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Round]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점과 선The Dot & the Line》《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by 필화


세상에나, 필화 님.

비염으로 고생하고 계신가요? 저는 은근하게 저를 따라다니며 제 존재감을 떨치고 있는 감기와 헤어지려고 무던 애를 쓰는 중입니다. 아주 질척질척한 것이 도통 갈 생각을 하지 아니합니다. 지긋지긋한 녀석 같으니.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아아 압니다… 제목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옛날(까진 아닌가) <이동진의 빨간책방> 팟캐스트에 이 책을 소개하는 에피소드가 너무나 좋았어서 읽어봐야지 꼭 읽어봐야지, 했던 것이 수년을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고백하기가 쬐매 창피합니다만, 뭐 이런 일이 제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무렴요. 인간에게는 공동의 경험이라는 게 있는 법 아니겠어요?


그건 그거고 책 표지가 아주 맘에 드네요. 저는 이렇게 빤히 쳐다보게 되는, 도대체 저 안에 무슨 이야기가 있기에… 하고 공상하게 만드는 표지를 정말 좋아해요. 그렇다고 또 심플한 표지를 안 좋아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만요. 표지 얘기 나온 김에 유명한 북커버 디자이너의 책 얘기를 할까 했는데 원래 제가 정해둔 책 얘기를 하는 게 좋겠어요. 그게 뭐냐면,


광고 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라고 쓰면 맞을 것 같지만 이 드립 한 번쯤 쳐보고 싶었다… 소원성취. ㅎㅎㅎ



그나저나 오늘 독보적으로 기록적인 작업을 해치웠습니다. 오전 7시 30분부터 밥 먹고 운동한 대략 3시간을 제외하고(아, 아니다. 필화 님과 전화수다를 떤 40분도 포함해 주세요)… 조금 전까지 별로 예쁠 것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고 볼 때마다 제게 압박을 빡! 주는 모니터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작업을 했습니다… 와… 죽을 정도는 아닌데 진짜 맛이 가게 힘드네요. 얼마나 했기에 이러냐고요? 하여간 살인적인 양이었습니다. 전 1만 자 따위로 우는 소리 하지 않아요. 하지만 오늘은 울면서 끝냈어요. 나는 마감을 지키는 성실한 자까워너비니까요. ಥ_ಥ


그치만 내일은 한글 켜지도 않을 겁니다. 한글이 다 뭐야, 컴퓨터도 안 켜! 내일 하루는 무조건 파업이에욧! 살기 위한 파업! brrrrrr…



각설합시다. ㅋㅋㅋ 그래서, 제가 뭐에 꽂혔냐면,


세계문학전집 나머지와 사관학교 반지를 주면서 “기다려주오”하고 가셨다고 합니다. 이 무슨 로맨틱한.... 이 부분이에요. 아니 잘 나가는 로맨스 소설에도 안 나올 것 같은 이 당분과다 멘트 무엇… 현실입니까? 와. 진짜 와- 소리 말고는 다른 말이 안 나와요. 멋지십니다 아버님. 로맨스 쓰시는 지인 작가들께 소재로 드리고 싶을 정도였어요(하지만 안 했습니다!).

고정하겠습니다. 흠흠.



여하간, 그래서 이 달달한 멘트를 받아 나도 달달찐득한 로맨스를 (처음인 것도 같고) 가져와야지 ♬ 했지만, 정말로 평범한 로맨스 장르를 가져오면 그게 담화겠습니까? 나 김담화, 예측을 거부한다… 나를 당신의 예상범주에 가두지 마세요. 하.하.하


죄송합니다. 오늘 좀 무리했더니 아직 장르 어법에서 탈출을 못한 모양입니다. 크크큭.

로맨스 맞아요. 네, 정말 맞아요(단호). 하지만 남주와 여주가 등장하지 않을 뿐이다… 그럼 BL이냐고 눈이 커지실 분들을 위해 황급히 부연합니다. 노노노.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이들이 봐도 되는 초건전 로맨스입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점과 선이거든요. (충격)... 기자님들… 충격은 이럴 때 쓰는 말이에요…

아, 제목도 《점과 선The Dot & the Line(대문자 소문자 틀린 거 아님)이라고 해요.



《점과 선The Dot & the Line》

제목 보고 갑자기 팍 짜게 식으신 분 계시다면 죄송합니다. 백배사죄하겠습니다. 따로 멘트 남기세요. 진짜 제대로 추천 박도록 하겠습니다.



수학적 로맨스예요.

흠. 수학과 로맨스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라고 강하게 반발하실 수도 있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이 있지 않나요. 창의성은 영 엉뚱한 개념을 병치시킬 때 발휘되기도 한다고. 이 책이 바로 그 증거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부제가 끝내주네요. A Romace in LoWer Mathematics.

책커버에 쓰여 있는 소개글을 그대로 옮겨 드리겠어요.


