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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동욱 Sep 19. 2019

그래도 나아가야 한다.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직시하고 앞을 향하다.

삶의 의미를 찾길 간절히 원한 그의 모습. 그가 진정으로 마지막에 찾았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숨결이 내게 바람이 되어 내 마음을 흔들고 있는 듯하다.  



우리의 모습은 뇌의 한 작용에 불과하다는 과학적인 시선과 고통과 행복을 통해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문과 철학의 시선은 도저히 합치되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스탠퍼드 영문학 학사, 석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생물학과 철학 문학의 교차점에서 의미를 찾고 싶어 신경외과를 선택한 그의 이름은 폴 칼라니티이다. 가슴 아프게도 전도유망한 그는 레지던트 마지막 해에 자신이 완치 불가능한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기적인 나, 의미 있는 나


"가족이 숨을 거둔 환자를 보러 들어올 때 나는 외상외과 집중치료실을 빠져나왔다. 그때 문득 기억이 났다. 내 다이어트 콜라, 내 아이스크림 샌드위치 "
<숨결이 바람이 될 때>


그는 환자를 그저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되는 자기 자신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다 고백한다. 환자는 엄청난 고통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대지만 엄청난 업무와 피로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작은 고통에는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행동한다. 다이어트 콜라와 아이스크림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와중에 중환자실에 긴급환자가 들이닥친다. 환자의 상태는 너무 심각했고 그만 숨을 거두고 만다. 하지만 의사인 그는 제자리에 와서 샌드위치와 다이어트 콜라를 다시 찾아 먹으며 샌드위치가 맛있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은 죽음과 삶이 수없이 이어진 신경외과에서 자연스럽게 의미를 찾고 추구할 줄 알았지만 자신의 삶은 그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회의감을 느낀다.  너무 솔직한 그의 말에 겸허함을 느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감정과 옹졸함속에 살아가지만 그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사람은 드물다.  


폴이 가진 암은 완치가 되지 않는 암이다. 길게는 10년을 보고 살 수도 있지만 언제 그가 운명을 달리할진 모른다. 암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절망했지만 그는 자신의 생존과 자신의 의미를 향해 걸어 나간다.

폴은 암 치료 과정 중 필사적으로 재활에 임해 회복기를 가지고서 다시 수술대로 돌아오게 된다. 죽음 앞에서 외과의라는 가치를 추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책임에는 무게가 있으며 무게에는 중력이 있어 그를 끌어들였다고 한다. 암을 지니고서 그는 수술실에 돌아와  그는 더 치열하게 치료한다.  더 이상 수술대에서 있지 못해 외과의로서의 마지막 날 그는 몸이 더 아파오기 시작한다. 소염제를 더 먹어둘 것을 후외하면서 그는 마지막 수술을 사력을 다해 마무리 한다. 신참 간호사가 수술이 잘됐다며 해피엔딩을 말하지만 외과의사로서의 마지막 순간인 그에게는 그 순간이 해피앤딩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죽음을 직면하고 계획하고 행동했던 의미란 그런 것 아닐까.  자신의 일상에서 당연히 샌드위치를 즐기는 초라한 자신에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세상을 위해 추구한 헌신이 그가 발견한 의미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훌륭하게 자신의 의미를 찾았고 행동했다. 암이 몸에 퍼져 있음에도 필사적으로 회복해 수술실로 돌아와 최고의 실력을 발휘했고 체외수정을 통한 아이도 가졌으며 내가 읽고 있는 책을 죽음의 직전까지 써 내려갔다.

(그의 죽기 직전 유언에는 이 책의 출간이 있었다)



뇌는 정신을 만들고 정신은 의미를 만든다.

뇌는 정신을 만들고 정신은 관계와 의미를 만든다. 뇌의 언어중추가 고장 나서 말을 못 하며 숫자들을 나열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강력하게 표현하고 싶어 하지만 폴은 죄송하다 라는 말밖에 하지 못한다.


폴은 학부시절 정신지체인들이 있는 센터에 견학을 가게 된다. 거기 있는 환자들 중 많은 경우가 어린 시절 사고의에 의해 정신지체가 되게 된다. 사고 이후 부모들은 매일 센터에 찾아오다가 점차 찾아오는 간격이 멀어지다가 센터의 지역에서 벗어나 이사를  하게 된다. 아이를 보러 전혀 안 오게 되는 것이다. 폴은 그런 상황을 듣고 분개했다. 나도 어이가 없었고 충격적이었다. 사람과 관계가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인가? 폴은 한 손으로 센터 안의 한 여자 아이의 손을 잡아주니 빙긋 웃는 장면을 기억한다고 이야기한다.


이후에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가르쳐준다.

뇌가 있어서 우리는 관계와 의미를 만든다. 하지만 때로 뇌는 망가지게 된다.


