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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동욱 Nov 03. 2019

조커는 아서플렉이 아니다.

정신분석으로 바라본 조커의 모습은 어떻할까

정신 분석이란 안을 들여보는 렌즈와 같다. MRI로 우리 몸을 들여보듯 정신분석은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프로이트의 의자>라는 이 책을 이번 기회에 한 번 더 읽으면서 조커라는 사람 이 어떤 심리를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해보려 한다. 나는 전공자도 아니며 책의 정보들을 가지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고 문제점과 방향성을 생각해봤다. 프로이트의 의자에 앉아서 그가 만든 개념을 가지고 한번 생각해보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는 우리 내면을 무의식, 전의식, 의식으로 구분한다. 모두가 많이 들어본 단어 일 것이다. 무의식은 쾌락 원칙으로 운영되어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려 하 방향성을 가지며 의식은 지금 현재 보고 느끼는 것으로 논리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전의식이란  우리가 일상에서 기억하는 정보들과 지식으로 무의식과 의식의 다리 역할을 한다. 무의식과 의식의 교류는 원활하지 않다. 왜냐하면 각 국경에는 통 행문을 지키는 경비대가 있듯이 우리의 내면은 무의식이 추구하는 욕구(성적 욕구와 공격성, 애착 등)는 자신이 추구하는 욕망들이 드러내는 것을 전의식 전에 막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드러나지 못하게 항상 감시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우리의 무의식을 알아 치리 기는 쉽지 않다.   


이 무의식과 전의식, 의식 이론을 프로이트는 이후에 더 세련되게 다듬었다. 이드 , 초자아, 자아의 개념이다. 이드는 이전에 말한 무의식의 개념으로 보면 된다. 쾌락을 추구하려는 욕구와 소망들을 의미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욕구만을 추구하는 것들이 이드의 실제적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초자아는 말 그대로 나의 위에서 나를 감시하 야단치는 자아이다. 나를 잔소리하며 혼내는 어머니와 선생님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초자아는  내가 양심적으로 행동하는지 또는 자신의 이상대로 행동하는지 계속해서 감시하고 교정을 요구한다. 욕구만을 추구하는 존재는 어린아이 같이  것이고 자기 자신을 높은 기준에 감시받는 사람은 매우 위축되고 우울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를 중재하기 위해 협상하고 주체적인 선택을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이 바로 자아가 된다.


우리가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모든 이유는 이 이드와 초자아, 자아의 서로 간의 갈등에서 야기된다. 조커는 어떤 갈등이 있었고 어떤 방향으로 자신의 고통에 몸부림쳤을까?


조커는 아서 플랙이 아니다. 조커는 날뛰는 아서 플랙의 이드다.

아서 플렉의(조커)의 욕구는 이러하다.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에 인정받고 싶었다.  코미디로 사람을 웃기고 싶었다.  같은 층의 여자 와에게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무시하고 폭행하는 사람들에 공격성을 가지고 있었다. 무의식은 알아차리기 힘들다고 위에서 설명했는데 이러한 조커의 이드(욕구)를 어떻게 알 수 있었냐고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드는 그의 환상을 통해 계속해서 드러나게 된다. 참고로 무의식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자신의 모습의 보여주게 되는데 낮에는 환상 즉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는 상상을 통해 그리고 밤에는 꿈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아서 플랙의 무의식적 욕구는 이 화상에서 그의 환상을 통해 드러나게된다.


 그의 이드는 계속해서 거절된다.  그는 자신의 불운하고 성실하려 한 그의 삶에 인정받지 못했고 자신의 코미디는 항상 재미가 없었으며 같은 층의 여자에게는 제대로 다가가가 보지도 못했다. 약골 같아 보이는 그는 남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다.  그가 현실을 그나마 지켜낼 수 있었던 직장에서 까지 잘리게 되면서 그의 욕구불만은 폭발로 까지 어이 지게 된다.  나아가 지하철에서의 폭행 사건은  그의 억압된 이드의 욕구의 분화산을 터트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만다. 


 그를 억압하던 초자아와 자아의 틀은 깨지기 시작한다. 도덕적인 윤리적 모습과  유명 토크쇼의 진행자 머레이 프랭클린과 같은 그의 이상은 점점 사라져 감을 영화를 보 느낄 수 있다. 그는 욕구대로 행동한다. 기존의 초자아는 없고 욕구만으로 행동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돼버리고 만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욕구가 있다고 프로이트는 설명한다. 리비도(성적 욕구)와 그 타이 토스( 공격적 본능)이다. 타이 토스(공격성)라고 해서  분노하는 사람의 특이한 욕구라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잘못된 선입견이다. 모두에게 공격적 본능이 있고 이는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하며 사실은 유머의 동력도 사실  타이도 르(공격성)로 이루어진다.  아서 플렉의 공격성은 계속해서 억압되었거자신을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존의 초자아의 틀은 부서지면서  사람들을 향하게 된다.

이 모든 이야기들늘 간단히 설명하자면 범죄로 양심이 무뎌지는 것이 조커의 모습이다. 그 무뎌진 양심으로 조커는 자신이 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자유하려 .


