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효진 Aug 22. 2024

누가 물었을까?


 운명의 붉은 실로 엮여 있는 남과 여가 있다면, 그건 나와 남편일 거라 확신했다. 첫 만남부터 의심할 겨를이 없었다. 마치 잠시 떨어진 용수철이 제자리로 가려는 듯 서로에게 강렬히 이끌렸다.


 붉은 실에 관한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를 감상할 때면, 돌고 돌아 결국 만나 사랑을 이루는 절절하고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기억한다. 나는 늘 그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곤 했다. 얼마나 재미있게 살아갈까, 얼마나 행복할까. 아이는 낳았을까? 우연하게 운명의 주인공이 되어 엔딩 후의 에피소드를 겪어보니 방송 매체가 딱 거기까지 보여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새끼손가락에 굳게 매듭져 있다 믿었던 건, 애석하게도 나의 허상이었다.


 "우와! 이쪽 눈이 왕 커졌다!"


 아침부터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조그마한 손으로 내 눈을 가리키는 저 생명체는, 올해로 다섯 살 난 나의 딸이다. 미쳐 보지 못한 거울 속 내 눈꺼풀 한쪽은 붉게 물든 채 부풀어 있었다. 유치원 소풍이 있었던 터라 일찍이 부엌에 나와있었고, 내 앞으로 분명 남편이 여러 번 지나갔는데.. 그는 어떠한 일언반구도 없었다.


 "아빠한테 가서 얼른 옷 입혀달라고 해."

 "네~~~"


남편이 내게 일말의 관심조차 남지 않았다는 현실은 진즉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은, 옷 어딘가에 박혀있는 머리카락처럼 잊을만하면 나를 찔러댔다.


 "오잉! 아빠도 눈이 왕 커졌네?"

 

나갈 채비를 마친 그가 방에서 나오고, 나는 무심히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확인했다. 정확히 나와 반대쪽 눈꺼풀이 붉게 물들어 퉁퉁하게 끔뻑거리고 있었다. 그에게 나도, 어딘가 박혀있는 뾰족한 머리카락이었다.


 "엄마 아빠 쌍둥이야! 우와! 어젯밤에 진짜 큐피드가 왔었나?"

 "큐피드?"

 "응! 아무래도 화살에 맞은 거 아닐까? 히히히"


딸아이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겨우 눈꺼풀이 부어오른 우리를 보고 행복해했다. 나와 남편, 서로가 멀찍이 떨어진 탓에 아이가 고개를 90도로 휙휙 돌려가며 웃어주었다. 그 웃음에 기대어 다시 한번 슬그머니 쳐다본 남편은 나와 같은 마음인지, 혹은 딸아이가 마냥 귀여운지,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리 눈이 퉁퉁 부어있었지..'

남편과 아이가 모두 나간 오후, 내 머릿속엔 첫 만남 때의 남편 모습이 꽉 들어앉아있었다.


 때는 8년 전. 슬프디 슬프다던 영화가 개봉한 어느 평일이었다. 엉엉 울고 싶은 마음에 가장 빠른 조조영화를 끊어 구석자리에 몸을 숨겼고, 장면마다 감정을 이입하며 코를 훌쩍였다. 그리고 잇따라 입술까지 파르르 떨려오던 찰나였다.

 

 "..흐흑..흡...흐흡..흑"


아래쪽에서 희미하게 들썩이는 어깨와 입을 조금만 더 벌린다면 그대로 모든 게 놓아질 만큼 참아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장면이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그 소리가 썩 구슬펐다. 나는 그의 흐느낌을 영화 삼아 엉엉 울어버렸다. 어느새 상영이 끝나고 '덕분에 잘 울었어요' 하는 심정으로 다가가 손수건을 건넸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이거.."

 "어! 아! 예! 감사합니다..!"


허리까지 숙이며 지나치게 예의 바르던 그 남자. 우리는 엉겁결에 나란히 어둠 속을 걸어 나왔다. 밝은 빛 아래서 마주한 그는 마치 태닝 한 마시마로 같았다. 서로의 잔뜩 부어버린 눈꺼풀에 한참을 개운하게 웃었고, 그날로 나는 그에게 힘껏 당겨졌다.


