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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 Sep 02. 2019

파리에서 '샹송 떼창' 할래요?

프랑스




파리에서 샹송을 듣는 건 이제 불가능해 보였다. 트립 어드바이저를 돌리면 "누가 그런 구닥다리 여태 듣기나 할까"는 듯 '에펠탑 줄 안서기' '루브르 새치기' 같은 영악한 티켓만 떠다녔다. 호텔 리셉션 엠마(Emma)에게 "근처에 샹송 카바레 없느냐"고 물었더니 리프렛을 하나 집어 줬다.


빨간 풍차로 유명한 믈랭루즈. 120유로를 내고 2시간짜리 캉캉쇼를 보다보면 중간에 샹송을 부른다고 했다. "이것 말고" 했더니 비스트로(bistro)가 있단다. 파리에서 비스트로는 레스토랑보다 격이 처지는 식당이다. 생 뚜앙 벼룩시장에 있는 '쉐 루이제트'(Chez Louisette). 밥 먹는 동안 샹송 가수가 나와 두 곡 부르고 테이블을 돌며 팁을 걷는다고 했다.



몽마르트 언덕 아래 믈랭루즈와 생뚜앙 벼룩시장에 있는 비스트로, 쉐 루이제트


나는 뭐랄까. 샹소니에(chansonnier)가 부르는 올드한 샹송이 듣고 싶었다. 프랑스 대신 불란서 말이 익숙하던 시절, 내게도 숨죽여 듣던 샹송 몇 곡이 있었다. 이브 몽탕이 애매하게 얼버무리던 저음. 알랭 들롱이 목덜미를 내준 고양이처럼 "가르릉" 대던 후렴. 디트 피아프가 대에 백열전구 필라멘트  파르르 끝을 떨던 노래가 바 그들이었다. 여행 엄습하 충동은 막무가내여서 나는 다급해졌다. 구글을 마구 뒤진 끝에 라팽아질을 찾다. 엠마는 "여긴 나도 첨이야"하며 는 길을 알려줬다.



라팽아질 소개 동영상(http://au-lapin-agile.com)


라팽아질. 몽마르트에서 살아남은 래된 샹송 카바레. '재빠른(agile) 토끼(lapin)'라는 간판이 호기심을 부추겼다. 메트로를 탔다. 라마르크 꼴랭쿠흐(Lamarck Caulaincourt) 역에서 내려 테르트르 광장으로 300미터 올라가면 뱅상 묘지(Cimetiere St. Vincent)와 몽마르트 포도밭(Vignes du Clos Monmartre)이 만다. 쏠르(Saules) 거리 22번지. 우디 앨런의 영화처럼 낡은 2층 집 라팽아질이 나타났다.


10분 전 아홉 시. 어둑어둑해지는 문 앞에 딱 두 명이 먼저 있었다. 월요일만 다고 들었는데. 막상 굳게 닫힌 입구를 마주하니 '오늘 밤도 여는게 맞나?' 하는 의심이 슬며시 들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 걱정하지 말라며 건장한 두 사람이 출현했다.


흰 머리에 붉은 스카프를 맨 노익장과 가죽 잠바를 입은 젊은 사내. 은발 노인은, 나중에 알았지만, 왕년의 샹송 가수 이브 마티유(Yves Mathieu)였다. 1972년부터 카바레를 인수해 아들과 함께 운영한다는 이곳 주인장이 틀림없는 듯. 여든을 훌쩍 넘겼어도 검은 재킷에 스카프로 멋을 낸다더니 영락없이 같은 차림새였다.



라팽아질은 화요일부터 일요일 밤9시-새벽1시까지 영업한다. 월요일 휴무. 홈페이지에서 이름과 연락처를 넣어 예약한다. 입장료28유로에 체리 주 한잔이 포함됐다.


그새 내 뒤로 줄이 불었다. 아래쪽 메트로 역에서 또 위쪽 테르트르 광장에서 사람들이 잇달아 출몰했다. 문을 들어서자 아까 그 젊은 사내가 "꼬망부자 뿔레부?"(이름이 뭐죠?)하고 쳐다봤다. 나는 내 맘대로 그가 이브 마티유의 아들이라고 단정했다.


