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로희망란에 장난을 쳐!"
"장난 아니에요! 진지해요. 전 두더지가 될 거예요."
내 꿈은 두더지다. 물론, 원통형 몸에 갈색 또는 회색의 털을 가지고 짧은 다리와 큰 발을 가진 동물이 되겠다는 건 아니었다. 두더지는 대부분 지하에서 생활하며 터널과 굴을 파서 사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두더지가 되기로 작정한 역사는 무려 7살부터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동화 속에 빠져 살았다. 매일 몇 시간씩 동화책을 읽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태교로 책을 읽어주셨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게 확실하다.
가장 좋아한다 말할 수 있는 책은 토끼와 거북이라는 책이었다. 엄마와 나란히 앉아 그들의 달리기 경주를 보고 있자면, 엄마는 내게 물었다.
"아들은 커서 토끼가 될래, 거북이가 될래?"
그럼 나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두더지가 될 거야."
"두더지?"
"응! 거북이는 앞만 보고 가지만 너무 느리고, 토끼는 빠르긴 한데 나무에서 쉬고 있잖아. 아마 토끼 앞에 놀이터가 있었다면, 노느라 경주에서 또 지고 말거야! 근데 두더지는 무조건 이겨."
"하하, 그래? 두더지는 왜 무조건 이긴다고 생각해?"
"두더지는 땅속에서 최대 40킬로 속도를 낼 수 있어! 튼튼한 발톱으로 굴을 마구마구 파고, 냄새랑 진동에 민감해서 어떤 위험이 있어도 다 피해가!"
"와.. 우리 아들 정말 똑똑하네..."
나의 두더지 역사는 견고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된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내 앞에 놓인 진로희망란에 자신 있게 두더지라 적어 넣었는데, 선생님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선생님은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시고 이해해 주셨는데, 고등학교 선생님은 두더지 역사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도 영 눈빛이 따가운 게 팍팍한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고 본다.
"선생님이 생각하기에는.. 두더지..! 하.. 그래, 두더지 같은 사람 좋다 이거야. 그럼 그 두더지가 어떤 일을 하는 두더지가 될지 조금 더 자세하게 써오면 어떨까 싶은데?"
선생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어떠한 일을 하는 두더지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허허.. 그냥 두더지처럼 묵묵하게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먹이를 찾고 위험을 피하며 이 험난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서식지를 만들어 살아가는 그런 삶. 그 삶을 위해서는 수단이 필요하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일은 돈벌이의 수단이라던데.. 나는 두더지가 되기 위한 수단정도로 해야 할 듯싶다.
그렇다면 어떤 수단으로 목표에 도달해야 할까?
집으로 돌아와 어릴 적에 즐겨 읽었던 토끼와 거북이 책을 펼쳐봤지만, 더 이상 그 안에 답은 없었다. 힘 빠진 얼굴로 거실에 나와 쉬고 있는 엄마 곁으로 엉덩이를 붙이고 물었다.
"엄마, 두더지는 장래희망이 아닌가 봐. 선생님이 어떤 일을 하는 두더지가 될 건지 생각해 보라고 하셨어."
"그래서, 생각은 해봤어?"
"잘 모르겠어.. 나는 나한테 주어진 일을 해오면서 컸을 뿐인데, 갑자기 어떤 일을 하는 두더지가 될 건지 생각해 보라고 하니까.. 특출 나게 잘하는 거 하나쯤은 있어야지! 하고 다그치는 거 같네."
"하하하하. 많은 생각을 했네. 아마 우리 아들은 특출 나게 잘하는 걸 찾아내지 못하더라도 뭐든 잘하는 두더지가 되지 않을까?"
"왜 그렇게 생각해?"
"엄마가 보는 우리 아들은 이미 충분히 목표에 도달했거든. 뭐든 묵묵히 잘 해내고, 끝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쉬어갈 만한 나무와 놀이터가 있어도 잘 휘둘리지 않잖아."
"오.. 맞아. 나는 그런 편이지!"
"다만, 너무 몰입해서 혼자 땅굴만 계속 파다 보면 주변이 망가질 수가 있어. 가끔은 땅 위로 올라와서 바람도 느끼고 주변도 살피고 해야 해."
엄마와의 대화에는 늘 답이 있었다. 엄마가 내게 땅 위의 바람 같은 존재가 아닐까?
"엄마! 기관사 어때?"
"지하철 기관사? 땅 밑에서 다니는 게 두더지랑 찰떡이네?"
"하하하, 그렇지? 지하철 운행하다가 가끔 지상철도 운행하고! 아 근데, 요즘은 무인운전시스템이 도입된 열차도 있어서 소멸직종이 되려나.. 어렵다 어려워. 뭐, 그래도 엄마 덕분에 방향을 찾은 기분이야."
다음날, 나는 진로희망서를 들고 교무실로 향했다.
"벌써 생각했어? 천천히 내도 되는데..."
"저 진짜 진지해요."
"선생님은 벌써 불안하네..? 이리 줘봐."
[진로희망: 뭐든 해내는 사람]
"하.. 그래.. 사람으로 바뀌긴 했네.. 가보렴.."
"네! 선생님!"
사실 그럴듯한 직업으로 적어낼 수 있었지만, 다급하게 단정 짓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명확했다. 언제인지 모를, 내가 하고 싶은 게 생긴다면 그게 무엇이든 꼭 해내는 사람이 되도록 준비해야 되겠구나.
[생각이 흐르는 시간- 초 단편'두더지가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