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안녕 필화님.
편지 즐겁게 읽었습니다. 저도 그 책들을 읽었어요.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재미있죠. 저는 어릴적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던 월귤의 정체를 알고 나서 상당히 허무했던 기억이 나네요.
음식은 한 사람의 삶에서 정말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말씀대로 저는 비교적 요리를 좋아하는 축에 속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걸 아주 괴롭게 느끼지 않기 때문에 그럭저럭 바지런히 해 먹고 산단 말이죠. 제 지인들이 다들 그렇지, 담화는 먹는 데 진심이지, 이럴 정도로요. 그런데 저는 진짜 필화 님에게 두손 두발 다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열심히 음식을 하실 수가 있나요. 제가 빈약한 오른팔로 그릴 수 있는 최대포인트의 큰 대자를 함께 그린 대.존.경을 바칩니다.
제가 어릴 적에, 저희 집엔 《세계의 요리백과》라는 하드커버의, 내지는 바인딩된 요리책이 있었습니다. 물론, 실용서의 목적성에 부합하도록 저희 어머니는 그 책들을 소장용으로만 아끼셨죠. 어린 저는 그 요리책을 보는 게 대단히 큰 낙이었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재료가 들어간 이국적인 (특히 서양의) 요리들의 사진을 구경하고 그 맛을 상상하는 건 세상에서 가장 재미난 놀이였지요.
이제야 고백하는데, 제겐 그 요리들을 먹는 순간을 클라이막스로 삼은 짧은 이야기를 쓰는 취미가 있었습니다(만 아홉 살, 열 살 언저리의 아이에게 대단한 스토리텔링을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눈 내리는 산장에 갇혀 있던 아이가 자신을 구하러 온 눈여우(라는 생물이 대체 무슨 생물인지는 저도 모르겠군요)에게 뜬금없이 바나나 스플릿을 대접하는 장면이 들어간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든가. 지금 이 편지를 쓰는 게 아니었다면 이 기억은 그냥 사장되었을 거예요. 정말 불현듯, 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게 이 옛일이 떠올라서 잠시 가만히 옛 추억을 곱씹어 보았습니다. 혼자서도 잘 놀기는 이미 그때부터 만렙이었나 봅니다.
한편으로는 음식 말고 집에서 한 가족이 만들 수 있는 추억이란 어떤 것이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쉽게는 가족여행 같은 것이 있겠네요. 하지만 모름지기 사람들이 모두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는 휴일(ex. 어린이날, 성탄절 등등)에는 집에 있는 것이 최고임을 이미 10세 이전에 체득한 어린이들을 키우는 부모였던 관계로, 저희는 가족여행이니 휴가니 하는 추억 같은 게 없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저는 나름으로 가족 전통이랄까- 하는 것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를 상당히 고민했던 것 같아요. 제 경우엔, 결혼하기 전까지 저희 친정에선 엄마와 저희 남매가 함께 즐긴 프라이데이 무비 나잇이 있었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는 행복한 기억입니다. 그런 게 있으면, 삶이 고구마처럼 퍽퍽해지는 순간에도 제법 살만한 것이 됩니다. 저 멀리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온쉼표의 존재 같은 거죠.
그래서 제 마음대로 만든 family tradition이 있습니다. 매해 크리스마스 즈음에 부엉이 삼남매를 제작, 공개하는 거예요. 제가 이 전통(?)을 시작한 이래로 딱 한번, 2022년에 건너뛰었는데 그때 좀, 가벼운 우울증을 앓았더랬습니다(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울분에 휩싸여 살았을지도). 네, 뭐 이렇게 생긴 애들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반응은 실로 열광적이었습니다. 저희들이 독립할 때 자기들 부엉이는 다 싸가지고 가겠대요. 가져가려면 마리당 3만 원씩 내고 가져가라고 할 요량입니다. 어딜 공짜로...
벌써 1500자가 넘어가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무슨 책을 읽었는지는 도통 이야기할 낌새가 안 보이죠? 이제 곧 합니다. 이게 다 밑밥입니다.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라는 책이에요.
