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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Nov 1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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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직면하더라도 희망을 품는 법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신작,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보러 갔다. 부산 국제 영화제 최고 기대작 중 하나였고 감독의 20-30년 만의 신작이라 무척 궁금했다. 에무시네마에 가니 확실히 영화 전공 학생이 많이 온 것 같았다. 그만큼 씨네필이 필수적으로 봐야 할 영화라는 것이겠지?  에무시네마는 겨울에 가기에 최악인 곳에 있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굴복할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스페인어 원문 포스터


영화는 역시 난해했다. 액자식 구조였고 영화 속의 영화이야기, 그리고 영화 속의 영화 밖의 이야기가 있었다. 한 배우가 영화를 찍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감독은 우연히 그 배우를 30년 뒤에 요양원에서 찾는다. 그는 모든 기억을 잃었다. 그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감독은 오래전에 완성하지 못했던 영화를 상영한다. 이 단순한 이야기를 감독은 세 시간에 걸쳐 풀어낸다. 요즘 영화와 달리 생략이라는 미덕 따윈 없다. 세세한 모든 과정, 세세한 모든 대화를 다 기록한다. 그래서 호흡이 매우 긴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호흡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뤼메에르 형제로부터 시작된 ‘시네마’는 이런 느린 호흡으로 시작해 무수한 고전 영화를 탄생하게 했고 많은 좋은 영화들은 전개는 느리기 짝이 없다(고개를 들어 이탈리아 최고의 고전 자전거 도둑을 보라). 짧은 호흡은 불과 5년 사이에 생긴 개념이다. 10분짜리 유튜브 영상은 쇼츠로 바뀌더니 극강의 짧은 초를 자랑한다. 우리 뇌는 점점 망가져서 더 이상 긴 것을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와중에 영화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영화의 쇠퇴는 자명하게 예견된 일이다. 쇼츠에 비하면 영화는 지나치게 길다. 사람들은 긴 영상을 보기에 지나치게 피곤하다. 실제로 내 주변인들은 영화 보기의 고통을 토로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퇴근 후에 깊이 있는 영화를 보는 게 얼마나 피곤한지 모른다. 이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영화 산업은 쇠퇴를 거듭하고 있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의 쇠퇴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어쩌면 주인공 영화감독은 무너져가는 영화의 영광을 붙잡고 싶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영화와 관련된 것들은 모두 다 남루하고 늙었다. 영사기를 다루는 친구도, 영화를 같이 봤던 옛 연인도, 한 때는 무수한 영화가 상영되었을 영화관도 세월을 직격으로 맞아 먼지가 자욱하다. 하지만 감독은 이것들을 찾아 먼지를 걷어내고 다시 옛 영광을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사라진 배우는 사라진 영광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영화는 살아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는 배우, 그의 딸, 수녀는 마지막 장면에서 눈을 지그시 감는다. 약 두 장면 정도에서 영화는 금기를 깨고 그 속의 인물들이 관객을 빤히 바라보는데(연기에서 금지된 카메라보기) 마지막 순간에 눈을 감는다. 영화 속의 영화, 그 속의 사라졌다 돌아온 딸도 아버지의 죽음 앞에 눈을 지그시 감는다. 빤히 바라보기와 눈 감기는 명백한 대비이다. 오히려 관객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이 이야기가 가짜임을 자각한다. 하지만 감는 순간 우리는 이 이야기가 진짜 갇다고 느낀다. 진정한 진실 앞에서는 눈을 감는 법인지도 모르겠다. 마주하기 싫은 고통 혹은 마침내 알게 된 진실 앞에 우리는 눈을 감고 싶을지도…


영화는 영상이기 때문에 눈에 의존하는 매체적 특질을 가지고 있다. 만약 눈을 감는다면 영화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아도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면, 마치 영사기 없이도 영상이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영화는 매체적 특질을 극복하고 생명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 영화는 아마도 명작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모든 감독들은 눈을 감고도 영화가 살아남기를 바란다.


영화 속의 영화, 이야기 속의 이야기. 오래된 고전 천일야화에서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을 매혹시키기 좋은 플롯이다. 문제는 무엇이 진짜 이야기인가 하는 점이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진짜인가? 이야기 밖이 진짜인가. 어쩌면 이 영화에서도 딸을 찾는 유대인의 이야기가 메인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부차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두 이야기에서 모두 순간 몰입을 깨버리는 카메라 바라보기를 시도하기 때문에 어는 것 하나 메인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특징이 있다.


중요한 것은 두  이야기 모두 무언가를 잃었다는 것이다. 감독이 말하고 싶은 지점은 이것이다. 무언가를 잃었을 때 진짜 모습이 나온다. 영화를 잃고 20년을 살아왔지만 다시 영화를 찾는 남자, 딸을 잃었지만 20년을 그리워하다가 다시 찾는 유대인. 그들 모두 한동안은 찾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삶을 살지만 공허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빅토르 에리세 자신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지점이 그 역시 매우 긴 텀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쇠퇴하고, 죽어가고 점점 아득해져 가지만 영화감독은 늙어서도 잃어버린 핏줄을 찾듯 영화를 찾고 있다.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열망만큼 가슴 아픈 것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세월만을 가슴 아파하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희망을 담고 있다. 사라져 버린 것들은 돌아오기 시작했다. 완전히 돌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영화배우는 기억과 감정을 되찾은 듯 황홀하게 영화를 보고 있다.


그는 계속 네모 프레임 안에 갇혀 있는데(창문, 축구 골문, 큰 대문 등) 그 네모들로부터 나온 순간이 영화 밖에서 영화를 볼 때이다. 어쩌면 영화배우의 실종은 영화 속에 계속 머물고 싶은, 네모 프레임 안에서 계속 있고 싶었던 한 인간의 절규였는지 모르겠다. 그는 여럿 여자를 만나는 바람둥이였다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그의 방황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예시이기도 하다. 어딘가 권태롭고 공허한 삶, 정착 없는 기분 모든 것을 안고 과거의 영광 속에 그대로 묻히고 싶어서 현실 밖에 나오지 않기를 고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그는 프레임 안으로 사라졌지만 비로소 프레임 밖에서 자신을 바라볼 때 현실 세상으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옛 영광으로 사라질 뻔한 것은 구출되어 현실 속으로 던져진다. 직면…. 직면하는 것만큼 거대한 용기가 있을까? 영화는 사라져 버리기 대신 세월을 받아들이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것이야말로 빅토르 에리세가 말하고 싶었던 지점이 아닐까 싶다.


좋은 영화는 은유가 많다. 그것은 미장센이기도 하고 인물로 표현되기도 한다. 여러 이야기와 해석의 담론을 끊임없지 재생산할 수 있다면 눈을 감아도 생명을 얻는 영화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꼭 그런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탁월한 영화적 기법, 이야기의 능숙함, 눈을 잡아끄는 과감한 연출 같은 건 없었지만 그래서 더 원래 영화다웠고 옛 영화에 대한 사랑을 담기에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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