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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효진 Oct 05. 2020

발레춤을 추는 아이

우리집 가장 어른은 아이다.

연휴가 길고 한 집에 오래 같이 있다보면 신경전을 벌이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넓지도 않은 집에서 각자 할 수 있는 최대의 게으름을 부리며 연휴를 보내는 와중에도 엄마로서, 아빠로서 또는 서로의 배우자로서 일정부분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들어 부쩍 유투브로 영상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는 엄마아빠와 놀아달라고 보채다가 누구하나의 핸드폰을 얻으면 꽁꽁 싸매고 자기 방에 쏙 들어가서 들여다보기를 좋아한다. 아직은 엄마 아빠 핸드폰의 비밀패턴을 열줄 모르기 때문에 갖은 아양을 떨고 30분만 보겠다는 협상을 시도하는 선에서 영상을 보고는 하지만, 솔직히 풀어질대로 풀어진 엄마 아빠는 그 30분을 넘겨 각자 딴짓을 하기 바쁘다.

같이 놀이를 하거나 학습을 하거나 하다못해 산책이라도 다니고 싶은데 마음과는 달리 한번 마음먹는 것이 힘에 부쳐서 그저 아이에게 폰을 내주고는 하는 것이 영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책을 좀 가져오라고 해서 몇권 읽어주다가 한번 동네 한바퀴를 돌고 오거나 좋아하는 편의점에 가서 과자 한두개를 사오거나 스티커책으로 숫자놀이를 하는데 도통 시간이 가지를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하루종일 내게 와서 매달리고 업히고 안기고 구르고 몸살이 날 지경이 되게 괴롭힌다.


어쩌다가 넷플릭스로 아이에게 만화를 틀어주었다. 바다속 탐험대가 나오는 것도 있고 빵들 세계의 이발사 이야기도 있고 아이와 또래 아이가 장난감 나라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척척박사 이야기도 있다. 아이는 특히 이들 이야기 중에서 장난감 나라의 공주가 좋아하는 발레 공연 에피소드를 즐겨보는데 가끔씩 그 모양을 따라추기도 했다. 아빠를 닮아서 팔다리는 길지만 엄마를 닮아서 가느다란 체형은 아니라서 어째 모양새가 어색하기 짝이 없지만 표정하나만큼은 프로페셔널하다. 다리하나를 들어올리기도 하고 빙그르르 돌면서 손을 뻗어 올리는 모양이 무척 귀엽다.


남편과 이러쿵저러쿵 말싸움 비슷한걸 하면 아이는 중간에서 싸우지말라며 중재를 하곤 한다. 별로 큰소리 높여서 언쟁을 한 것도 아니고 어쩔 때는 정말 농담으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인데, 이제는 중간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말 속에 뛰어들기도 하고 분위기를 봐서 화제를 돌리기도 한다. 우리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듣기라도 하는걸까 싶은데 어쩔 때는 글자를 모르면서 정확하게 써있는 글씨를 말할 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이는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러워지기도 한다.


하루종일 집안 청소를 했던 남편이 밤에 아이를 씻기는 때가 되어도 기색이 없고 아이는 10분반 보기로 했던 유투브를 한시간이 다되도록 보고 있었다. 아이 잘 시간이 지난것 같다고 한마디 했더니 자기가 알아서 할테니 더이상 이야기 하지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뭐 자기 치우는 동안에 나는 놀았나 뭐, 연휴 내내 삼시세끼까지는 아니어도 2.5끼는 밥하고 설거지하고 명절이라고 기분낸다고 이것저것 요리도 많이 했는데 말이다.


결국 아이를 씻기면서 내게 특유의 눈웃음으로 자기가 집중해서 보던 TV프로그램이 끝나면 씻기려고 했다면서 연휴 마지막 날 밤의 심드렁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이는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면서 대충 잠이 솔솔 왔는지 나른한 모양이었는데 내복을 갈아입고 머리를 말리더니 거실로 나와서 엄마공주님과 아빠 왕자님이 소파에 앉으라고 재촉했다.

그러더니 무릎 앞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도 없이 마음대로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탈춤도 아닌것이 발레도 아닌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나는 박수로 장단을 맞추고 어지간한 시간이 지나고 환호와 함께 박수를 쳤더니 아직 마무리가 안되었다며 한차례 더 춤을 추고는 멋드러지게 인사를 했다. 남편과 함께 박수를 쳤다.


아이는 만족스러운듯 두손 곱게 모으고 안녕히 주무세요. 인사를 하고는 침대로 갔고 금새 잠이 들었다.

남편과 나는 별 새삼스럽고 대단한 싸움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아이는 그 분위기를 읽고 마음이 콩닥거리고 그러다가 나서서 중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온통 세상의 중심이 자기여야 하는데 엄마아빠가 자기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심 심술이 나서 끼어든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자연스럽고 지혜롭게 엄마아빠 사이로 파고든다.


처음 본 사람들에게 '덕분에 행복해요.'라고, '오늘 날씨가 정말 좋아요'라고 먼저 인사를 건내는 아이의 세상에 너무 경직되고 뾰족한 언어로 기분을 거스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밤이었다.



바로소 소장 장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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