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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화 Mar 28. 2024

다큐와 칼럼, 에세이 사이 어딘가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담화님

안녕~ 몸은 좀 괜찮아졌는지요? 잘 회복 중이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손목도!



“목련꽃이 피어도 앉을 그늘이 없어..” 라니요.. 담화님이 말씀해 주신 《인생 책 북클럽 The Book That Matters Most》 속 주인공의 신세와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어찌 생이 그리 곤고하고 고달프답니까.. 에이바가 인생 책을 만난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반짝이는 봄빛과 따스한 온기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군요. 목련꽃을 즐길 수 있는 자리를 찾을 수 있기를..



담화님의 인생책 《독일 포로와 소녀》라는 책은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인류애는 살아 있고 인생은 이어져 가니 말입니다. 슬픔 없이 기쁨만 이야기하고, 추운 겨울 없이 봄만 이야기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눈물의 값을 모르면 웃음의 값어치를 모르겠죠.. 또르르..


제 인생책은 책장담화 시즌1에서도 꽤 많이 소개를 했지요. 보내주신 인용문처럼, 인생책은 인생의 어떤 순간에 책이 먼저 다가오는 것 같아요. 그 시기에 그 책! 그 심정에 그 이야기! 저도 인생책은 ‘내가 어떤 사람일 때(상황일 때) 어떤 책을 만나느냐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첫 인생책과 마지막 인생책만 이야기해보자면,  첫 책은 대학 시절에 읽은 기독교 세계관의 대가(?)이신 대로우 밀러의 《생각은 결과를 낳는다》 라는 책이었고 저의 가치관을 밑바탕을 만들어준 책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장 최근 인생책이라고 정해진 책은 김주혜 작가의 《작은 땅의 야수들》입니다.  그 이야기는 지난번 원고에 담았고요..



아 그나저나, 이동진 평론가님의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이 명언, 담화님도 좋아하시는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대학 시절 총장님께서 인생을 잘 살려면, vision, mission, strategy, tactic을 잘 세워서 계획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시길래 순진한 어린양과도 같았던 저는 그래야 하는 줄 알았죠? 근데 맨날 tactic 수준에서 어그러지고 무너지던 저는 인생 잘못 사는 줄 알고 허구한 날 좌절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대학 때 학교 중앙광장에 심어두었던 vision capsule을 십 년 만에 열었을 때는 진짜 어이가 없었답니다. 기대와는 전혀 다른 행보를 걷고 있었으니깐요. 그래서 매우 현실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린 두 번째 비전캡슐을 다시 정성껏 썼으나, 그것을 열어보기 전에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라는 명언을 만나서 굉장한 자유를 만끽하고는 두 번째 비전 캡슐은 새까맣고 잊고 살고 있습니다. 열기는 열었을 터인데….


담화님 말대로 30년 후의 생사를 보장할 수 없는데 비전이라니요.. 너무 거창합니다. 그저 오늘의 하루를 열심히 사는 데 최선의 에너지를 잘 쓰며 살아볼랍니다. 같이 힘내보아요… 그러기엔 우리 정말 고되긴 합니다…. A형 독감에 걸린 아들이 어제 아침에 약을 먹고선 세상이 파랗게 보인다고 했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고, 날씨가 쌀쌀해지면 애용했던 탕파(물주머니)가 밤새 터져서;; 매트리스가 물에 흠뻑 젖어 있는 걸 보았을 때는 잠이 확 깨더군요. 네, 그게 바로 오늘 새벽입니다. 우흐흐흐흐(이것은 제대로 된 웃음도, 울음도 아닌 약간의 체념과 무념무상에서 나오는 어이없음의 실소입니다.)




시즌1에서는 저의 인생책들과 제가 좋아했던 책들을 소개한 반면, 이번 책장담화 시즌2에서 제가 유난히 ‘인생'에 대한 책들을 많이 소개하는 것 같습니다. 사는 게 힘들어서일까요, 인생을 반추할 때가 되어서일까요.


이번에 소개드리고 싶은 책은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라는 재미있는 제목의 책입니다. 영국에서 꽤 오래 살았던 일본인 브래디 미카코라는 작가가 쓴 책인데, 영국의 노동계급층의 진짜 인생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요.



흔히 우리가 읽는 소설 속에서 만나는 주인공들의 인생은 흥미진진하고, 반짝이고, 슬프고, 절망하고, 희망을 보고, 용기를 내고, 그렇게 살아가죠.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주인공들에게 약간의 동정과 연민과 친근함을 담아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고 말이죠. 언젠가 담화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생존해 있다면 친구가 되고 싶은 주인공 리스트'도 생기고 말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아니 종종 이야기의 비현실성에 안도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책에서는 짠내 나는 진짜 노동자의 삶을 다큐와 칼럼, 에세이 수준의 어딘가를 오가며 적어 내려 갑니다. 그래서인지 마치 옆 동네 사는 아줌마, 아저씨의 이야기, 친구의 지인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으로 ‘응응. 어 그래서? 어떻게 됐어?’하고 고개를 주억이다가, 다음 장에서 ‘아니 이 아저씨가 앞에 나온 그 아저씨 맞아? 아이고 결국 그렇게 되었구나. 결국 이혼을 하는구나. 결국 나이 때문에 정직원이 못 되었군. 쯧쯧. 안타깝다.’하면서 읽게 되더군요.