제가 가진 건 새로 나온 5주년 에디션인데, 표지 컬러가 어마어마하지요. 전 이 책을 펼친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습니다. 세상에 이렇게까지 내 취향인 책이 있을 수가 하면서요. 저자이신 하정 님은, 여행 중에 우연히 덴마크인 여성과 함께 잠시의 여정을 함께 합니다. 그분의 초대로 잠시 코펜하겐에서 머무르던 하정(썸머) 님에게, 그 여성 – 하정 님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가족이 된 그분의 이름은 Julie라고 합니다 – 은 뜻밖의 말을 합니다. “썸머, 네가 우리 엄마를 만나보면 정말 좋아할 거야.” 이 말이 가느다란 인연의 끈이 되어 하정 님은 헬싱괴르라는 도시에서 한 달 살이를 시작합니다. 줄리의 엄마, 아네뜨를 찍고, 아네뜨의 삶을 취재하면서.
아네뜨의 삶은 제가 가장 동경하는 모습에 무척 가깝습니다. 그녀의 모든 삶의 단편들이 각각 독립하여 한 편의 기나긴 서사를 구성하는 데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다채롭고 풍성하죠. 책에 실린 이야기와 사진을 홀린 듯이 읽어나가다가, 책더미가 정신없이 쌓여서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집안을 얼핏 둘러보며 한숨을 쉬려다가 순간 멈칫했어요. 왠지 아시나요?
아시겠지만, 작년 10월 말경에 저희 집에 프랑스 르아브르에서 귀여운 손님이 일주일간 다녀갔더랬지요. H발음이 거의 들리지 않는, 프랑스식 영어를 구사해서 처음에는 말을 알아듣기가 몹시도 힘들었던 여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그 짧은 기간 동안 제가 프랑스인에 대해 갖고 있던 일종의 선입견을 모조리 깼죠. 사랑스럽고 감정의 표현이 폭넓은 소녀였습니다.
떠나기 하루 전날이었던가, 그냥 그간 충분히 잘해주고 싶었는데 부족해서 미안했다, 서운했어도 이해해 달라는 식으로 시작한 대화가 장장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는데, 아이가 해 준 이야기 중에 제게 가장 꽂혔던 건 이거였습니다.
“저는 이 집의 모든 것이 너무너무 좋아요. 어느 가정이건 제각각의 특유한 분위기가 있는데 저는 제게 내주신 방도 너무너무 동화적이어서 좋았고, 무엇보다도 사방팔방에 책이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진작에 한국어를 더 많이 공부해서, 짬이 날 때마다 읽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는지 몰라요. 진짜 여기에 있는 모든 게 너무 좋아서, 그대로 프랑스에 있는 우리집에 그대로 퍼 나르고 싶어요!”
와. 우리 집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구나. 누군가한테는 그대로 업어가고(...?) 싶은 그런 집이기도 하구나. 눈이 반짝반짝하는 아이를 보면서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었던 감정에 그만 울컥해서, 정말로 말이 잘 안 나왔었어요. 여기는 한국의 네 집이나 마찬가지니까, 언제든 오라고 말했는데 애는 또 왜 거기서 울려고 해가지고, 저까지 그만 눈물이 글썽글썽.
이 책에 실린 글들과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하정 님이 덴마크의 그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애정을 갖고 있는지가 너무 잘 보이거든요. 그런데 역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추억을 안겨줬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다시 찾아온 순간, 그 말이 딱 생각나더군요. 커트 보니것이 한 아주 유명한 말이요. If this isn’t nice, what is?
사람이 살면서 뭘 그렇게 큰 걸 바라겠어요? 내가 누군가에게 행복한 순간을 안겨줬다는 자부심, 그게 사람을 살게 하는 거죠. 그런데 막상 적고 보니 엄청난 야망 같긴 하네요.
그래서 우리 필화 님은 지난 주에 뭘 읽으셨을까요,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