사내는 손에 든 예약자 명단에서 꾸불꾸불 쓰인 내 이름을 찾아 연필로 쭉 가로선을 그었다. 파리를 '빠흐리'라고 발음하는 억양에 몽마르트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이브 마티유가 따라오라며 턱짓을 했다. 발걸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걸어 2층으로 올라갔다.


서른 평이나 될까. 홀에는 6인용 나무 탁자가 드문드문 놓여 있었다. 맞은편 구석으로 안내된 우리는 박쥐처럼 어깨를 접어 촘촘 앉았다. 나중엔 통로에도 의자를 놓아 늦게 온 사람 마저 았다. 마치 놀이방 아이들이 선생님을 바라보며 옹기종기 앉은 꼴이었다. 어림잡아 60-70 명이 홀을 채우는 동안 벽난로 옆 피아노가 쉴 새 없이 웅웅 거렸다. 늙은 연주자의 손길에 맞춰 피아노 위에 올려진 인형이 고개를 연신 까딱거렸다. 오래된 피아노는 페달에 기름칠이 덜 된 듯 밟을 때마다 끽끽 소리를 냈다. 그것조차 자연스러웠다.


 

창문이 없는 2층. 벽엔 이곳을 드나들던 예술가들이 잔뜩 걸려있다. 마이크 없이 피아노와 육성으로 노래한다. 이브 마티유는 어느덧 아흔에 가깝다.


'빠흐리' 사내가 나타났다. 어느새 그는 웨이터로 변신했다. 나무 쟁반에 술잔을 가득 담아 오른쪽 어깨 위로 들고, 사람 사이를 용케도 비집고 다니며 한 잔씩 나눠줬다. 입장료에 포함된 전통 체리 주였다.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잔에 담긴 체리 주는 1800년대 보들레르가 사랑에 빠져 쓴 한 자락 싯구였다.


술은 아이티 애인처럼 새까맣고 악마의 피보다 진했다. 맛은 천사같이 순수하며 연하의 키스만큼 달콤했다. 사람들은 무심코 한입에 툭 털어 넣고는 순식간에 올라오는 독기에 휘잇 진저리를 쳤다. 나는 옆자리 여인이 양보한 몫까지 두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그리곤 입안에 남은 체리를 이리저리 오물거렸다. 씨도 없었다. 눈꺼풀이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풀려가는 내 눈엔 모든 사람이 샹송에 취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착착 진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피아노 연주자가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시작이었다. 달짝지근한 공기 순환이 스위치를 끈 듯 멈췄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일제히 멎 그 공백을 피아노가 여지없이 파고들었다.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었다. 날랜 손가락이 건반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되돌아 온 손끝이 살짝 느려진 순간 옆에 선 이브 마티유가 눈짓을 했다.



1881년부터 15년 동안 카바레 '샤 누아르'(검은 고양이)가 최고 인기였다. '라팽아질'은 오늘 밤도 문을 열어 살아남은 가장 오랜 카바레가 되었다.

                                                                                                                                                                 

피아노 뒤에 앉은 사람 하나가 벌떡 일어나 입을 열었다. 무대가 따로 없어 그녀가 관객인지 가수인지 헷갈렸다. 다들 어리둥절하는데 그녀가 짝짝 손뼉을 쳤다. 그러자 같은 자리에 앉은 일행 여섯 명이 동시에 큰 소리로 다음 부분을 따라 불렀다. 깜짝 놀랐다. 손님처럼 탁자를 차지하고 수다를 떨던 그들이 바로 1부 공연을 책임지는 전문 가수, '샹소니에' 였다.


노랫말이 <동물 농장> 같은 건지 개 짖는 소리를 내다가, 홰치는 암탉을 흉내 내다가, 갑자기 상대방 뺨을 후려쳤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탁자를 두드리며 좋아했다. 노래는 '권주가'(Les Chevaliers de la Table Ronde) 또는 '날 아프게 해 줘, 죠니'(Fais-Moi Mal Johnny) 같은 길거리 샹송이었다.


다음 노래가 이어졌다. 몇몇은 발을 굴러 박자를 맞췄다. 여기저기킬킬 웃는 소리나 헙헙 거리는 호흡, 또 뜬금없는 탄성이 악보에 있 것처럼 잘도 들어맞았다. 나는 샹송이 흐르는 강물 속으로 혼자 첨벙 뛰어든 꼴이었다. 강물은 따뜻했다. 꿈결 같았다. 허우적거리며 떠내려가다 문득 바닥에 발이 닿은 듯하여 눈을 떴다. '오 샹젤리제'(Les Champs Élysées)를 합창하는 중이었다. 겨우 몇 마디를 따라 부르다 말았다. 그렇게 1부가 끝났다.



