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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효진 Jan 29. 2020

젖은 낙엽은 쓸쓸하잖아!

버티는 기술에 대하여

"우리는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복종의 상태에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내맡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삶에 있어 위대한 비밀은 내맡김, 복종, 존재를 신뢰함이다.

위대한 모든 것은 늘 선물로서 온다.

이것을 위해 애쓰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놓칠것이다."


웹 어딘가에서 읽고 수첩에다 적어두었던 글이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자존심을 세워 소모적인 싸움을 걸거나 제풀에 꺾여 나자빠지는 경우가 많다.사실 그게 바로 내 얘기다. 궁금한 것은 묻고 불합리한 것은 해결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 뉘앙스나 방법의 문제에서 나는 꼭 지고만다. 욱해서 세련되지 못하며 변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할바에야 가만이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을 자꾸만 까먹어서 후회를 부른다. 나이가 들어 그 빈도가 줄었을뿐.


아마도 나와 같은 경험이 많았을까. 아버지는 내가 속쓰려하는 모습을 보실때마다 '허허실실'이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아래나 위에서 고의든 아니든 시비를 붙여도 웃는 낯으로 어물쩡 넘기는 것이 최고의 방책이라는 식의 말씀이었다.


그런데 맨 위의 수첩속 메모 글은 아버지의 '허허실실'보다는 직접적이어서 차라리 좋았다. 아버지의 '허허실실'은 외우기는 좋은데 발음때문인지 좀 허망하달까. 실없달까.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그에 반해 저 글은 대놓고 복종하라고, 쓸데없이 노력해서 나를 소진시켜버리지 말라한다. 단지 신뢰로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내가 사람이 된단다. 마치 스위치를 재끼듯 명쾌하기까지 해서 전혀 자존심 상하지 않게 복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몇년전, 존경하는 선생님은 박사 프로포절 개박살을 내신 저녁식사자리에서 '너는 무게를 잡는다'고 하셨다. 허허실실의 대실패였으며 쓸데없는 진지함이 불러온 참사였는데 그날 심신이 바닥을 쳐서 뭐라 대답도 못하고 말았다. 진작 내맡기고 기다리는 미학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기다리지도 않고 애만썼으니 얼마나 어리석다 여기셨을까.


최근 사회생활 팍팍해서 마음고생좀 하던 터에 박미선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스탠딩 강연을 하는 것을 보았다. 오랜시간 코메디언을 하면서 느낀 점은 마치 젖은 낙엽처럼 버티는 것이 중요하는 이야기를 했다. 얇은 낙엽이 물에 젖어 어딘가에 착!하고 달라붙듯이 인생은 그렇게 사사롭게 버티는 것이라고. 그 강연을 보면서 문득 속으로 이런 생각이 지나갔다. '마지막 잎새는 똑같이 쓸쓸해도 고귀함이라도 있지.'


그러고는 아차싶었다.

허허실실에서 복종까지 수긍하면서 젖은 낙엽까지는 못가는 지점에 내가 서있구나. 


지금 이 시련이 방해인지 고비인지 구별하려고 들지 말자. 이 모든 것이 지난 후에 판단해도 늦지 않으니 힘빼지 말자. 무게를 잡고 힘들여 애만 쓰다가 나자빠질바에야 가벼이 젖은 낙엽이 되어 가는데까지 가보는게 천배는 고귀하다.

고. 스스로를 다스려본다.


비로소 소장 장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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