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의 골든타임
*본 소설은 허구이며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 학교, 학원이름, 인물 등은 실제사건과 관계 없습니다.
지영은 점심시간이 끝나갈 즈음 폴바셋 아이스크림 라떼를 사 들고 자리로 왔다.
팔에 걸친 트렌치코트는 새로 장만하고 다섯번이나 입었을까 싶은데 벌써 날이 더워지고 말았다.
격정적인 한 달여였다.
새로운 수학학원으로 옮기고 난 뒤 통 집중력이 떨어져보이는 민재.
J 학원의 석연치 않은 레테 탈락.
이유를 모르게 지영을 외면하는 채윤엄마.
성대경시 입상 실패까지.
그 모든 일이 일어난 게 두 달이 채 안 된다는 것이 믿을 수 없다.
비록 성대경시 입상권에 안 들어가서 자존심을 구겼지만 수학 과외 선생님을 구하고 다시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하루하루 심장이 조이고 멀미가 나는 듯한 그 기분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민재야, 자세 똑바로.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흔들거리는 민재의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영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목을 좌우로 돌렸다.지영 역시 사무직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북목으로 인한 어깨, 목덜미 통증을 달고 산다. 어릴 때부터 자세를 똑바로 하지 않으면 고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민재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
엄마, 나 화장실 가도 돼?
Cctv 카메라를 쳐다보며 민재가 말했다.
'알아서 가면 되지 별걸 다 물어.'
응, 얼른 갔다 와.
엄마, 문 잠갔어?
엄마, 문 잠갔나 내가 확인해보고 올게.
민재는 아까부터 문이 잠겼는지 대여섯 번째쯤 확인하고 있다.
엄마, 변태가 뭐야?
공부하기 싫으니까 별 질문을 다 한다는 생각에
지영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입을 닫아 버렸다.
이제 곧 외근 나갔던 최 팀장이 돌아올 시간이다.
민재야, 그만 물어보고 그런 사소한 건 네가 좀 알아서 해. 공부하기 싫으니까 별 걸 다 물어봐. 네가 질문할 시간만 모았어도 수학 문제 두 페이지는 더 풀었겠다!
짜증이 난 지영은 날카롭게 내지르고는 cctv창을 닫아 버렸다.
'으이그, 안 봐야 살지.'
민재에 대해 신경 끄고 이제 일에 집중하려고 기지개를 쭉 켰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 피씨 카톡 알림이 빼꼼 들이민다.
채윤 엄마 완전 또라이잖아요. 순진한 엄마들 등쳐먹어서 지 명품사는데…
'헉, 이게 무슨 소리야.'
서둘러 확인하려 마우스를 고쳐 잡는데 어느새 자리에 온 최 팀장이 지영을 호출했다.
이과장, 내 자리로 좀 와봐요.
'아오, 진짜 아무튼 도움이 1도 안되지, 저 인간.'
지영을 툴툴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나 최 팀장에게 향했다.
역시나 최 팀장의 호출은 별 볼 일 없는 사안이었다.
지영은 자리에 궁둥이를 붙이기도 전에 마우스를 잡고 카톡창을 클릭했다.
제일 상단에 민재네 반톡이다.
'헉, 누가 설마 반톡에다 대놓고 채윤 엄마 욕을..?'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이유도 모르게 지영을 외면하는 채윤 엄마에 대한 욕이라니 지영은 왠지 신나는 마음마저 들었다.
서둘러 더블클릭하자 메시지가 보였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워킹맘인 게 가장 서러운 순간이었다.
도대체 누가 보낸 걸까 프로필을 키워봤다.
'아 맞다. 오픈채팅이지.'
프로필에 사진이 걸려 있지 않아 누구인지 추측할 수 없었다. 왠지 김 샌 느낌이었다.
'이런 메시지를 보낼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일부러? 아니면 실수로?'
꺼림직한 상상은 계속 커져만 갔다.
'혹시 이거 설마 내가 썼다고 오해받는 거 아니야?!'
생각이 거기에까지 이르자 조금 전까지 신났다 안타까웠던 지영은 이번엔 갑자기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후우, 후우..
지영이 심호흡을 하는 사이 카톡 알림이 하나 더 울렸다.
어머님들, 우리 다들 대학 나오고 배운 사람들이잖아요.
누군가 실수로 보내셔서 깜짝 놀라 삭제하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앞에서건 뒤에서건 수준 이하의 대화는 주고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역시 지금은 좀 불편한 사이지만 채윤 엄마, 리더십은 있네.'
채윤 엄마에게 괜찮냐는 개인톡을 보낼까 했지만, 오히려 도둑이 제발 저리는 것으로 오해를 살까 싶어 지영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 지영은 이른 퇴근을 위해 간만에 초능력을 발휘해 일을 마쳤다.
