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아서 지금이라도 때려치우고 집으로 돌아갈까 수백 번 고심하면서 한 번의 벨을 누르는 사람입니다. 남편은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한결같이 ‘이제라도 제발 좀 그만둬줬으면’하는 속내를 숨기지 않죠.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슈테파니(저자)에게 기꺼이 문을 열어주었을까요? 낯선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슈테파니는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그들 중 과연 몇 명과 계속 연을 이어 나갔을까요?
“저도 적응 기간이 필요했어요. 서독 출신이라는 사실이 점점 탄로 났죠. 어느 날 소풍을 가서 제가 고무줄놀이라고 말했거든요. 고무줄놀이 아세요?”
그럼요!
“동독에서는 고무 뛰기라고 해요. 그래서 또 탄로가 났죠. 사람들이 ‘서독 출신이세요? 전혀 몰랐어요.’ 하더군요. 칭찬으로 하는 말이었어요. 서로 쓰는 말이 다를 뿐이에요. 예전에 다방이라고 하던 걸 요즘 카페라고 하는 거나 다를 바 없어요. 우린 서로 대화를 해야 해요. 어떤 표현이 상대방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내게는 어떤 의미인지, 나를 보면 무슨 생각이 나는지, 서로 이야기해야 해요.” -p.154
우리는 그동안 괜찮은 대화를 해왔을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각자 서른 권의 책을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책보다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해 왔죠. 아마 읽으신 분들도 그리 느끼셨으리라 생각합니다(책소개가 더 자세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던 걸 보면 말이죠). 하지만 제가 우스갯소리처럼 말했지만서도, 이미 좋은 책을 소개하는 좋은 글들은 세상에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해 온 건 책이건, 영화건, 어떤 매개물을 통해 자신에 대해 말하는 법. 그럴 수 있는 용기를 갖는 일에 대한 말들이 아닐까 헤아려 봅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매주 늘어놓고 있는 담화가, 필화가 어떤 사람들인지를 줄기차게 말하고 있었던 거겠죠. 어쩌면 무용한 일이었을 수도 있고요. 그러나 세상의 그 누구든,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여전합니다.
물론 어떻게든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내는 일이 인생의 목표인 듯 사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그런 이들로 인해 정신적 상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 자신을 기꺼이 솔직하게 표현할 때 누군가는 우리를 알아보고 다가와주기도 합니다.
"엄마가 늘 말했잖아. 어떤 사람이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건 스스로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고. 내가 나를 좋게 생각하면 남에 대해서도 나쁜 말을 안 하게 된다고 했잖아." - <마음 가면> p.295
제가 좋아하는 브레네 브라운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책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칩니다. 필화 님, 한 계절 수고하셨고, 저희의 편지글을 쭉 함께해 주셨던 분들께도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잠시의 휴식을 가진 뒤 또 다른 기획으로 찾아올게요. 책장담화를 기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D
담화님 안녕~
오늘 인사가 시즌1의 마지막 인사가 되겠군요… 아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게 있어서 이것 먼저 여쭤봐야 할 것 같아요. 유채김치는 무엇인가요????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깜짝 놀랍니다.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먹어본 사람은 없다니 그 맛이 매우 궁금해지는군요… 자, 내년 봄이 되면 저에게 전화 한 번 주시기로 할까요? ㅎㅎㅎ 유채 김치 맛을 구경하러 가보고 싶습니다. 아 물론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우리 담화님 어깨는 소중하니까요!
하루가 꼬박 지나도 답장을 쓰지 못하고 있던 저는 책은 못 정했어도 파스텔톤처럼 곱고 예쁜 오늘의 노을을 보다가 이 풍경을 꼭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핑크도 피치도 아닌 색과 블루도 퍼플도 아닌 색이 오묘하게 섞인 예쁜 하늘이었지요.
마침 해 질 무렵이라 켜져 있는 선명한 가로등 불빛과 신호 대기 중인 많은 차들의 후미등이 반짝거리고 있었지요. 그 사이를 장바구니를 들고 전동킥보드로 속력을 내어 질주하는 아줌마와 머릿결이 고운 남자아이가 태권도복을 입고 흥에 겨운 발걸음으로 지나고 있었지요. 그 둘 사이에 있던 저는 장을 본 비닐봉지를 들고 터덜터덜 걸어오다가 하늘을 보고 잠시 멈췄더랍니다.
오늘의 하늘이 너무 고와서, 눈에 보이는 시원스레 예쁘고 반짝이고 환한 그 풍경들 덕분에 굉장히 행복했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끊임없는 고충과 소소한 불편함이 늘 있지만, 그렇다고 불행한 것도 아니니 이런 행복쯤은 하루쯤 깊이 누리고 싶어서 꼭 얘길 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15주 동안 달려온 책장담화도 이렇게 오묘하고 아름다운 색이었을까요? 궁금해지는군요.