“영국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 계급의 사랑과 긍지"라고 적힌 부재에서 보여주듯이 저자의 주변인들-베이비부머 세대-의 노동과 삶의 현장, 브렉시트와 정치 현안, 국가 재정이 건강 관리에 미치는 영향 등 아등바등한 삶의 면면을 그려냅니다.

재미있는 것은 국가 정책에 영향을 받는 노동계급층의 일상과 노동만 이야기할 것 같은 흐름에 난데없이 불청객처럼 사랑이 꽃피는 이야기가 나타나곤 합니다. 흥미롭죠. 이런 걸 보면 인생이란 참 다층적이고 복합적입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고, 불현듯 맞닥뜨린 일들로 생의 가지가 휘어지게 마련이고요.




그중에서도 재미있었던 구절을 좀 소개해볼게요.



“빌어먹을 깜둥이.”

“기다려요.”

흑인 여성이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와, 싸움 나겠는걸.’ 싶었는데 흑인 여성이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얼굴을 씻고 머리를 빗고 상담센터로 가세요.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알지요?”

그러고는 청바지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보도 위에 집어던졌다. 구걸하던 여성은 그냥 가려다가 흑인 점원의 얼굴과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번갈아 바라보며 한동안 머뭇거렸다.

(중략)

“당신 그러면 안 되지.”

그런 옳지 못한 모습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당신, 내가 모르고 한 것 같아?”

(중략)

그런 사람이 마치 개에게 먹이를 던져주듯 길거리에 동전을 던진 데는 무슨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아니면 인종차별적인 말에 대한 분노였을까?

(중략) 그 거리가 끝나는 곳까지 걸어가자 모퉁이에 있는 술집에서 낯익은 여자가 나왔다. 좀 전에 본 구걸하던 여성이다. 그 사람은 길거리에 서서 민망한 기색은 조금도 없이 진을 병째 들이켜고는 우리 옆을 지나쳐 갔다.

“리얼리티 바이츠 Reality Bites (현실은 냉혹한 법).” p.65~66




블랙캡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잘 알려진 런던의 명물 택시다. 레트로 감성의 동그란 차체와 런던 말씨로 말을 거는 운전기사. 나조차도 그랬다. 1980년대 처음으로 블랙캡을 탔을 때, “우와, 나 진짜 런던에 왔구나.”하면서 영문 모를 감동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지금은 블랙캡이 “사악한 내셔널리즘과 배외주의”의 상징으로 간주되고 있다. 배차 서비스 우버의 영국 진출이 이 사태의 발단이 되었다.

(중략)

그러니까 ‘블랙캡vs우버'의 전쟁에 작금의 화제인 ‘글로벌 경제의 뒤틀림에 의한 영국인과 이민자의 대립구도'가 알기 쉬운 형태로 현현한 것이다. 실제로 블랙캡 운전기사가 우버 운전기사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거나, 우버를 규제하라며 도로 봉쇄 운동을 할 때 영국 국기를 내걸어 ‘우익'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중략)

“그런데 우버 말이야, 작년에 런던교통공사에서 안전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영업 면허를 갱신해주지 않겠다고 결정하지 않았어?”

조금 탄 양고기를 종이접시에 받으면서 내가 말했다.

“으응, 하지만 우버가 그 결정에 항소를 했으니 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영업할 수 있어. 항소는 몇 년이나 걸리니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

테리의 친구가 그런 상황이 아주 밉살스럽다는 듯 말했다.

(중략)

진정이 없는 공방을 이어가는 두 아저씨였다. 어느덧 밤도 깊어가고 테리의 친구가 막차를 놓치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중략) 대학생인 테리의 아들이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더니 “오, 우버가 근처에 있어. 2분이면 도착한대”라고 했다.

“바보 녀석! 내가 하필 우버를 타겠느냐고.”

테리의 동료는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지만, 막차를 놓치면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에 지고 말았다. 그렇게까지 저주를 했음에도 우버택시를 타게 된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테리네 문 앞으로 온 자가용 운전석에는 머리에 히잡을 두른 운전기사가 앉아 있었다. 무슬림 여성 운전기사였다. p.85~91



이 책의 또 하나의 묘미는 바로 계획한 대로 되지 않고, 신념대로 살 수 없는 생의 아이러니함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는 거죠. 덕분에 흥미롭게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이 책은 제 인생책은 아닙니다만, 어른으로서 보다 현실의 낯빛을 잘 들여다보고 주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준 책입니다. 또 그런 생얼 같은 일상을 기록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야말로 다큐와 칼럼과 에세이의 중간 어디쯤이 될 기록이겠군요.


그나저나 초치기 마감 중인 저를 좀 용서해 주시길 바라며, 이만 줄여볼게요.

지난 한 주 동안 부지런한 우리 담화님은 어떤 책을 읽으셨을까요? 아프셨으니까 재미있는 책 읽으시면서 깔깔깔 호호호 기운을 내셨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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