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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효진 Dec 22. 2020

설거지싫어요병 투병기

철이 드는 것만큼 어려운 설거지

사실 나는 설거지싫어병을 앓고있다. 결혼하고 내 가정이 생기면서 누가 해준 밥을 먹는것보다 내가 차린 밥을 먹여야 하는 일이 많아졌고, 딱 그만큼 설거지 횟수도 늘어났다. 시집 오기전에는 엄마, 동생 가끔은 아빠가 설거지를 했지만 지금은 설거지는 점유율 95%를 육박한다. 대신 남편은 아이를 씻기는 것을 전담마크하는 중이다. 


예전에는 설거지를 하는 시간이 너무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쓸데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괴로운 시간만 같아서, 먹고 남은 음식이나 기름기 잔뜩 튄 가스렌지를 보면 한숨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엄마는 거기에 따뜻한 물도 쓰지 않아서 짜증나는 기억 한스푼 첨가.


오죽 설거지가 귀찮은 것이면 이런 말도 있다. '세상에 상종 못할 세가지 사람이 있는데 바로 담배끊은 사람, 살뺀 사람, 먹고 바로 설거지 하는 사람 이다.' 그만큼 신념이 확고한 독종이라는 것이다. 배고프니 밥이라도 만들어 먹는 것은 생존이지만 그 후에 치우는 것은 의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어쨌거나 간단하게 밥을 차려도 후라이팬 하나 도마 하나 냄비 하나에 숟가락 국자 등등이 필요하고 밥, 국, 반찬 담은 그릇들하면 그릇이 개수대에 꽉 찬다.


여기서 설거지의 범위에 대해 밝혀두자면 설거지는 단지 그릇을 씻는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먹다 남은 음식물의 처리, 그릇의 세정, 그릇의 정리와 수납, 조리대 정리 및 각종 조미료와 남은 식재료와 덜어둔 음식의 정리 등을 포괄하는 즉, 토탈 키친 매니지먼트의 대명사다. 


요즘 설거지가 더 하기 싫어진 이유가 몇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가정 보육에 재택근무가 겹치면서 집에만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보니 삼시세끼 밥때 잘 맞춰 먹는 것도 귀찮고 간간이 간식이나 커피 등을 먹으면서 생기는 설거지 거리들이 추가 되는 바람에 몰아서 한번에 하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무장갑에 구멍이 나면서 설거지때마다 왼쪽 검지 손가락으로 물이 새어 들어와서 찝찝하기도 하고 수세미도 좀 오래된 듯하여 꼬질꼬질한 것이 씻어도 개운한 맛이 좀 없어서도 있다. 


아이 장난감으로 어질러진 집안풍경과 어울려 개수대에 쌓인 설거지 거리를 보는 심정은 참담하여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일단 시뮬레이션으로 가상의 설거지 상상을 해보았다. 


일단 뜨끈한 물에 팍팍 불려둔 설거지거리를 손목이 짧은 M사이즈 우아한 고무장갑을 끼고 적당히 부드러우면서 거칠고 거품이 잘나는 새 수세미로 뽀드득 소리가 나게 그릇을 씻어 한켠에 차곡차곡 정리하였다. 특히 컵은 아이 젖병 소독에 썼던 소독기에 넣어둔다. 아직 가스렌지에 있는 큰 냄비와 후라이팬을 가져와 마저 닦는다. 거름망에 모인 음식물쓰레기는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옮기고 거름망도 깨끗하게 세척을 해둔다. 다른 수세미를 가지고 와서 조리대와 가스렌지에 튄 기름과 얼룩을 닦아 낸다. 그리고는 깨끗한 행주로 물기를 말끔하게 닦아 내고 다 쓴 행주와 수세미를 깨끗하게 빨아서 물기를 꽉 짜고 전자렌지에 1분 돌려내어 탁 털어 널어 둔다. 물론 식기 건조대에 있던 그릇과 수저통의 수저 포크 젓가락은 물기가 좀 빠지면 찬장과 서랍에 수납하고 비워두면 좋다. 음식물 쓰레기통이 차있다면 그것도 비우고 온다. 


자 이제 상상이 끝났다. 


생각만으로도 허리가 좀 아픈 것 같다. 


1인칭 시각에서 3인칭 시각으로 상상의 나래를 좀 펴보고자 한다. 


주방에는 작은 모니터가 있는데 현관초인종이 울리거나 하면 모니터가 가능하고 공중파 몇몇 TV도 볼 수 있다. 나는 설거지를 하는 중이지만 BGM으로 그 작은 모니터 TV 소리가 나를 무의식 중에 콧노래를 부르게 한다. 주방에 난 작은 창으로 저녁 노을 빛이 스며 들어오고 저 아래쪽 놀이터에서 꼬마들이 미끄럼틀을 타고 노는 소리가 들어온다. 한창 설거지 하는 내 등 뒤로는 거실 소파에 얌전히 앉아 꽤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신비아파트를 보고 있는 딸 아이가 있다. 


먹기 위한 음식을 만드는 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설거지는 삶을 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거지는 다음의 요리를 준비한다. 다음을 위한 과정은 언제나 지금의 삶의 지속을 의미한다. 지금을 잘 살아내고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고 그 과정조차 삶의 일부다. 설거지는 그만큼 의미가 있는 행위다. 얼마나 개운하고 보람있고 정갈한 행위인가 말이다.


그래 설거지 한번 대차게 하러 가야겠다.


하고는 커피 한잔을 마신다. 

 

뭐 이리 설거지 한번 하자고 마음 먹는데 힘이 든겐지.

아직 병은 고치려면 좀 멀었다싶다.


비로소 소장 장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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