그의 마지막에는 암이 뇌까지 전이되게 된다. 그 사실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아내 루시는 에필로그에 이야기한다. 뇌가 망가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기 더욱이 그의 마음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을 잃어가는 괴로움


내 삶은 그동안 잠재력을 쌓아왔으나 그 잠재력은 결국 빛을 보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정말 많은 걸 계획했고, 그 계획이 곧 성사될 참이었다. 내 몸은 쇠약해졌고, 내가 꿈꿨던 미래와 나 자신의 정체성은 붕괴되었으며, 내 환자들이 대면했던 실존적 문제를 나 역시 마주하게 되었다. 폐암 진단은 확정되었다. 내가 신중하게 계획하고 힘겹게 성취할 미래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하는 동안 무척 익숙했던 죽음이 이제 내게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왔다. 나는 죽음과 마침내 대면하게 되었지만, 아직 죽음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치료했던 수많은 환자들이 남긴 발자국을 보고 따라가라 수 있어야 할 텐데, 기로에 선 내 앞에 보이는 거라곤 터 비고, 냉혹하고, 공허하고, 하얗게 빛나는 사막뿐이었다. 마치 모래 폭풍이 그동안 친숙했던 모든 흔적을 쓸어간 것처럼
<숨결이 바람이 될 때>



그도 절망하고 두려워한다. 외과의로서 마지막 수술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그는 샤워대에서 엄청나게 울었다. 그는 절망한다. 전도유망한 자신의 삶과 멋진 인생들은 없어져버리고 말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다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전진한다. 샤뮈엘 베케트 문학의 한 구절이기도 한 I can't go on. I'll go on(나는 계속 나아갈 수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를 반복다.  그의 인생을 표현한 가장 대표적인 문장 이다 .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그는 정체성이 무너졌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경험과는 분명 다른 경험이겠지만  정신적으로 주는 고통을 놓고 보자면 내게도 그런 힘든 시기가 있었다. 난 지적이고 논리적이며 현명한 것을 매우 높은 존재의 가치로 추구하는데 24살 군대에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입시 준비도안 돼있었고 한참 어린 주변동생들은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학력뿐만 아니었다. 나는 그들보다 더 아는 게 없었고 멍청했고 게다가 속이 좁고 감정적이었다. 정체성에 대한 자괴감으로 한참 힘들고 방황 죽음을 생각하던 시절이 계속 이어졌다. 스탠퍼드 대학의 석학사를 마무리하고 신경외과 레지던트이던 그는 얼마나 자신의 비참함을 느꼈을까?  남들은 자신보다 잘 나가고 미래를 보며 나아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초라함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나는 그의 글이 너무 좋다. 그는 엘리트이지만 너무 겸허하다. 솔질하게 자신의 치부를 그대로 공개한다.


 나의 그 방황의 시절 이후 '에고라는 적'의 책을 읽고 내 존재보다는 내 행동의 가치를 추구하기로 결단했다. 물론 아직도 나는 그런 삶을 충실히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좌우명처럼 나도 나아갈 것이다.

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무너져가는 존재 앞에서 그가 지녀야 할 가치의 행동을 찾았으며 앞을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앞을 보기 위해 자신을 보다

 문학은 과학과의 연계성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의 담당 교수의 말에 따르면 영문학 박사들은 과학을 대할 때 불을 접하는 유인원처럼 극심한 공포를 느낀다고 고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과학적으로 종교와 삶의 의미는 말 그대로 '의미'가 없다. 삶이란 생존과 번식을 위한 뇌의 반응들이라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문학과 반대되는 과학 그것도 그가 그토록 추구한 삶의 의미와 관계를 형성하는 신경과학, 뇌를 공부한다.


의사의 의무는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무너져버린 환자와 그 가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자신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마주 보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돕는 것이다.
<숨결이 바람이 될 대>


나는 이 말이 어찌 보면 이 책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더 나은 현실을 바란다. 더 나은 미래를 바란다. 하지만 자신의 현재와 자신의 잘못된 과거들은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면 과거와 지금을 직시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나는 요즘 옷과 외모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는데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을 때 길게 생각할 것 없이 큰 전신형 거울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예쁘고 멋지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은 나를 보여주는 거울 앞에서는 아니었을 때가 많았다. 먼 앞도 보아야 하지만 지금 나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삶의 의미와 과학이 상충된다라는 것을 직시했을 것이며 그는 훌륭하게 죽음을 직면했고 지금 이 순간조차도 우리가 삶과 죽음의 의미를 직시하도록 이 글을 써내었다.   



그와 같이 나의 인생을 그리고 아파하는 이들을 가슴에 품고 자신을 마주 보고 이해하도록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제대로 앞을 향해 걸어갈 수 있도록 말이다.



  전도서를 인용하며 그는 세상이 추구하는 야망과 허영이 모두 시시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 여겨진다고 글을 정리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그의 딸을 이야기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낳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나는 이 마지막부에서 그는 인생의 허영보다 사랑이 삶의 의미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끝까지 고통중에도 사랑했다. 환자들을 딸을 아내를 그리고 이책을 읽을 독자들을


죽음으로 인해 삶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보여준 그에게 감사하다.

하늘나라에서 다시 그와 만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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