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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지언니 Mar 27. 2020

우리가 사랑한 도시의 심장부

쇼핑몰에 숨겨둔 도시 이론


파리에 사는 친구가 보내준 텅 빈 오페라 거리의 사진을 보니 믿을 수가 없어요. 흥분과 열정에 사로잡혀 쏘다니던 시끌벅적한 길과 카페 광장이 텅 비었다니..... 우리는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도시 공간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하나 더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집을 나서야 한다면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공간을 피하고 물리적인 거리를 둘 수 있는 공간을 찾아가는 것이죠.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가혹하게도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먹고 마시고 무엇인가 사는 쇼핑이 있는 공간에 거리를 두어야 하나 고민이 시작되죠. 꼭 쇼핑몰을 꼬집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역사적인 도심의 거리뿐만 아니라 박물관, 교회, 공항, 병원, 대학교, 심지어 군대까지.... 쇼핑은 접착제처럼 자유롭게 침투해 여러 시설들을 연결하며 도시의 모든 공간에 스며 있으니까요. 도시와 건축은 쇼핑의 메커니즘에 의해 조직화되었다고 말해도 과장은 아닌 같습니다. 이번에는 도시의 삶에서 뗄 수 없는 쇼핑 공간은 어떤 생각으로 처음 만들어졌으며, 어떤 지적 혈통을 가지고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몇 가지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오스트리아 건축가
빅터 그루엔(Victor Gruen)
최초의 쇼핑몰 개념에 숨겨진 도시 이론



미국에 쇼핑몰이 처음 등장할 무렵에는 소비 자본주의가 낳은 추악한 의붓자식이라는 악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쇼핑몰은 2차 대전 후 등장한 교외 거주지의 황폐함을 극복하고 교외 지역의 활성화의 대책 중에 하나로 오스트리아 건축가 빅터 그루엔(Victor Gruen)에 의해 탄생되었지요.


비엔나 출신 빅터 그루엔



그는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비엔나에서 태어났어요. 그는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서 사회주의자 도시계획가들 아래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밤에는 카바레에서 공연을 했다고 해요. 그는 비엔나의 번화가에서 상점을 설계하는 사무소를 운영하며, 그 또한 대규모 공영 거주단지를 설계하고 "민중(인민)의 궁정"이라 불렀습니다. 수많은 좌익 성향의 유대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루엔도 나치가 유럽 전역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자 미국으로 도피했어요. 그는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미국으로 건너왔어요.  후 1939년 무렵 맨해튼에서 극단과 공연을 하게 되면서 5번가에 들어설 부티크를 설계하는 기회를 얻었고요.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상점을 설계했는데, (출입구 옆쪽에 전면이 거대한 유리로 된 진열대를 만들어, 상품을 진열하는 개방식 상점) 소비자와 상인들은 열광했지만 비평가들은 못마땅해했습니다. 혁신적인 디자인이 기득권 세력에 환영을 못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대문사진 비엔나 그라덴 거리.... 그루엔도 사랑하는 거리가 아니었을까...



미국 교외 지역 허허벌판에
유럽의 대도시 같은 가치를 심겠다는
나름의 구상



그 이후에 그는 집은 '거주용 기계'라는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의 유명한 말을 따라, 그루엔은 자신이 설계한 상점을 '상거래용 기계'라고 부르며 미국 전역에서 수십 차례 백화점을 설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질서한 공간이 풍기는 소란스럽고 천박한 상업주의를 혐오하고, 또 미국의 교외 문화를 경멸하는 세련된 유럽인의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참 이중적인 태도인데 왜냐면 방만한 자본주의가 낳은 추악함을 경멸하는 사회주의자이었지만 결국은 백화점 설계해 먹고 산 셈이니까요.


여하튼,  그루엔은 복잡한 인물로 그는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이며 인테리어 장식가이기도 했죠.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 그루엔은 여러 상점과 다양한 용도의 공공장소가 한데 어울린, 보다 야심 찬 설계를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디트로이트 외곽에 노스랜드 센터라는 개방형 쇼핑 플라자를 설계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죠. 그러나 그루엔이 사우스 데일 센터를 완성한 해는 1956년으로  바로 이전 건물이 그가 설계한 건물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보기에 따라 가장 악명 높은 건물이었지요. 그루엔은 미니애폴리스 지역의 혹한을 차단하기 위해서 지붕을 덮은 중앙 안뜰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상점들이 늘어서고 양쪽 끝에 설치한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된 이층 구조로 설계했어요. 19세기 초 비엔나를 비롯한 유럽 도시에서 유행했던 상가 건물을 본뜬 설계였지요.


사우스 데일 센터의 '영혼이 샘솟는 정원'이라고 불리는 널찍한 중정


그루엔이 설계한 사우스 데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시대에, 단일 건물로는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비록 유럽 특유의 도시적인 세련미는 잘 보이지 않지만요. 미네소타의 혹독한 겨울 날씨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든 중정은, 에어컨이 발명되면서 사막이나 열대 지역에 건설되는 쇼핑몰에도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규모면에서 세계 10대 쇼핑몰을 모두 미국과 유럽이 아니라, 중국, 필리핀, 이란, 태국 등과 같은 열대나 사막지역에 위치한다고 하니까요. 이는 그루엔이 설계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며, 중정을 중심으로 상점이 늘어선 2~3층 건물로, 각 층은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되는 구조로 말입니다.