《점과 선》은 점과 사랑에 빠져 괴로워하는 선의 고뇌에 찬 이야기로, 불멸의 문학 작품에 이름을 올릴 만한 사랑 이야기다. 이 가슴 아픈 딜레마를 사랑의 애통함과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로 보는 사람도 있겠고, 감성적이고 자기 탐구적인 형식으로 풀어낸 실험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요즘처럼 사람들이 삶 자체의 의미를 잃고 살아가는 불확실한 시대에 우리를 좀 더 고차원적인 지성으로 인도하는 등대 같은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글쎄, 잘 모르겠다.

(or 글쎄,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저는 뭘 보았냐고요?

좀 그럴싸한 외모 말곤 실속도 지성도 없는 날건달 구불이에게 홀랑 반해 학식 있고 분별 있는 직선의 구애를 거절했다 막판에 정신을 차린 건지 뭔지 금세 마음을 바꾼… 지조도 없고 줏대도 없고 뭣도 없는 점을 보며… 인생, 도대체 무엇이며 사랑은 또 무엇인가… 를 멍하니 고민했습니다.


인생, 진짜 뭡니까…?

이왕 커버 소개글 스포일했으니 책 뒷커버에 나온 홍보문구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보라

꼴사나운 구불이에게 온몸을 내던지는 음탕한 점을! (진짜 이렇게 쓰여있음)

보라

내면을 갉아먹는 공상에 괴로워하는 무기력한 선을!

보라

연인들의 운명적 대결을!

전부 감상하라

모든 독자에게 불후의 명작으로 기억될 이 소름 끼치는 사랑이야기에서!


제가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자이신 노튼 저스터는, 영미권에서는 어쩌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보다도 훨씬 더 이름있는 고전의 반열에 든 <The Phantom Tollbooth>라는 판타지를 쓰신 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저 광고 문구를 설마하니 저스터 씨가 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어쩌면 그랬을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은… 인생은… 알다가도 모르는 거니까요…

우리가 그런 걸 어디 한두 번 봤던가요.


어떤 날은 지독히도 우울하고 이튿날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쨍- 하듯 맑은 기분이 될 수도 있겠죠. 부디 나의 친애하는 벗께서 빨리 감기와 기타 등등의 피로함에서 탈출하실 수 있기를 충심으로 기원하며,


눈과 팔이 합심하여 맛이 가고 있는 담화.









어제 열일하여 피곤하신 담화님.

오늘은 좀 푹 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당장 추석 연휴인지라, 한 집안의 며느리이자 아내이자 엄마인 담화님이 푹 쉬기는 무리겠군요. 아마도 오늘은 서둘러 장을 보고, 부랴부랴 시간이 드는 음식들을 하고, 내일은 시댁 어르신들을 뫼실 테고... 그러시겠죠?


아 이렇게 여자에게는 힘듦이 조금 더 많은 것 같은 결혼 생활이 그런 로맨틱한 일로부터 시작된다는 게 참 아이러니예요. 그렇죠?


하여 이어서 저희 부모님의 로맨스는 어찌 되었는가 하면 말이죠..

혼기에 찬 어머니에게는 많은 맞선 제의가 들어오나 외할머니께서는 "반지를 주고 목숨을 걸고 간 청년이 있는데 어디로 보내려 하시오? 아니 될 말이오."하시었고, 결국 어머니는 여차저차하여 아버지가 주고 간 세계문학전집을 읽고 쓰다듬으며 아버지를 기다리시게 되었죠.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장교복을 입고 호기롭게 어머님댁으로 향합니다. 외할아버지께 큰 절을 하며 아시다시피 고전적인 바로 그 멘트를 외치시죠. "따님을 주십시오."

그리하여 성사된 이 로맨스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긴 인생은 중간생략) 황혼에 이르러 현실엔딩을 맞이하게 됩니다.


씁쓸합니다만, 이 두 분의 연애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것은 그리움이었던가, 기대였던가, 희망이었던가, 혹은 설렘이었던가... 말이지요.


그리하여 생각난 책이 있습니다.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입니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와 다르게 이 책은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소개한 것을 듣고 구매한 책이지요. (그러고 보니 이동진님이 저희의 독서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셨네요... 이동진님, 보고 계십니까?)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책 표지에 제가 적어둔 것을 보니 아주 웃기긴 합니다. 저는 이 책에 대한 소개글을 들을 때에 왜 항상 모든 여주는 남주와 서브남주의 애정을 독차지할까? 하는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모든 서사에서 주인공들이 애정과 관심을 독차지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저는 작은 질투라는 표현을 써두었네요...



이야기는 아주 짧습니다.

물리학 수업에서 꽤 문제를 풀어낸 헤더는 담당 교수 로버트의 초대를 받습니다. 그리고 둘은 이야기를 나누지요. 사실 그게 전부입니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눕니다. 영혼의 대화를 말이지요.


그러나 헤더에게는 남자친구가 있고, 로버트에게는 부인과 아이들이 있습니다.

헤더의 남자친구는 현실을 책임져줄 물질 세계의 사람이고 심지어 꽤나 책임감 있는 사람이지요. 그는 유능한 의사가 되고, 또 끝까지 헤더를 믿고, 헤더를 위해 일터까지 옮깁니다.


