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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의 충돌

필립의 여자친구라는 타이틀

by Chlo

파리에서의 두 번째 달은 첫 달과는 다른 리듬으로 흘러갔다. 더 이상 모든 것이 새롭고 신비롭지만은 않았다. 클로에는 이제 몽마르트가 보이는 사무실의 자신의 자리에 익숙해졌고, 매일 아침 메트로에서 내리는 출구도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었다.


"오늘 아침 회의에서 신규 클라이언트 프레젠테이션을 담당해주었으면 해요, 클로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장-뤽이 클로에의 책상 앞에 멈춰 서서 말했다. 출근 한 달이 지나자 그는 클로에에게 더 많은 책임을 맡기기 시작했다.


"제가요?" 클로에는 놀라서 물었다.

"당신의 시각이 필요해요. 이번 클라이언트는 아시아 시장 진출에 관심이 많거든요."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에는 불안함이 일었다. 이것은 그녀의 능력을 인정받는 기회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아시아 전문가'라는 프레임에 갇히는 것 같았다.


"클로에, 당신의 프레젠테이션은 정말 훌륭했어요."


회의가 끝난 후, 마케팅 책임자 소피가 클로에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40대 초반의 우아한 파리지앵으로, 아틀리에 크레아티프에서 10년 이상 일해온 베테랑이었다.


"고맙습니다, 소피." 클로에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과 필립이 상하이에서 함께 일했다고 들었어요. 그가 당신을 추천한 이유를 이제 알겠네요."


그 말에 클로에의 미소가 약간 굳었다. 또 다시 '필립의 추천'이라는 언급이었다. 그녀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


점심 시간, 클로에는 필립과 사무실 근처의 카페에 앉았다.


"소피가 내 프레젠테이션을 칭찬했어요. 하지만..." 클로에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필립이 물었다.

"또 당신이 날 추천했다는 말을 했어요. 내가 여기 있는 건 내 실력 때문이 아니라, 당신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필립은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클로에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네가 얼마나 뛰어난지 아직 모를 뿐이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클로에는 필립의 말에 안심하려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불안했다. 그녀는 그저 '필립의 여자친구', '상하이에서 온 아시아 디자이너'로만 보이는 것이 싫었다.


파리에서의 생활이 두 달째에 접어들면서, 클로에와 필립의 관계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초기의 설렘과 호기심은 이제 더 복잡한 감정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들은 서로의 생활방식과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마찰점을 더 많이 발견했다.


"오늘 저녁에는 집에서 요리할까요? 내가 상하이식 덕 누들을 만들어 볼게요," 클로에가 제안했다.

"음... 오늘은 새로 오픈한 와인 바에 가보고 싶었는데," 필립이 망설이며 말했다. "샹제리제 근처인데, 평이 정말 좋아."


이런 작은 의견 불일치가 점점 더 자주 일어났다. 필립은 파리의 사교적 생활을 즐겼고, 즉흥적인 계획 변경을 좋아했다. 반면 클로에는 더 규칙적이고 계획적인 일상을 선호했다. 그녀는 매주 운동 일정을 정해두었고, 일과 휴식의 경계를 명확히 했다.


"넌 항상 계획대로만 하고 싶어하네," 어느 날 필립이 불만을 토로했다.

"당신은 항상 마지막 순간에 계획을 변경해요," 클로에가 대답했다.


그들은 웃으며 서로를 껴안았지만, 둘 다 이 차이가 단순한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였다.


"이번 주말엔 내 친구들을 소개하고 싶어," 필립이 제안했다.

클로에는 긴장했지만 동의했다. 토요일 저녁, 그들은 마레 지구의 작은 비스트로에서 필립의 대학 친구들과 만났다. 모두 친절했지만, 대화는 역시 주로 프랑스어로 이루어졌다.


"필립의 중국인 여자친구는 정말 예쁘네," 한 여자가 프랑스어로 말했다.

"클로에는 중국계 미국인이야," 필립이 정정했다.

"아, 그래? 상하이에서 만났다고 했잖아,"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클로에는 미소지었지만 내심 불편함을 느꼈다. 그녀에게 파리는 여전히 이방인의 도시였고, 그녀 자신은 '필립의 여자친구'라는 정체성에 갇힌 듯했다.


"샹하이에서는 어땠어요?" 필립의 다른 친구가 클로에에게 물었다.

"흥미로웠어요. 정말 역동적인 도시죠," 클로에가 영어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떠났어요? 파리는 아시아보다 훨씬 느리잖아요."

클로에는 잠시 생각했다.


"제가 온 것은 필립 때문만은 아니에요.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죠. 아시아와 유럽의 크리에이티브 접근방식은 매우 다르니까요."


필립은 클로에의 말을 들으며 미소지었지만, 그의 표정에서 클로에는 무언가 미묘한 불편함을 감지했다. 그것은 마치 그가 '내가 아니었다면 너는 파리에 오지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직장에서도 클로에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려 노력했다. 장-뤽은 그녀에게 럭셔리 화장품 브랜드의 글로벌 캠페인을 맡겼다. 이것은 그녀의 실력을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클로에, 당신만이 이 프로젝트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어요. 중국, 일본, 한국의 소비자들이 럭셔리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당신의 관점이 필요해요."


클로에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밤을 새워 작업했고, 동서양의 미학을 조화시킨 비주얼 컨셉을 발표했다. 팀의 반응은 놀라웠다. 프랑스 디자이너들도 그녀의 아이디어에 감탄했다.


"역시 클로에답네," 필립이 귓속말로 말했다.

칭찬이었지만, 클로에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클로에답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애매했다. 그녀의 동양적 감성? 아니면 그저 필립이 기대했던 실력?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고, 클로에는 점차 팀 내에서 자신만의 입지를 다져갔다. 하지만 그녀의 역할은 여전히 '아시아 시장 전문가'로 한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정체성 중 하나였지만,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은 아니었다.

파리에서의 생활 3개월 차, 클로에와 필립은 그들의 첫 만남 기념일을 축하하기로 했다. 필립은 에펠탑이 보이는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오늘 밤 특별한 저녁을 준비했어," 그가 아침에 말했다.


클로에는 그날 하루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록 파리에서의 생활이 그녀가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필립과의 관계는 여전히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날 오후, 클로에는 사무실에서 늦게까지 작업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필립의 메시지였다.


"오늘 밤 우리의 '파리 3개월' 기념 저녁을 취소해야 할 것 같아. 중요한 일이 생겼어. 나중에 설명할게."


클로에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에는 필립이 약속을 취소한 적이 거의 없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까?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작업을 계속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처음으로 그들의 관계에 위기가 찾아왔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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