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서평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동욱 Jul 11. 2019

관계의 거리감은 무시가 아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인 관계를 위해 적당한 거리를 재다.

최근 스마트폰 사용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아 어플을 이용해 내 스마트폰 사용시간을 확인한 적이 있다.  그리고 메신저를 하루에 2시간까지도 사용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매우 놀랍고 의아했다. 나는 그렇게 메신저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느꼈기 문이다. 최근에 읽은 책중에 바디랭귀지에 관한 책을 읽어 나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외로웠던 것이다.

올해 반년 동안 안 좋은 일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불안하고 우울함, 외로움 등을 느낄 때마다 습관적으로 나는 메신저를 확인하고 있었다. 나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보았고 내가 메신저를 습관적으로 여는 행위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마음이었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런 나 자신을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정작 메신저에는 기댈 수 있는 답장과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신과 나사이'에서 '관계란 어찌 보면 매우 비효율적일 수 있다' 강조한다. 관계를 위해서 노력과 돈과 시간이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위해서는 그러한 에너지들을 소비할 여유가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관계에 에너지를 쓴다 해도 그 관계가 지속적 일지 알 수 없다.) 이러한 딜레마적인 상황에 나는 적응을 참 못했었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위해서 관계를 희생하기로 선택했고 항상 희생당한 관계 때문에 아프고 힘들어했다.


'모든 일이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인데 굳이 이렇게 살 필요가 있을까?'

 이제야 나 자신의 관계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위해 관계를 미뤄두면서 나는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벽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벽은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다 라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모든 이에게는 그런 벽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최근 들어 그 벽을 너무 많이 높게 쌓아 왔고 이제는 그 벽 너머의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






밀당


 '당신과 나 사이'라는 책을 통해 말하는 '적당한 거리감을 두기'를 밀당으로 정리하고 싶다. 물론 이성 간의 연애와는 다르기에  전체적인 맥락과는 맞지 않는 단어 이지만 사람들 간의 관계의 거리감과 한계를 설정하거나 또는 친밀함을 위해 해야만 하는 노력이 밀고 당기기라는 용어로 가장 정리가 잘된다 생각한다.




밀기


책을 읽는 초기에는 모순성을 느꼈다. 벽을 쌓아가는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설명하면서도 저자는 적당한 거리를 두라 말한다. 거리두기라니 나에게는 거리두기란 어색함이고 무시이고 관계의 끝을 의미한다.



모든 관계에는 한계가 있고, 서로 그 한계를 빨리 인정할 때
 오히려 관계가 발전하다.

<당신과 나 사이> 204p


단호하게 거절하라. 그래야만 당신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사랑은 누군가를 살게 하지만 일반적인 희생은 누군가를 죽게 만든다.  

<당신과 나 사이>175p


  부모이든 며느리든 고부간이든 연인이든 직장 동료이든 관계의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가 있고 그 거리감은 무시가 아닌 존중이라 설명한다. 나는 모든 사람과 매우 가까운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 그래서 살짝이라도 거리를 두는 상대방의 모습을 항상 눈치 보며 상처 받곤  하였다. 항상 나만의 방식으로 나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어했던 것이다.  그런 내게 거리두기라니 처음에는 너무 생소하였다. 거리감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책에 거리감이 들었다.    



부모는 자녀가 결혼한다고 하면 서운함을 느낀다고 한다. 아끼고 사랑하는 자녀를 이제 독립적으로 살도록 떠나보내는 부모는 서운한 것이다. 하지만 부모는 자녀를 독립하게 한다. 즉 거리를 두게 된다. 하지만 부모가 결정한 이러한 거리감이 자녀에 대한 미움이고 자포자기의 마음일까? 아니다.  자녀를 사랑하기에 이제는 자녀를 떠나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너가 힘들 때마다 너의 곁에 있겠다는 베이스캠프가 되어 자녀의 휴식처와 안식처가 되어주게 된다.


 거리감이라는 것에 이해가 간다.  거리두기란 존중이다. 나에 대한 존중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

관계의 한계 설정은 타인을 향한 존중이다. 또한 경우에 따라 나 자신에 대한 존중이 되기도 다. 그러기에 저자는 관계의 거리감이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관계의 발전을 도모하게 만든다 설명한다.

거리를 두는 것을 어떤 마음 가짐으로 대해야 할지 나에게는 큰 해답이 되었다. 이제 나에게 거리감은 무시가 아니다. 존중이고 사랑이다.