지난 추억을 곱씹던 나는, 용기를 내서 문자 한 통을 보냈다.

 "저녁 뭐 먹을래?"




 오랜만에 아내에게 살가운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언제부터인가 서먹해진 아내와의 사이는 도무지 나아지지가 않았다. '저녁 뭐 먹을래?'라는 이 문자는, 아마도 아내가 꽤 용기를 내본 것이겠지.


오늘 아침, 아내의 눈이 나와 같이 퉁퉁 부은 것을 보았다. 모기가 물었는지, 개미가 문 것인지, 다래끼라도 난 것인지.. 묻지 않으니 알 길이 없었다. 내가 가렵지도, 아프지도 않은 걸 보면 아내의 눈도 별일 아니겠거니..


출근한 오후. 아내의 눈꺼풀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고, 기어코 첫 만남을 상기시켰다.

 

 때는 8년 전, 정말 가고 싶던 회사에서 떨어지고 울고 싶은 날이었다. 무작정 영화관으로 들어가 가장 슬퍼 보이는 영화를 고르고 구석에 박혀있었다. 장면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그저 멍 하게 보고 있자니 뒤에서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참으로 애달파 바라던 대로 눈물이 나왔다.


상영이 끝난 후 누군가 내려와 손수건을 건넸고,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를 울게 해 준 사람이구나. 고마움에 연신 허리를 굽히며 감사를 전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는 빛이 났다. 밖으로 나와 벌겋게 부운눈을 뽐내며 그녀를 웃게 해 주었다. 그녀가 웃으니 나도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나는 이미 그녀에게 힘껏 당겨지고 있었다.


지난 추억이 반가워, 오랜만에 용기를 냈다.

 "당신이 좋아하는 치킨 먹을까? 매운 걸로."




남편의 답장에 그간 뾰족함이 무색했다. 거울이라도 있었다면 설레어하는 내 표정에 낯부끄러웠을지도..


삐. 삐. 삐. 삐. 삐리리리-


 "어? 아빠다! 아빠~~"

 "어이구 우리 딸. 소풍 잘 다녀왔어?"

 "응! 엄청 재미있었어!"

 "엄마가 해준 소시지도 다 먹었고?"

 "응! 엄청 맛있었어!"


아빠가 기분이 좋아 보여요. 평소에는 나를 조금만 안아주고 화장실에 갔는데, 오늘은 오래 안아줬어요! 나한테 궁금한 것도 많은가 봐요.


 "여보, 여기.. 오는 길에 포장해 왔어."

 "어? 이 치킨.."

 "아.. 응 우리 자주 먹던 거. 마침 이 앞에 생겼더라고."

 "그랬구나.. 정말 오랜만이네. 얼른 씻고 와요..!"


내가 유치원에서 같은 반 성빈이한테 사탕을 줄 때 엄청 부끄러웠는데, 아빠도 엄마한테 치킨 주는 게 부끄러운가 봐요! 아빠가 엄마를 좋아하는 거 같아요!! 엄마는 성빈이 처럼 활짝 웃었어요. 엄마도 아빠를 좋아하는 걸까요?


 "딸, 9시가 됐네! 코코 잘 시간이에요~"


앗, 벌써 잘 시간이 되었어요. 소풍에서 신나게 놀아서 하품이 나와요. 엄마 아빠가 기분이 좋을 때 같이 놀아야 하는데.. 내일도 엄마랑 아빠가 안 싸우고 오늘처럼 좋아할까요? 달님! 오늘밤에도 큐피드가 우리 집에 오게 해 주세요. 화살을 더 많이 쏴줘서, 엄마 아빠가 매일매일 좋아하게 해 주세요!

 

 아이의 방 안으로 달빛이 가득 들어오는 밤이었다. 지난밤에 정말 큐피드가 다녀간 걸까?


 무미건조하고 차갑게 시들어버린 그들의 마음에, 붉게 피어오른 눈꺼풀처럼 설렘의 꽃봉오리라도 피어오른 걸까? 오늘 밤도 내일밤도, 혹여나 아이의 소원대로 매일 큐피드가 화살을 쏜다면 다시금 사랑이 만개하는 건 순식간이지 않을까.



[생각이 흐르는 시간- 초 단편'누가 물었을까?']

이전 09화 날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