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 잘 쓰는 법

by 최은규
20201127_000415.jpg 항해사 재직 중 썼던 항해일지

나에게 몇 가지 없는 재능 중 하나가 글씨 쓰기다. 어디 자랑하고 다닐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남들보다 잘하는 게 뭐냐고 물어봤을 때 대답할 수 있는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사실 조선시대도 아니고 현대 사회에 글씨를 잘 쓰는 건 인생살이에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다. 경제적 보상이 따르거나 취업에 도움이 된다거나 하는 실용성으로 보면 글쎄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재능과 노력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재능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고 영향을 미치는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한 소재다.



글씨체 유전자?

우리 집안 남성들이 물려받는 Y 염색체에는 글씨체가 새겨져 있다. 나와 형, 아빠, 큰아빠, 할아버지까지 모두 필체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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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생각해 보면 필체라는 것은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유전 요소다. 글씨체가 뭐길래 유전자에 새겨질 수 있다는 말인가? 심지어 한글은 15세기에나 만들어졌다. 내 경험상 글씨 재능은 '잘 쓰는 재능'이 아니라 '잘 쓰게 되는' 재능이다. 우선 나는 어린 시절에 글씨를 잘 쓰지 못했다. 진짜 재능이었다고 한다면 아주 어릴 적부터 태가 났어야 했다. 손가락에 힘이 붙지 않아서였다고 하기에는, 영어 글씨도 항해사가 되어 신경 쓰고 연습하기 전까지는 형편없었다. 따라서 나는 글씨 재능이란, 어떤 인간이 글씨를 잘 쓰게 될 때까지 연습하게 만드는 동인 요소에 가깝다고 본다. 이것은 내가 서평 <Peak - 노력이 당신을 배신하는 이유>에 적었던 대로, "타고나는 것은 잘하는 재능이 아니라, 열심히 하게 되는 재능"이라는 명제에 부합한다.



글씨 잘 쓰는 법

2014-10-28 20.30.14.jpg 대학생 때 쓴 붓글씨


글씨는 노래와 똑같다. 좋게 들리는 소리를 알고, 그것을 목으로 낼 수 있어야 노래를 잘 부르는 것처럼, 글씨도 예쁜 글씨가 무엇인지 알고, 그런 글씨를 써내는 손의 감각이 훈련되어야 좋은 글씨를 쓸 수 있다.


예쁜 글씨에 대한 미감은 좋은 글씨를 많이 관찰하거나, 필체 교정 학원에서 강제로 주입받으면 키울 수 있다. 그리고 예쁜 글씨를 많이 따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늘게 된다. 심지어 유튜브에 글씨 쓰기 강의도 넘쳐난다. 따라서 진짜 문제는 사실 방법이 아니라 노력의 지속 가능성 문제다.



무엇이 노력을 지속시킬까?

B612_20160406_194140.jpg 대학생 때 쓴 붓글씨


나는 평생 글씨를 쓰는 모든 순간마다 나의 글씨에 대해 신경 쓰고, 불만족해하고, 다시 쓰고, 고치고, 연습했다. 학창 시절 글씨에 쏟은 신경을 공부에 더 쏟았으면 훨씬 집중력도 높고 성적이 좋았을 것이라고 확신할 정도다. 지금도 글씨를 날려쓸 때면 마음이 불편해지며 집중력이 흐트러지곤 한다. 나에게 글씨 관련된 재능이 있다면 정확히 이런 부분이다. 평생 만족을 모른 채로 맹목적으로 더 나은 글씨가 써지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이것은 글씨뿐 아니라 우리가 재능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올바르게 표현하는 형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글씨를 꼭 잘 써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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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래에 나의 자식이 글씨를 못 쓴다고 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전 글에도 썼듯이, 세상만사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이다.


글씨를 잘 쓰면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 수 있다. 손편지를 썼을 때 더 좋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처럼 이미지가 중요한 직업이라면 약간의 이점도 누릴 수 있다. 사람들이 내 손글씨를 돌려보며 신기해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즐겁다.


하지만 글씨 잘 쓰기를 포기하면 학습이나 기록처럼 본질적인 작업에 훨씬 더 잘 집중할 수 있다. 천재는 악필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글씨 잘 쓰는 것과 회사 일을 잘하는 것은 상관관계가 전혀 없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과거시험을 보는 조선시대도 아니고, 알아보기 힘든 지렁이 글씨가 아닌 이상 요즘 글씨를 못 쓴다고 불이익을 보는 경우도 없다. 손글씨를 쓰는 업무조차 거의 다 사라지는 추세다.


장단점을 모두 따져보아도 글씨를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글씨에 재능이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글씨뿐 아니라 잘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그 무엇이든 우리는 재능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내가 직접 평생을 관찰해 본 재능이란, 그런 것이다. 해 봐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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