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효진 Jul 18. 2024

Subway of Love (2)


[문이 열립니다. 우리 열차는 시작 열차로 5분 후, 6시 35분 출발합니다.]


 텁텁한 날씨에 기껏 두드린 피부가 흘러내리면 어쩌나 싶던 찰나, 기분 좋은 선선함이 나를 반긴다.


열차 칸 4-1은 소개팅 공간만의 특색을 돋보이기 위함인지 멋들어진 재즈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텅 빈 임산부 좌석과 옆으로는 그 너머가 보이지 않도록 아주 비밀스럽게 순백의 커튼이 차르르 살랑였고, 내 심장은 마치 재즈 바에 온 듯 콩닥콩닥 비트를 맞춰 나갔다.


 '와.. 내가 타고 다니던 지하철 맞아?'

넋을 놓고 쳐다보던 그때, 머리통 위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감상에 빠진 내 정신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저기.. 안 들어가세요?"

 "아! 죄송합니다!"

뒤에서 불쑥 나타난 남자의 목소리는 나를 적잖이 당황케 했다. 그는 내가 커튼의 틈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실소를 터뜨리며 친절히 커튼까지 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아 쪽팔려...'

생각도 잠시, 휘적휘적 지나쳐 가는 남자의 행보에 점점 시선이 쏠렸다. 양옆에 붙은 기다란 의자 사이로 지그재그 배치된 여섯 개의 테이블. 그중 내가 앉아야 할 4번 테이블에 가까워지는 그의 발걸음이 이유였다.


나는 내색 없이 한껏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쓱쓱 정돈하며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하얀 안개꽃이 몽글몽글 꽂혀있는 화병 앞에 앉아 두리번거리던 그는, 곧이어 걸어오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어 보였다. 안개꽃이 참 잘 어울리는 미소를 가진 사람이었다.


[문이 닫힙니다.]


 남자에게 다가서는 나의 발걸음에 문득 지난 연애가 밟혔다. 


엑스와 나도 스무 살의 그 시절엔, 말갛고 백합 같은 사랑이었다. 나와는 다르게 감성 그 자체의 삶을 살던 엑스. 그는 내게 묻어 나오 말과 행동에 끊임없이 서운함을 표현하곤 했다. 오히려 너그럽게 받아주지 못했던 건 내 쪽일 테지. 그렇게 투닥투닥 8년의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말간 마음인 양 착각 속에서 결혼까지 하겠거니 여긴 내가 바보였을까? 아니면, 그가 속상한 마음에 잠시 흔들렸다가 다시 돌아오겠거니 생각한 내 오만이었을까. 어찌 되었든, 그는 이미 꽤 귀여운 여자와 결혼해 잘 살고 있으니 더 이상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자책일 뿐이다.


 30대의 만남은 풋풋한 새내기 시절 시작했던 만남과는 차원이 달랐다. 남자 사람 친구라 하는 것들은 이미 찐 우정으로 명확해진 지 오래이고, 사내연애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매 주말 시간을 내서 소개팅을 하고, 마음 없이 믿음 없이 교회에 앉아 두리번거리며 교회 오빠를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열차 소개팅은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16가지 MBTI 성격유형이 감정 호소에 크게 공감하지 못하는 내 성격을 구구절절 변명 않게 만들어주었고, 유형에 따라 어떤 사람일 것이라는 이해가 암묵적으로 깔려 있기에 척할 이유도 없었다.


바로 내 앞에 앉아 해사하게 웃는 이 남자가 내게는 언제 또 올지 모를 기회다. 



 

흐르는 선율과 일정하게 들려오는 열차 소음에 적당한 간격을 둔 옆 테이블의 대화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10분 소개팅이 시작되었다.


 "유하정입니다. 제 첫인상이 조금 개그였죠.."

 "하하하, 반가워요 이도훈입니다. 오히려 하정 씨가 제가 선택한 분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걸요!"

 "엇, 정말요? 그렇다면 너무 감사하네요. 혹시.. 제가 작성한 ESTP 수비 지원서에서 어떤 점을 보고 선택하신 거예요?"

 "제한 시간이 10분이라 그런지 대화 진도가 빨라서 좋은데요? 음.. 일단 전체적으로 재밌기도 했고, 이상형을 가장 솔직하게 써놓으셨더라구요. 잘생긴 사람이었죠 아마?"


*ESTP 수비형 지원 / 자기소개서*

[여성, 생일이 지나서 아쉽게도 32세(만 나이 제도 적용. 신체 나이 자신 없음.) 현실에 살고 있는 이성적인 회사원. 이상형은 잘생긴 사람.]


외모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해 놓은 글을 보고 선택했다니, 꽤나 마음에 드는 답변이었다. 더구나 그는 내 마음에 쏙 드는 외모였다. 쓱 쓸어 넘겨 자연스레 자리 잡힌 머리칼에 살짝살짝 보이는 짙은 눈썹. 얇게 진 쌍꺼풀과 날카로운 눈매 속 선한 동공은 시선을 피하기 조차 어려웠다. 조금 굴곡진 쭉 뻗은 콧대는 남자다움이 배가 되고, 웃을 때마다 깊게 패이는 보조개는 자꾸만 빠져들게 만들었다.


 "와... 제가 쓴 이상형을 보고 선택하셨다니, 자신감이 상당하신데요? 사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부합하시는 거 같긴 해요."

 "제가 어디 가서 못나단 소리는 못 들어봤거든요. 하하 사실 저는, 하정 씨 커튼 앞에 서계신 거 보고 한 10초 정도 멍 때렸어요. 너무 예쁘셔서."


그의 말이 끝나자 목에서부터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일찍 일어나서 한껏 꾸민 보람이 있네요.. 하하”

 “이 하얀 안개꽃 꽃말 중에 사랑의 성공이라는 뜻이 있다는데.. 아무래도 저희랑 딱 어울리는 꽃이죠..? “


[이번 역은, 00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아.. 10분이 벌써 지났네요. 하정 씨는 회사까지 얼마나 남으셨어요?”

 "저는 40분 정도 가서 한번 갈아타요. 도훈 씨는요?"

 ".. 저도 비슷해요! 괜찮으시다면 조금 더 같이 있어도 될까요?"

 “아! 그럼요, 자리 옮길까요?"


[문이 열립니다]


지난 5년간 휴업을 선포하며 흩어졌던 나의 설렘 세포가 너 나 할 것 없이 온몸 곳곳에 울컥이며 퍼져나가는 순간이었다. 대답은 덤덤했지만 마음속에선 1차 예선을 통과했다며 폭죽을 터뜨렸다. 나란히 앉아 조금은 가까워진 체온을 느끼며 대화를 이어가는 우리는 한 쌍의 연인처럼 다정했고, 그는 꼭 어디선가 나만을 위해 세상에 내려 준 사람 같았다.


 지하철을 기다리던 때의 초조함, 빛에 반사되어 투명하게 살랑이는 커튼을 따라 일렁이던 설렘. 사랑의 실패로 도망치듯 떠나온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다시 한번 보란 듯이 사랑해 보라는 선물이었다.



[생각이 흐르는 시간- 초 단편‘Subway of Love’]

이전 04화 Subway of Love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