피카소 <라팽아질에서, 1905>. 그는 19세에 바르셀로나를 떠나 파리, 몽마르트 언덕 아래 친구 막스 자콥과 함께 살았다. 페시미즘에 허덕이던 '청색 시대' 후기 작품이다


불이 켜졌다. 우르르 사람들이 일어났다. 일부는 화장실을 가고 일부는 떠났다. 메트로가 새벽 1시 반까지 다니므로 나는 더 버텨 볼 작정이었다. 밝아진 내부를 둘러보았다. 피카소가 1905년 그렸다는 그림, <라팽아질에서, At the Lapin Agile>가 벽에 걸려 있었다. "저 그림을 20달러에 넘겼다지" 누군가 수군거렸다.


옆자리 그녀는 부다페스트에서 온 도리나(Dorina)라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찌라시 읽었다. 이곳은 올 해로 문 연지 260년이 되었다. 1759년에 가난한 예술가, 창녀, 뚜쟁이가 드나드는 카바레로 시작했다. 카바레는 포도주 창고 또는 선술집이란 뜻이다. 처음엔 여기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빗대어 '암살자의 카바레'(Cabaret des Assassins)라고 불렀다.


1869년 화가 앙드레 질(Andre Gill)이 '와인을 훔쳐 냄비에서 도망치는 토끼'를 그려줬다. 밀린 술값 대신이었다. 이곳 시그니처 메뉴가 토끼고기 요리였다고 한다. 주인장은 토끼 그림을 건물 바깥벽 간판 거는 곳에 내걸었다. 그때부터 이곳은 '질의 토끼'(Lapin a Gill)라 불리다가 나중에 '재빠른 토끼'(Lapin Agile)로 바뀌었다. 여기까지 읽었는데 조명이 탁 하고 꺼졌다.  



라팽아질 그림이 바깥 벽에 걸려있다. 그림을 향해 조명을 겨냥해 놓아 낮보다 밤에 더 잘 보인다. 노래 소리는 밤마다 몽마르트 포도밭과 생뱅상 묘지를 떠돈다.


2부가 시작되었다. 완벽한 '미드나잇 인 파리'. 나는 샹송의 소용돌이로 다시 내동댕이 쳐졌다. 위험한 수렁이었다. 많은 사람이 떠난 후라 나머지 관객은 살아남은 전우가 된 느낌이었다. 눈빛만으로 의기투합했다. 어깨동무라도 할뻔했다. 첫 곡은 이브 마티유. 노련한 중저음과 여자 가수의 하이톤이 어울려 마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보는 듯했다. 박수가 천장에 닿았다.


샹송(Chanson)은 노래 라는 뜻이다. 11세기 음유시인이 십자군기사 이야기나 세속적인 사랑을 노래한 게 시작이었다. 프랑스 노래라고 해서 다 샹송이라 부르진 않는다. 요즘은 그냥 프렌치 팝이라 한다. 우리가 아는 샹송은 거의 1950년대 노래다. 이야기하듯 부르는 곡조, 서사가 있는 노랫말 특징이다. 샹송이 가진 으뜸 매력은 당연코 듣는 재미다. 우유 거품이 가득한 카푸치노가 목울대를 넘어가는 느낌이랄까.


'노래하는 작은 새' 에디트 피아프를 빼고 샹송을 얘기하긴 어렵다. 서커스단 남자와 유랑 가수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사창가 할머니 손에 자랐다. 아홉 살 때부터 노래 부르며 구걸을 시작해 열다섯 살에 보조 가수로 데뷔했다. 나는 그녀의 노래 중 "농- 쥬느 흐그래트 히앙"이라고 시작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를 제일 좋아한다. 10대 출산, 아이의 죽음, 사랑과 배신, 연인이 탄 비행기 추락, 다섯 번의 교통사고,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약물 중독. 이 거친 행로의 어느 처마 밑에서 '인생을 후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라고 그녀는 고백한다. 비바람에도 스러지지 않는 들꽃이었다. 마침 피아노 전주가 시작되었다.