그러나 그녀의 영혼은 무엇이든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로버트 교수에게 가 있어요. 그 역시 '기다림'이라는 형태로 책임감 있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둘은 결코 법적인 선을 넘지 않지만, 영혼의 선은 이미 무너져 점이 되어 버린 상태라고 할까요?


(아 참고로 저는 점의 연속적인 조합이 선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지라, 지난 번에 편지에서 언급하신 책 《점과선The Dot & the Line》의 인용문을 보고 너무 놀라 자빠질 뻔 했답니다. 아니 이게 무슨 기괴한 내용인가? 싶었어요. 상식이 해체되는 순간을 목도한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이 너무 궁금해지기도 했어요. 도서관에 다녀오겠습니다.)




아 다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야기로 돌아와서,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또 꼬박 십 년이 지난 어젯밤에 다시 읽어도 헤더는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걸 곱씹게 되는군요. 여기에 이르러서 저의 작은 질투는 작은 연민으로 바뀌었더군요.


로버트 교수는 헤더 자신도 몰랐던 그녀의 마음을 알고 기다렸죠.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그녀는 아마도 절망을 맛보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녀 영혼의 빛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헤더의 심정이 변하는 구절들을 세 곳에서 가져와보았어요.



이제 로버트와 나는 더 이상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들 삶의 내밀한 사정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우리를 배신한 스러진 사랑들, 우리가 배신한 스러진 사랑들, 추억하기조차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유년의 순간들, 우리가 나누는 이런 대화에는 자유가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서 하는 얘기는 절대 그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콜린에게 언급할 수 없었던 일들을 로버트에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어떤 일도, 아무리 우스꽝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어도 모두 다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 아파트에서 나누는 모든 말들은 그 바깥의 세상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을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p.108


그(콜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차분하고 다정했다. 우리는 두 번 다시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그래왔다.

돌이켜보면, 그날 밤 이후 내가 우울증에 빠졌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나는 서서히 형성되어가고 있던 내 삶을 체념하듯 받아들이게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p.119


로버트는 거의 10년 동안 내가 콜린에게 숨긴 비밀이다. 가끔 그에게 말을 할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중략) 이제 나는 우리가 함께 헤쳐나갈 수 없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내가 두려운 것은 그의 반응이 아니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다. 내가 아는 그는 그 사실을 내면화하여 속으로만 삭일 것이다. 그 때문에 나를 미워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내색은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도 그는 아마도 내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을 테고, 내게서 로버트에 대한 감정을 듣는다고 해도 내게 상처 주지 않을 방법만 생각할 사람이다. 나는 그것을 안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신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p.128~129




결국 헤더는 콜린에게 로버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가슴에 묻어둡니다.

이제 헤더의 영혼은 외롭고 지쳐 있습니다. 로버트만이 그녀의 진정한 soul mate였으니까요.. 그러면, 콜린은 뭘까요? 그녀의 영혼 반쪽이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결혼하여 그녀를 사랑하고 모든 것을 다 배려해 준 콜린은, 그의 사랑은 이렇게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 두어도 되는 걸까요?


아 너무 깊이 들어갔습니다. 워워..

비가 와서 센티해진 모양이에요.


암튼 사랑이라는 게 참 어렵습니다. 영혼의 단짝과 결혼하는 게 최고겠지만, 현실에 발목을 잡는 경우도 많겠지요. 헤더가 로버트랑 결혼한다면, 로버트는 학생과의 결혼으로 인해 윤리성에 지적을 받고 직장에서 잘렸을 테고, 헤더의 한창 나이에 로버트는 세상을 떠나버렸을 테니 남겨진 헤더는 또 얼마나 험난한 인생을 살아야하겠어요? 그러니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겠어요.


그렇습니다. 인생이며 사랑이며 참 알 수 없고, 정답 역시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고, 자기만의 정답을 찾아나가야겠죠.



아 그러고 보니 제가 결혼할 때 스위스에 사시는 @Haril 님이 선물해 주신 <수학자들>이라는 책이 있었어요. 아시다시피 제가 수학을 사랑하는 분이랑 결혼한다니 사 준 책입니다. (세상에... 섬세하기도 하지.) 그 때는 제가 이 책을 읽으면 뭔가 좀 그분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까 하였지요.

허나 이 책은 '수학자들의 특성 분석' 대한 책이 아니라, 저명한 수학가들이 어느 해에 어느 연구소에서 누구랑 어떤 문제를 논하였는가... 에 대한 매우 평화로운 다큐멘터리 같은 책이었습니다. 네.. 저는 결국 제가 궁금했던 것의 답은 찾지 못하고 온갖 수학자들의 이름과 이론의 해설 앞에서 패닉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읽어 내린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살아보니 답은 역시 책에 있지 않고, 현장에 있더군요.


우리 오늘의 삶의 현장을 잘 살아보아요..

그래서 사랑이든, 인생이든, 육아든,,, 우리만의 답을 만들어가보도록 해요. 그 답안지 모음이 우리 인생이 될 겁니다.



그럼 오늘도 안녕을 바라며.

필화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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