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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효진 Jun 11. 2020

까짓, 퇴사자가 뭐

진것같은 느낌 극복하려면

올초부터 스트레스를 받았다. 맡은 업무가 무한 확장되는데 난이도 0부터 10까지 들쭉날쭉한 업무를 하다보면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했던 것 같다. 내 업무에 대해 잘 알고 지시를 내려주면 좋은데 그렇지 않으니 일이 중구난방 계획이 다 틀어지고 또 그 책임도 지지 않는 대표덕분에 무턱대고 삽질을 해야하는 내가 무능해보이는게 가장 스트레스였다. 도대체 이 회사에서 내 커리어는 발전할 수 있을까. 그럴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버티기의 기술이라던지 이번 산을 넘고 맞게 될 미래 비전을 상상한다던지의 방법으로 시간을 좀 끌었었다.


월급은 일종의 마약같아서 때려치워야지 싶다가도 어물쩡 한두주 흘러가면 다음 월급날이 다가오는 바람에 그만두지 못한다. 이번에는 다음달 보너스나 휴가가 걸리고 또 다음에는 연봉협상이나 등등등의 이슈가 있어서 그만두지 못하고... 그러다가 월급루팡이나 하는 신세가 될 것 같아 그냥 그만둔다고 했다. 그만둔다고 말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기간 안에 해야 할 일을 나름 성실히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만둔다고 이야기할 때의 그 스트레스는 온데간데 없이 차분한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서 일을 했다. 곧 나갈 사람을 위한 배려로 스트레스의 원인이 올스톱되었을테지만.


문자 하나 보내고 잠수타며 퇴사할 정도의 회사나 직원이 아니라면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서 마무리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만두는 사람은 의사를 제시하고 다음 인수인계 받을 사람이 뽑힐 때가지 업무를 정리하고 공유하고 인수인계를 마무리 한다음 그만두는 것이고, 회사는 앞으로 일어날 문제의 가능성을 염두하여 예비 퇴사자에게 최소한의 장치를 해둘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최소한의 성실함을 갖추고 인수인계하고 연차까지 다 찾아서 퇴사하면서도 마음은 왠지 진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회사가 나 하나 없다고 당장 어려움을 겪을리 없고 아주 조금 아쉬움 정도 있는 정도일텐데 나만 일상을 통틀어 급변하는 상황을 맞아야 하는가 싶기도 하고, 똥차 지나가고 벤츠 온다는 보장도 없으니 너무 리스크가 높은 상황이 또다른 스트레스가 생길 징조가 살짝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사한다는 것은 참 맥빠지는 것이기도 하고 불편한 것이기도 하다. 홀가분하고 뭔가 다시 시작한다는 설렘도 물론 있지만 지금처럼 뭔가 다음을 완벽하게 세팅하지 않은채 퇴사할 때에는 더 그런 것 같다.


아마 오랜기간 한 직장에서 월급루팡도 되었다가 열혈직원이 되었다가를 반복하면서 차장부장까지 올라가고나면 회사를 나온다는 것의 의미는 참 많이 다를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그래서 회사회식을 좋아하고 직원주말 등산을 좋아하는 것이라며. 나도 살짝 그런 테두리 속에서 안식같은 걸 느낀 찰나가 있었다. 그럴 수록 퇴사 후의 상실감은 클 것 같다. 그래서 더 진것 같고 그런 것이겠지. 그럼에도 출근길 아이에게 쓸데없이 화를 내거나 몇달 동안 읽은 책이 한권이 안된다는 걸 알았을 때, 그만두어야 한다고 결정했고 그렇게 했다. 


물론 내겐 목표가 있다. 당장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었던 개인 쇼핑몰을 해보는 것, 박사 학위를 마무리짓는것, 스트레스로 돌보지 못했던 가족과 정말 좋은 시간을 많이 만드는 것... 당장 눈앞의 사사로운 것부터 장장 오랜 시간을 들여 해야만 하는 것들까지 그동안 멈춰있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이 것들은 서두르지 않되 꼭 이뤄야 할 것들이다. 새로운 시간을 만들었으니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하나씩 실천하면서 원하는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야겠다. 그래야 달콤한 월급을 포기한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은 길고 또 돈을 벌고 행복해지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절대 진 게 아니라 이기려고 나온 것이다.


비로소 소장 장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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