그루엔의 쇼핑몰 구조를 가장 세련되게 이어가는 곳 중에 하나는 스타필드가 아닐까...


그러나 막대한 성공을 거둔 듯 보이는 그루엔의 설계 이면에는 비극적인 모순이 숨어 있다고 합니다. 왜냐면 그루엔이 진정으로 꿈꾼 설계는 거주용 아파트와 학교, 의료시설, 야외공연, 사무용 건물들로 구성된, 보행자를 중심으로 한 밀집된 다용도 도심 공간이었으니까요.  단일 백화점 설계를 넘어 최초의 몰을 설계하면서 품은 그의 야심이었던 셈이랄까요. 훗날 그는 이 새로운 도시에 대한 비전을 일련의 설계보고서, 연설문, 에세이를 통해 펼쳐 보였고, 결국 "우리가 사는 도시의 심장부"라는 책으로 집대성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쇼핑몰에 중정과 보행자의 편의에 중점을 둔 설계는, 그루엔이 미개한 미국 교외 지역의 허허벌판에 유럽의 대도시 같은 가치를 심겠다는 나름의 구상을 담은 셈이죠. 이는 요즘 신도시 콘셉트로 자주 거론되는 일과 삶 문화와 여가를 한 동네에서 누리는 걷기 좋은 자족형 도시를 만들겠다는 생각과도 맞닿아 있는 생각이랄까요.



쇼핑몰=도시 이론?



쇼핑 건축은 빅터 그루엔과 다니엘 번햄, 존 저디에 의해 발전했지만 이 세 사람은 처음부터 쇼핑몰 설계로 유명해지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도시에 필요한 공공공간과 보행자 중심의 도시계획을 쇼핑몰 개념에 접목하며 쇼핑을 강조하지 않고 순수한 도시 이론으로 보이게 하면서 주목을 끌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상업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느껴져 그 당시 건축계에서 외면받았던 쇼핑몰에 도시 개념을 도입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았고 그런 쇼핑몰이 미국과 전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된 셈이라 할 수 있지. 그들이 만든 상업주의적 쇼핑몰은 사실 도시를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고, 자동차로부터 다운타운을 지키기 위함이었으며, 도시 속 어드벤처와 마법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으로 재평가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쇼핑몰 같은 상업건축은 하나의 건물로 해석되기보다 도시적 해석이 요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요.



일산 벨라 시타는 이탈리아 베로나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거리를 디자인 모티브로 한 "광장형 라이프스타일 쇼핑센터"


광교 엘리 웨이는 ‘호숫가 마을 페스티벌의 하루’라는 상환경 콘셉트로 열려있는 광장과 골목길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는 곳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공간은 무엇?



상업시설 콘셉팅을 위한 기초적인 생각 중 하나는 상업시설은 도시적 결핍을 해결하는 장소가 되어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유독 카페가 많은 것은 무료로 즐길 수 있는 광장 같은 도시 공간이 적다고 어느 유명 건축가가 이야기하기도 했는데요.  상업시설은 도시의 공공재가 되어 가장 공적인 공간이 되어야 하며, 도시적 해석도 뛰어나야 하지만 사용자들이 원하는 취향과 니즈를 공간적으로 재치있게 담아야 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상환경 콘셉트로 특정 공간을 모티브로 잡기도 하고 살짝 키치스러운 익살스러운 공간도 생겨나지만 건축가는 이런 공간에 관대해야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본질은 결핍된 도시의 공간을 상업시설에 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교외 지역에 주거와 분리되어 고립된 상업시설보다는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갈 수 있는 집 근처 생활 인프라 같은 일상적인 공간의 행렬이 상업시설이 되어야 하겠지요.



위에 그림은 우리의 DNA를 타고 내려오는 도시를 경험하는 공공공간의 기본적인 것을 나열해 본 것입니다. 트리플 스트리트, 센트럴 플라자, 타임스퀘어, 북파크, 가든 파이브..... 흔히 듣는 상업시설에 붙여진 이름 참 많지. 새로운 상업시설이 들어서야 한다면 그 동네를 잘 분석해보면 동네 주민에게 필요한 도시 공간이 보입니다. 그럼 그런 공간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기획하고, 이렇게 이름만 붙이는 것이 아니라 상업공간을 어떻게 입체적으로 특색 있게 디자인해야는지 많은 고민이 필요하죠. 이렇듯, 도시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은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이 아주 기초적인 콘셉팅의 한 단계가 아닐까 해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도시 공간을 만들어, 지역경제가 살아나고 그로 인해 도시가 조금 더 나아지는 선순환적인 영향력은 상업시설에도 충분히 잠재해 있습니다. 공간을 내어주어 당장은 돈이 안 되는 생각들이 결국은 재무적인 성과를 가져오더라 하는 구체적이고 훈훈한 사례들이 많이 생겨나길 바랄 뿐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도시의 곳곳에 말입니다.




*참고

원더랜드 / 스티븐 존슨 지음 , 홍지수 옮김

Guide to shopping / 하버드 대학 디자인 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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