에디트 피아프는 작은 키, 무거운 듯 기운 머리, 이야기를 품은 눈, 누군가를 껴안으려는 두 팔, 상처입은 사람이 내는 목소리를 가졌다. 아말리아가 꼭 그랬다.


에디트 피아프를 닮은 자그마한 몸집의 여자 가수, 아말리아(Amalia) 순서였다. 긴장한 그녀가 스커트를 움켜쥐었다. 시간은 벌써 열두 시. 더 있다간 날밤을 새우지 싶었다. 누가 세컨드 오더를 넣었는지 '빠흐리' 사내가 65도짜리 독주 압생트를 들고 나타났다. 다 같이 마시고 버티자는 듯이었다. 도리나가 괴성을 질렀다. 이때다. 나는 소란한 틈을 타 슬쩍 자리를 빠져나왔다. 나무 계단에서 이브 마티유와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아. 전우들은 각자 살아남을 거야" 하는 눈빛으로 길을 터줬다.


아래층 카운터에서 지갑을 여는데 노래가 새어 나왔다.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다 대가를 치렀고, 떠내려 보냈고 잊어버렸어요. 과거는 신경 쓰지 않아요." 오늘은 가사를 아는 게 외려 고통스러웠다. 하필 아말리아는 에디트 피아프처럼 끝이 갈라지는 목청을 가졌다. 허공을 때리는 밧줄같은 목소리. 근원 없는 슬픔이랄까. 까닭 모를 후회가 치밀었다. 마시지도 않은 압생트가 훅 올라왔다. 나는 허둥지둥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호텔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갈아탈 8번 메트로를 기다리느라 마들렌 (Madeleine) 역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비틀거리는 취객이 내게 말을 붙인 듯했다. 동료가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철로에는 조간신문 '르 피가로'가 열차가 일으킨 바람에 춤을 췄다. 털이 젖은 시궁쥐가 대각선으로 달아났다.



머물던 '호텔 에펠켄싱턴'에서 라팽아질로 갈려면 에콜 밀리테르 역에서 8번 메트로를 타고 마들렌 역에서 17번 메트로를 갈아타야 한다. 돌아올 때도 메트로를 타는 게 제일 낫다.


메트로가 씩씩대며 멈춰 섰다. 막차였다. 나는 철컥 문을 열었다. 파리 지하철은 출입문 손잡이를 돌려줘야 한다. 열차가 출발했다. 끽끽 피아노 페달 소리가 났다. 취객과 동료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이브 마티유가 부르는 샹송처럼 들렸다. 체리 주가 독하긴 독했다. 에콜 밀리테르(Ecole Militaire) 역에 내렸다. 엠마가 졸린 눈으로 호텔 문을 열어줬다. 그날 밤은 아마도 세상의 모든 생물이 쉽게 잠들지 못했으리라.


가을이다. 도시와 산맥과 바다를 가로질러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사진을 정리하다 라팽아질이 눈에 밟혔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여행 중에 손끝이 저리고 마음이 아득해지면 참 당혹스럽다. 긴 여행의 끝은 제법 쓸쓸하여 고독이 불쑥 찾아오기 쉽상이다. 나는 여행을 준비할 때는 누구보다 행복해하다가 막상 여행을 떠나서는 무기력해지곤 한다. 또다른 나를 발견한다거나 자아를 찾는 일 따위는 없다. 불안과 고독도 내 글의 부사와 형용사가 될 것이라 믿기에 다른 언어를 쓰는 타인을 만나고, 반대로 타는 운전석에 몸을 구겨 넣는다. 깊숙이 가라앉아 바닥까지 닿았다가 수면으로 올라오며 나는 조금씩 되살아난다. 마침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무표정한 자연과 속 모를 이방인. 나는 그제야 안도한다.


파리에선 라팽아질이 내 손을 잡아줬다. 체리 주 한 잔에 엄습했던 불안이 달아났다. 라팽아질은 지친 여행자가 투우장 황소처럼 숨을 고르는 곳. 헤밍웨이가 말한 '케렌시아'(Querencia), 회복의 장소다. 이브 마티유가 "괜찮아" 하는 눈빛으로 끄덕이던 고갯짓. 가을 고등어처럼 반짝이던 아말리야. '살아남은 전우' 여행을 계속하라며 북돋워 주던 용기. 라팽아질에서의 그 말이 함성처럼 다시 들렸다. "우리 샹송 떼창할래요?"













posted by 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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