 당기기



있는 그대로 사랑할 사람을 찾자

물론 <당신과 나 사이>는 관계의 거리감 만을 말하지 않는다. 당기기에 대한 내용도 있다. 관계의 사랑을 주기에 앞서 저자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줄 수 있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함을 강조한다. 좋은 인연이란 있는 그대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이들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쌓아나가는 것이 우선 큰 전제인 것이다.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어떤 이들과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가깝게는 부모님과 가족이 있고 더 나아가 나를 아껴주는 이들이 생각난다. 하지만 아직은 너무 좁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더 찾고 싶다. 우선 좋은 사람과 만나 연애를 정말 하고 싶고(ㅎㅎ)  서로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친구이자 스승들을 만나고 싶다. 정말 힘든 일이 있어 지금이라도 나와줄 친구가 한두 명이라 있다면 그 사람의 인간관계는 충분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관심을 가져 사랑한다.

 책에서도 강조하듯이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이 말인 즉 사랑이란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라는 말이다. 저자는 관심이 없는 죽은 관계에서 벗어나 소통으로 관심을 가지라고 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의 마음은 어떤지,  오늘의 그는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텔레파시와 같은 느낌으로 알 수 없다. 대화해야 한다. 소통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을 알고 사랑할 수 있다.



시간을 들여야 한다.

관계를 쌓는 데는 절대적으로 긴 시간이 필요한데
그것을 계속 미루게 되면 결국 옆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
그와 함께할 시간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당신과 나 사이>233p




관계란 시간을 들여야 한다. 짧은 시간을 가지고서는 관계를 만들지 못한다. 만나고 소통하며 인간관계를 가져야 한다.  함께 있음을 온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들을 가질 수 있을  서로의 관계는 발전하게 된다. 위에서 설명했듯 관계란 비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에 대한 시간은 우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게 된다.  






 본질은 사랑이다



우리는 왜 인간관계를 가지려 할까? 혼자 있지 않고 왜 그리 붙어 다니며 있을까?  항상 붙어 다니는 중고등학생들에게 왜 너희는 붙어 다니니 물어보면 그들은 혼자 다니기 그러니까 또는 그냥, 재미있으니까 라며 대답할 것이다. 나와 같은 성인들에게 인간관계를 왜 가지냐고 물어본다 해도 많은 사람들이 솔직히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왜 인간관계를 가지려는 것일까? 그것은 관계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관계가 없으 그 아픔에 죽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관계가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하면 진지충이라며  우리는 멋쩍어하며 웃어넘겨버린다. 관계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행복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다.


사랑은 여타 다른 행복과는 정말 다르다. 일반적인 행복이란 나를 충족시켜야만 하는 어찌 보면 나 중심의 감정이지만 사랑이란 나와 함께 하는 이를 같이 생각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되는 게 가장 큰 소망이라는 6살 소녀 엘레나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9개월간 수백 장의 쪽지를 몰래 남기며 부모님을 위로한다. 그리고 마지막 쪽지에는 부모님을 향해  "아파서 미안해요"를 남기고 엘레나는 하늘로 떠났다.


가끔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잊혔다. 나도 그러할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내 묘비와 시체는 어디 있었는지도 모르게 내가 있었다는 기억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나는 기독교 신앙이 있어서 죽음을 끝으로 보지는 않지만 내가 죽더라도 관계의 끈으로 연결돼있다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천 년 전 의 누군가 한 사람도 누군가의 자녀였고 부모이고 친구로 자신의 죽음보다 더 소중한 유대로 연결되어있고  그 체인은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등과 같이 세대를 연결해 지금 나에게 까지 연결되어있다. 그리고 나 또한 그 깊은 유대로 나 이후의 세대를 연결할 것이다, 비록 죽음이 있더라도 인류가 있는 이후로 이러한 유대는 끈기지 않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 모두가 흙으로 돌아갔고 흙으로 돌아가는 게 그렇게 허무하지는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가끔씩 하게 된다.

 (하지만 고아와 독거노인과 같이 그러한 체인으로 연결조차 못되고 외로움으로 죽어가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들의 친구가 되고 싶고 진심으로 도움을 주고 싶다.)





사람이 살아 숨 쉬는 본질은 관계 즉 사랑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무서워서 또는 내가 해야 할 일에 미뤄두어 그 본질을 놓치고 왔음을 깨닫고 있다.  어떻게 그 본질을 찾을 수 있을까? 막연히 생각만 하고 살았는데 그 해답을 조금씩 찾고 있중이다.



사랑하는 이를 밀어내는 것도 또는 그를 당기는 것도 나에게는 그를 향한 존중이고 사랑이다.

이 마음을 내가 살아갈 관계에 가슴 깊이 간직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성장의 신념이 삶을 리드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