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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움직인 영화, 나를 증명한 이야기

문화로 나의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시간 6

by 장효진

여성들은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고 가정을 꾸리는 일을 주로 담당하다보니 자기 주체성이나 자유의 영역에서 소외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선거권에서 흑인의 참정권은 1970년부터 공식적으로 보장되었는데, 여성의 참정권은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920년에나 가능하게 되었다. 그마저도 흑인 여성의 참정권은 물음표였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1948년 처음으로 참정권이 생겼다.


여성이 자신의 투표권으로 사회적 의사 표현이 가능해진 것이 고작 100년 남짓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거시적인 관점에서 여성의 자유와 여성의 사회적 활동에 대한 변화가 남성의 변화에 비해 컸으며 그런 도전과 실패나 적응기가 많이 두드러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미시적 관점에서 우리는 개개인으로서 사회정치경제적 여러 큰 사건을 겪고 서로 다른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서사를 살아왔다.


그렇다고 우리는 엄마로서 가족관계와 가사에 대한 관심과 헌신을 놓지 않는다. 다행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서비스나 도구가 많이 발전하였고 그만큼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가사일은 많은 부분 위탁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더이상 엄마에게 아이의 '입신'과 남편의 '양명'만이 최선의 역할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입신양명을 하기 위한 열정과 도전이 가능하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동안의 신체적 제약은 어쩔 수 없겠으나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기회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엄마들은 아이의 육아와 가계의 관리, 가정의 화목만큼이나 자기 스스로의 자존감과 사회적 커리어에 관심을 가지고 현재를 가꾸는데 관심이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속에 우리 자체의 모습을 당당히 선보일 수 있을까. 나는 영화 속에서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또 같은 모습이기도 한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보면서 나의 미래의 이미지를 그려보기도 한다.


영화 〈히든 피겨스〉와 〈에린 브로코비치〉는 모두 실화 기반의 영화라 더 의지를 북돋는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각기 다른 조건과 환경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모두가 자신을 증명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두 영화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즉 여성의 정체성을 한계로 두지 않고 공동체와 사회를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원하는 것을 이루어가는 태도와 깊이 닮아 있다.


〈히든 피겨스〉의 캐서린 존슨은 NASA엔지니어로서 수학이라는 언어로 세상을 바꾼다.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건물 안에서조차 마음껏 다닐 수 없고 같은 팀의 회의에도 참여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정확한 계산능력과 문제를 도출하고 위기의 순간에 그것을 해결하는 냉철한 실력으로 존재를 증명했다. 그녀가 가진 힘은 학문과 기술이라는 전문성에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력했던 것은 차별 앞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고 끝내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낸 단단함이었다. 그녀는 ‘전문가’였지만 결코 기존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았고 그 시스템 자체를 자신의 존재로 흔들었다.


히든피겨스.jpg 흑인 전용 화장실의 팻말을 없애버리는 상징적인 장면


반면 〈에린 브로코비치〉는 전혀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한다. 세 아이를 홀로 키우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고졸 이혼녀인 에린은 법적 자격도 전문 지식도 갖추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보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책이 아닌 삶으로 배운 진실을 무기로 거대기업과 싸웠고, 결국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환경 피해 보상 합의를 이끌어냈다. 에린의 방식은 시스템 바깥의 무언가를 알아채고 그것을 소통으로 실현해 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자격이 없다는 사회적 편견을 정면으로 깨뜨리며 자신만의 자격을 만들어냈다.


캐서린이 탁월한 수학이라는 구조적 언어로 증명했다면, 에린은 경험이라는 수렴적인 생활의 언어로 능력을 증명했다. 캐서린은 시스템 안에서 편견의 벽을 허물었고 에린은 시스템 밖에서 거대 기업의 탑에 균열을 만들었다. 둘의 방식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누구도 대신 증명해주지 않는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의 힘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두 사람 모두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없이 무시당했고 말하지 못하게 가로막혔으며 자격 없다고 평가절하되었지만 결국은 모두가 그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성과가 역사적으로도 큰 사건이 될 만큼의 역할이었다는 것이 가슴 벅차기도 하다.


나는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며 한 가지를 더 분명히 믿게 되었다. 여성은 정체성에 갇히는 존재가 아니라, 정체성 너머로 자신을 확장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완벽함이나 자격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도권을 쥐고 증명하려는 의지와 움직임이다. 그것이 수학 공식이든 낡은 서류더미든 누군가의 아픔이든 상관없다. 결국 우리가 증명하는 것은 능력만이 아니라,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두 영화는 내게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만들었고, 어떤 모습이든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질문과 답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현실에서, 나 역시 나를 증명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된다고 믿는다.



비로소 소장 장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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