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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화 Apr 01. 2024

당신 인생의 로그라인

《심호흡의 필요》

안녕해요, 필화 님?


저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상당히 안녕해졌어요. 아주 알고 그러는 것처럼 어떤 분이 갑자기 일감을 몰아주셔서… 일 많은 걸 좋아하는 저는 행복해서 죽을 지경입니다. 핫하하하(웃으면서 눈물을 닦는다).



시즌 2에서 보내주셨던 편지들을 모조리 다시 들춰 읽으며 무슨 이야기로 서두를 열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답니다. 아무래도 마지막 편지니까요(?). 참, 그렇지. 살면서 생기는 궁금증을 모아두고 계신다고요. 그거 정말 굉장해요. 아마도 그 카테고리는 비공개인가 봐요. 제 눈에는 안 보이는 걸 보면, 까르륵. 하지만 저도 그렇게 모아두는 말들의 공간이 몇 개 있답니다. 말들의 방이라고 해야 할지, 응접실이라고 해야 할지. 혹은 그냥 다락방일지도.



그중의 하나는 ‘오늘의 단어’예요. 단어라고 하지만 사실은 ‘구 phrase’라고 할까요. 그날그날 읽은 책에서 발견한 말들이나 지나가며 발견한 낱말들을 연결해서 만든 조합들을 하루에 하나씩 적어 놓는답니다. 그걸 몇 년째 하다보니 제법 저의 ‘말 창고’는 두둑한 편이에요. 잠시 몇 개 보여드리자면, 올해 1월 5일에는 [여백의 오해]라고 적혀 있네요. 1월 9일은 [미시감각]이래요. 왜 저런 말을 적어놨는지는 이미 다 까먹었어요. 2월 28일은 보자, [침묵의 표면]이라고 써져 있네… 제가 만들어놨지만 이런 기록들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쩐지 애잔해집니다. 왜 애잔하냐고요? 글쎄요. 뭔가 떠올랐다 사라진 것, 혹은 발견하고 붙잡아두고 싶었던 것들을 필사적으로 잡고 놓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그 찰나의 제 자신이 언뜻언뜻 비쳐 보이기 때문일 거예요. 그러나 제법 시일이 흐른 뒤에 다시 펼쳐보면, 분명코 그것을 적었을 때와는 다른 것이겠지만 새로운 풍경들이, 혹은 어떤 인상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건 꽤 멋진 감각이에요.


네, 그런 ‘멋짐’ 역시 책에서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우리는 텍스트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죠. 개중 어떤 것은 너무나 또렷하게 명시적이어서 보자마자 머리를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도 있지만, 텍스트 아래의 서브텍스트, 또 그 밑에서 문자들과 의미의 결을 덧입고 숨어있는 어떤 내밀한 감정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렇게 묵시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세상엔 많이 있지만, 우리가 사는 지금의 세계는 명확하지 않은 것들을 점차 영역 밖으로 밀어내려고 하고 있죠.



그러나 그런 마음들, 느낌들 중에서도 유독 콘텐츠로 잘 표현되어 살아남는 것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중 하나를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적 개념이 싫으시다면, 포르투갈에도 아주 유사한 감수성이 있습니다. saudade라고 하는 것이죠. 모노노아와레는 일본 문화에 정통하신 필화 님이 저보다 더 잘 아시겠죠. 저는 이것을 어떤 종류의 처연함과 애수, 애틋함으로 생각합니다. 최근 제가 챙겨 본 넷플릭스 시리즈가 있는데 저는 여기에서 바로 그 애수를 강렬하게 느꼈어요.


그 작품은 <바이올렛 에버가든>이라고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CJeDetA45Q


나는, 편지로 사람의 마음을 잇는다,


각자의 소중한 사람의, 각자의 소중한 마음,


그럼에도, 나는 그것이 아직 무엇인지 모른다.



이것이 작품을 관통하는 로그라인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로그라인은 작품 소개에 이미 나와 있긴 합니다… 이것은 감정이 없는 한 소녀가 사랑을 알게 되기까지의 이야기. 라고.

전장의 인간병기였던 주인공이 자신의 상사가 유언처럼 남긴 한 마디를 이해하기 위해 타인의 마음을 전하는 대필 서비스업에 종사한다는, 어찌보면 상당히 모순적인 설정이죠. 바로 거기서 후킹 포인트가 발생하고요. 물론 이 시리즈를 ‘읽었다’라고 이야기할 생각은 아니고요…


주인공은 자신이 감정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보다는 환경이 억눌러놓았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표정이 없는 주인공이, TVA시리즈를 보다 보면 점차 옅은 미소부터 시작해서 격한 울음까지 토해놓을 정도로 감정이 풍부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경고 하나 드리자면 중반부쯤 가면 그냥 막, 뭐랄까, 펑펑 울면서 보게 되는 뭐 그런 부작용이 조금 있습니다. 초반부는 살짝 가볍고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데, 하고 감을 잡기 힘든 면도 있지만 조금만 참고 넘기시면, 그러면… 네, 이하생략.


이 시리즈를 이야기한 건 주인공이 편지 대필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해요. 편지가 품고 있는 본질적인 다정함이란 것이 있잖아요. 상대가 안녕하기를 바라며, 나의 근황을 전하며 상대의 안녕함을 묻고 또 기원하는 그런 따뜻한 매체가 또 뭐가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오늘은 서두가 굉장히 길었는데(!!!), 책… 여기 있어요.





《심호흡의 필요》, 오사다 히로시의 산문시집입니다.

네, 알아요. 필화 님이 시를 멀게 느끼시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은 꼭 한번 권하고 싶어요. 일단 과하게 함축적이지 않습니다. 그냥 줄글을 읽듯 읽다 보면 바로 그 애틋함이 행간마다 솔솔 배어 나오는 산문시예요.


이를테면,


너는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된 게 아니었다. 문득 정신이 들어 보니,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다. ‘되었다’가 아니라 ‘되어 있었다. 이상하네. 거기엔 틀림없이 경계선이 있었을 텐데,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그 경계선을 네가 언제 뛰어넘었는지, 너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9쪽


신기하다, 도토리는. 눈에 보이면, 주워 모으고 싶어진다. 주워 모으는 동안 어느새 정신없이 열중하게 된다.

도토리에는 왠지, 이제는 더 이상 떠올릴 수 없을 것 같은, 어린 기억의 감촉이 있다. 너는 말없이, 너의 잃어버린 추억의 개수를 헤아린다. 그것은 분명, 두 손 가득 주워 모은 도토리의 개수와 똑같다. -97쪽


어떤 시인지, 조금 감이 잡히시죠. 조금 다르지 않은가요.



첫머리에서 언급했던 바로 그 애수가 층층이 깃든 시이기도 하지요. 저는 여유를 갖고 돌아봐야만 보이는 이러한 낱낱의 순간들과 그 사이에 배어든 마음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애틋합니다. 그건 꼭 제가 지금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지 싶어요. 꽤 오랫동안 그런 감수성을 좋아했으니까요. 왠지 끝 편지에 그런 마음을 담아 꼭꼭 밀봉해 보내고 싶기도 했고요.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제 삶에도 한 줄의 로그라인이 있다면 그건 도대체 무엇일지. 역시 시간을 무한히 쪼갤 수 있는 기인인 걸까요(한숨). 그치만 그건 캐릭터 능력치 설명이지 로그라인이 아닌걸!(절규)



그럼, 답신 즐겁게 기다릴게요. 지난 주엔 뭐 읽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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