이제껏 소개해왔던 58권의 책들은 어떤 색이었을까요? 분명 저자가 서술한 색에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경험들이 덧입혀져서 오묘하게 다른 색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해요. 담화님 말씀처럼 우리가 책 소개만 털어놓은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것이 책장담화의 색이겠지요. 제가 오늘 본 아름다운 노을보다 책장담화의 색이 더 멋지고 매력적으로 독자분들에게 비춰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이렇게 색을 이야기하다보니, 도무지 정할 수 없었던 책이 정해집니다. 사실 그동안 책 두 권 다시 보고, 네 권 꺼내 들었어요. 하지만 역시 이 책이 좋습니다. 담화님이 소개해주신 《이웃집 방문 프로젝트》는 케이크를 매개로 소통의 창을 열어보려 한 이야기였다면, 제가 소개할 《반고흐》는 … 굳이 말씀 안 드려도 아시겠죠?
《반고흐》
저자는 바바라 스톡이라는 분인데, 사진을 전공했지만 저널리스트로 커리어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만화책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사시는 분인데, 이 책은 정말 작가의 커리어를 잘 살린 책입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용은 고흐의 일생 뿐 아니라 동생 테오와의 편지도 상세히 싣고 있어서 꽤 다큐같은 느낌도 있지만, 한컷 한컷이 모두 강렬한 색감의 일러스트같은 느낌의 만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여러 모로 매력이 있는 책입니다. 저와 저희집 어린이 모두 이 색감과 그림을 좋아해서 하드커버임에도 불구하고 표지가 너덜너덜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지인들에게도 두루두루 많이 추천을 해왔던 책입니다. 이 예쁜 책을 소개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책은 프로방스로 떠나는 고흐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전반부에는 생활비나 작품, 또 친구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편지에 담지만, 책의 후반부로 가서 정신병원에서 나온 이후 생의 마지막을 불태우던 아를에서의 고흐는 자기 자신의 내면 이야기를 많이 풀어둡니다.
이유를 납득할 수 없는 인생살이의 수많은 수수께끼들이 떠오를 때면, 난 밀밭을 내다봐. 저 밀밭의 이야기가 곧 우리들 이야기 아니겠니. 따지고 보면 우리도 밀과 여러 모로 닮아 있잖아? 밀처럼 혹은 여느 식물처럼 자라나고, 상상력이 갈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못할 때도 있다는 점에서 밀과 마찬가지로 무력한 존재이며, 때가 되면 수확되는 것도 그와 같지.
인류의 이야기는 밀의 이야기와 무척 흡사하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구나. 흙에 뿌려져 싹트지 않는다 한들 그게 그리 큰 차이일까? 그렇대도 여전히 곱게 빻아져 빵이 되지 않더냐. 행운과 역경,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의 차이라는 것… 결국 모두 상대적인 걸. p.109
이 대목에서는 고흐가 자신의 삶을 오롯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보이는 듯도 합니다. 그가 희망했던 작가들의 공동체는 접어버리고, 생 그 자체에 집중하지요.
자연이 내게 주는 기쁨을 너는 가족을 통해 얻었으면 한다. 아내도 아이도 없는 나는 풀 이팔, 소나무 가지, 밀 이삭 한 톨을 눈여겨보며 마음의 평온을 느끼지. 실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면 우리 모두를 하나로 잇는 고리들을 몸으로 십분 느낄 수 있어. p.117
우리가 그린 그림이지. 네가 그리는 것이기도 해. 나를 통해서. p.128
여하간 앞으로 어찌 되든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여야지. 앞날을 생각하면 적지 않은 난관이 예상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비관적으로 보지는 않아. 지금껏 내 인생엔 행운과 불운 모두 깃들었지. 불운만 있었던 것 아니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건, 기꺼이 손 내밀어 붙들자고.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쟁기를 끌 거야. 그리고 함께 경이에 찬 눈을 돌려 데이지 꽃과 새로이 갈아엎은 흙덩이와 봄에 싹 틔우는 관목 가지를, 청명한 하늘의 고요한 푸른 빛을, 가을의 뭉게구름을, 겨울의 헐벗은 나무를, 저 태양과 달과 별을 바라보자. 앞날은 예측 못할지언정, 그것만큼은 온전히 우리 몫으로 남을 테니. p.133
고흐가 자신의 생을 오롯이 받아들이면서 그의 그림은 더욱 깊어집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에 담았더군요… 작품에 드러난 강렬한 색채는 그의 열망을 담았고, 그의 작품은 그의 이야기를 담았어요.
그의 생이 행과 불행을 오가는 삶이었던 것과는 별개로 저는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난 그의 열정과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물론 작품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이 책에서 작품을 소개하는 순간순간마다 미술관에서 본 그의 작품들이 뇌리 속에서 리와인드되더군요. 인류가 사랑하는 작가이니만치, 이 책을 통해 다른 분들도 고흐의 작품과 세계 속에 더 깊이 발을 들여놓으실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담화님, 우리도 책장담화 속에 우리의 이야기를 담았을 거예요. 우리가 소개한 58권의 책의 저자들이 내고 싶었던 색에 우리의 일상과 경험과 수다를 담아서 또 다른 톤의 그림을 남겼을 겁니다. 적어도 저희에게는 소중한 색채로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담화님 2023년 여름과 가을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기회를 던져주셔서 감사해요. 저희의 서간문 ‘책장담화’ 시즌1을 즐겨주신 많은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시즌2는 어떤 색으로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잠시 쉬고 또 만나 뵈러 오겠습니다.
모두 감기 조심하세요~
부쩍 추워진 10월의 어느 날, 필화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