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는 목격자이다.
글을 쓰는 작업이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건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완벽성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함부로 쓰지 못하겠다. 오히려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전 끄적였던 글이 더 야성적이고 진솔하다는 생각도 한다.
글은 지금 어떤 지점에서 커다란 벽에 막혀있다. '벽에 막혀있다'라는 표현을 말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한다. ‘벽에 막혀있다’라는 기가 막힌 표현은 누가 먼저 쓴 거지? 나는 왜 이 창의적인 표현을 다시 쓰는 구차한 글만 쓰고 있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글은 글을 낳고 결국 지웠다 썼다는 반복적으로 행해진다. 솔직히 말하면 글을 방해하는 건 다른 것도 아니고 소설이다. 많은 양을 읽기 시작하면서 소설의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너무나도 대단한 소설이 많아서 이 소설을 읽으면 이 소설대로 저 소설을 읽으면 저 소설대로 써야만 할 것 같다.
대단한 걸 쓰고 싶은 건 아닌데 만족할만한 양과 질의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이 이렇게 큰 바람이라니!
처음 썼던 글이 지금 쓰는 글 보다 나아 보이는 왜일까? 분명 더 생각하고 배웠는데 처음이 더 나아 보인다. 감정이 더 살아있고 문단은 복잡하지 않다. 다만 설명적이다. 설명적인 게 싫어서 다시 쓰기를 결정한 건데 이제는 감정이 살아있지 않다.
쓰고 또 쓰고. 단지 답답할 뿐, 재미가 없지 않다. 그나마 다행.
요즘은 특히 한 작가의 소설을 읽고 자신감을 얻었다. 심상을 설명하는 행위가 사건 중심적이지 않기 때문에 스토리를 해친다고 생각했는데 심정을 세세하게 밝히고 다소 사건이 적은 소설이라도 충분히 매력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소설이 무엇일지는 온라인 책방 ‘마포구립도서광(인스타그램)’에 올릴 예정. 참고로 이 작가의 소설을 한 권 읽고 모든 번역서를 다 사모았다. 중고책까지 포함되어서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감행할 수 있었던 건 뒤라스만큼이나 운명적인 느낌의 작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뒤라스의 글도 읽고 있다. 뒤라스의 ‘여름비.’ 어떤 감상을 불러일으키고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는 여전히 탁월한 작가이다. 이미지가 그려지고 마음속 아픔이 서려지는 작업이 읽기 과정에서 계속되고 있다. 얼른 가서 나머지 부분을 읽고 싶다.
마음 속에 파묻힌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그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내게는 도구와 시간이 부족하다. 끊임없이 이것들을 화석을 발굴하듯 끈기를 갖고 발굴해내야 하는데 그 지점도 상당히 부족한 역량 중 하나이다. 끈기와 확신. 이 두 개만 있어도 글 쓰는 사람이 될 수 있다.
한 가지 이야기를 쓰면서 계속해서 여러 이야기를 써나갔다. 그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는 이야기들이었으며 나는 목격자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한 가지 이야기를 제대로 쓰지 않고는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다. 그것 역시 운명의 일부분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시놉시스를 읽고 매력 있는 이야기라며 확신을 줬고 나 역시 제대로 쓰고 싶은데 딱 제대로 쓰고 싶은 만큼 제대로 써지지 않는다. 마음의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현상의 목격자가 되어야만 한다.
소설가는 결코 창작자가 아니다. 사건의 목격자이다. 다시 한번 되내어 본다. 사건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다시 이것을 목격할 것인가? 차원과 세세한 연결이 필요한 때이다.
여전히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은 소설가지망생이자 소설가 호소인이다. 예술이라는 작업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이상 무근본 상태에 놓여 이것을 ‘업’이라 부르기 다소 민망한 느낌을 주는데 이 글을 쓰면서도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어 굉장히 민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