한 번의 살인을 저질렀지만 그를 붙드는 기존의 초자아는 아직 존재했고 조커라는 인물은 되지 않았다. 영화가 진행되며 더 큰 고통의 계기가 생겼다. 자신은 토마스 웨인의 아들도 아니고 지금의 어머니의 아들도 아니며 정신병에 걸린 어머니에게 단순 입양되었으며 입양된 후에도 아동 폭행을 당하며 현재의 지금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들으며 그의 정체성과 내면에는 큰 타격이 오게 된다. 기존 초자아(양심)가 없어진 그는 그의 커다란 충격에 큰 망설임 없이 어머니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연속된 살인을 통해 그를 억압하는 초자아(양심)는 거의 모든 부분이 사라지게 된다. 그는 양심과 자기 이상이라는 초자아의 틀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이드 자체인 조커가 되어 자신의 틀을 부수어버린다. 영화 말미에 남들이 웃지도 않는 개그를 하면서 웃고 그가 그토록 존경했던 자신의 이상 머레이 프랭클린을 총으로 쏘는 장면은 그의 기존에 가지던 초자아(양식과 자기 이상)의 틀을 완전히 부수어 없애버렸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조커는 아서 플랙이 아니다 활개 치는 그의  이드 그 자체이다.



고통으로 깨져버리는 자 , 고통으로 성장하는 자

 물론 이드 자체가 되기로 결정한 것은 그의 자아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자아란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선택하며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주체이며 삶의 개척자이다. 그래서 보통은 고통의 순간에 자아는 성장한다. 용광로에서 철이 다듬어지듯 시련에 자아는 더욱 견고해진다. 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대표적 사례는 같은 유니버스 안에 존재하는 베트맨이다. 브루스 웨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독배를 마시고 큰 성장의 발판으로 딛고 일어선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의 죽음을 목격했으며 고담시의 어두움을 직접 경험한다. 하지만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고 그의 자아는 더 강인해지고 단단해진다. 하지만 조커는 자신의 삶의 초자아의 틀을 깨부수어버리고 마지막 그의 장면은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자아의 실체 또한 없어진 것처럼만 보인다. 조커의 자아는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독배의 잔을 깨트린 것처럼 보인다. 욕구로서 존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틀을 삶을 깨뜨려 버린 것이다. 하지만 베트맨은 성장하고 성숙해져 더욱 단단해지고 강인해지게 된다. 나는 이 두 인물을 프레질과 안티 프레 질의 대표적 사례로  충분히 비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프레 질은 쉽게 깨지는 것을, 안티 프레 질은 충격에 더 강인해지고 단단해짐을 의미하는데 조커는 꺠져버린 프레질이었지만 베트맨은 더욱 강인해진 안티프질이었다. 



그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조커의 삶에 어떤 해답이 있는지 이 책의 내용을 가지고 생각해봤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이드와 초자아 자아의 갈등에서 살아남기 위해 방어기제라는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는 욕구의 분출이라는 행동화라는 미숙한 방어기제를 사용하였다. 그의 미숙한 방어기제는 그의 삶을 산산이 깨트리고 만다.  

그의 외로운 삶에 어떤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 그는 외로움보다는 고독을 선택해야 했다. 외로움은 고통이다. 자신의 내면의 상태의 자신과의 현재의 단절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독은 다르다. 고독은 자신의 내면에 대한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고독은 외로움과 반대로 혼자 있는 즐거움이 될 수 있다. 그는 자신에게 억압되어 있는 내면과 대화할 줄 알아야 했다. 그가 원하는 욕구가 무엇인지 자신의 분노와 인정 그리고 애착의 감정들의 실체가 무엇이고 그것이 왜 나의 이드가 되었는지 생각하며 자신의 문제에 대한 성숙한 이해와 방어기제를 만들었어야 했다. 즉 자아가 단단해지는 시간을 그는 가졌어야 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다.  고독의 순간이 없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의 극한으로 밀어붙혀진다면 자살이라는 자신을 공격하는 최고의 종착점에 이르거나 극소수는 조커처럼 행동 게 될 수 있다.

 고독해져야 한다. 고독하라고 외톨이로 살라는 것이 아니다. 고독은 세상과의 연결을 생각하는 혼자만의 시간이다. 고독은 단절되어있는 자신과 자신의 연결이고 니와 끊어져 있는 세상과의 연결을 준비하며 직접 이어가는 능동적인 시간이다.  보통은 외롭고 고통스럽고 공허해서 연인의 사랑과 탐닉 또는 일중독 찾아서 자신의 고통을 잊으려고 한다. 하지만 연인의 사랑은 계속 식어 갈 것이고 탐닉은 새로운 탐닉을 만들 것이고 일중독은 언젠가 자신을 혼자가 되게 하며 자신을 언젠가는 더 힘들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건 내면 세상과의 연결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조커가 된 자신이 진짜 자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진짜 자신이 아니다. 그는 그의 고독으로 자신의 내면과 세상과의 연결을 만들어  진짜 인간 아서 플렉만들 수 있었다. 안타깝다. 그를 조커가 되게 한 것은 그의 자아의 책임도 있지만 그런 고통스러운 그를 이해해주지 못하고 내면과 세상의 연결을 만들어주지 못한 세상의 책임 있다. 나와 나를,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연결점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모든 것이 돼줄 수는 없지만 자신의 내면과의 연결 그리고 나아가 세상과의 연결을 알려주며 함께 연결이 되어줘야 한다. 마음의 안타까움과 함께 책임감과 마음속 깊은 열정을 품은 사명감이 든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조커(이드)가 아닌  이드 초자아 자아로서의  건강한 조화와 세상과 내면의 바른 연결을 만  강한 자아로서 성장하길 기대하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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