여행 갔을 때 숙제를 빨리 마치고 놀기 위해 집중하던 민재 모습이 스스로에게 오버랩 되었다.
으이그, 평소에 이렇게 공부를 해봐라, 서울대는 그냥 가지.
민재를 갈궜던 지영 모습이 떠올라 지영은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오늘은 끝나고 민재 많이 칭찬해줘야지.'
민재맘, 여기에요.
민재의 SMP 학원 레벨테스트를 위해 지영은 그토록 서둘렀다.
아이들은 학원에 넣어 놓고 엄마들끼리 1층 치킨집에서 모였다.
후라이드랑 골뱅이무침 시켰어요. 괜찮죠?
사장님 여기 500 한잔이요!
언제부터 와서 마셨는지 모를 아린맘은 벌써 얼굴이 벌겋다. 저 가녀린 몸에 술이 저렇게 많이 들어갈 데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아린맘 옆에 앉자 맞은 편에 앉은 두 엄마가 보였다.
대치로 이사 간 하은맘과 국제학교로 보낸 이안 엄마였다.
어머,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모두 민재와 같은 영유를 나온 멤버였다. 딱히 구분 지었던 건 아니지만 제일 똘똘하다고 묶였던 아이들. 하은이는 채윤이와 함께 대치동 영어학원 특강도 함께 들으러 다녔었다. 초등학교 입학하면서 대치로 이사 간 뒤로는 연락이 끊겼었다.
하은맘, 대치로 이사 가시고 처음 뵙네요.
대치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시키죠?
그래도 하은이는 워낙 야무져서
잘 따라갈 거 같아요. 좀 어때요?
아유, 뭐 여기나 거기나
애들 열심히 시키기야 똑같죠 뭐.
그래도 거긴 좀 각자도생 분위기라 엄마들 몰려다니는 건 그나마 좀 덜한 거 같기도 해요. 여기 살 땐 그것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받았어서.
아하하, 그러셨구나. 그런 스트레스가 있으신지는 전혀 몰랐네요. 그런데 하은이랑 이안이도 오늘 SMP 레테 보는 거예요?
지영의 질문에 바사삭 닭다리를 한 입 깨물던 하은맘이 냅킨으로 입가에 배어 나온 기름을 슥 닦고 대답했다.
여기 원장님이 대치에서도 유명한 분이에요. 그런데 원장님 반을 대치에서 들으려니
시간이 안 맞았는데 마침 아린맘이
여기서 팀 꾸린대서요.
여기 떠날 땐 꼴도 보기 싫었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 앉아서
닭다리를 뜯고 있네요, 제가.
아하하, 그러시구나.
아무리 그래도 이 동네 계속 남아서 사는 지영과 아린맘에게 꼴도 보기 싫었던 동네라니. 대치로 간 우월감이라도 내비치는 건가 싶어 지영은 기분이 언짢았다.
이안이 하키는? 잘하고 있어? 인스타 보니까 뭐 대회도 나가고 그러는 거 같던데?
조용히 맥주만 들이켜고 있던 아린맘이 이안 엄마에게 근황을 물었다.
휴, 말도마. 하키뿐이야?
펜싱에 ,승마에.
내가 영어에 미쳐서 애 국제학교로 뺐더니
진짜 돈도 돈이고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너무 힘들어.
그 와중에 사계절 방학이 있질 않나.
근데 또 막상 학기 중에는
쏟아지는 숙제들이, 후.
나 진짜 정신과 약을 입에 털어 넣지 않으면 애 숙제 봐주지도 못한다니까.
숙제 봐주기 전에 아주 의식이야.
이안 엄마는 손목 스냅을 꺽어 가며 약을 입에 털어 넣는 시늉을 익숙하게 해보였다. 아린맘은 그런 이안 엄마가 안쓰럽다는 듯 이안 엄마의 팔을 문지르며 이야기했다.
그럼 그냥 우리 애들 다니는 초등학교로
다시 들어와.
안 그래도 진지하게 고민 중이야. 그런데 또 한국 입시 할 생각하면 깝깝해.
정신과 약 먹는다는 소리를 저렇게 당당하게 한다니. 이런 게 문화차이인가 싶어 지영은 젓가락을 쥔 손으로 골뱅이 소면만 돌돌 말고 있었다.
그런데 채윤 엄마랑은 연락해요?
하은맘의 지영을 향한 거침없는 질문에 방금 입에 와앙 넣은 소면이 목에 탁 걸릴 뻔했다.
서둘러 소면을 씹고 맥주를 벌컥 마셔 넘기며 대답했다.
아, 채, 채윤..엄마요?
얼마 전까지 수학학원 같이 묶자
뭐 그러셨었는데
요즘엔 연락이 없으시네요.
하, 그 사람 진짜. 여전하네.
내가 정말 이제 떠났으니까 하는 말이지.
어찌나 하은이 입는 옷, 뭐 머리핀.
그런 거 하나 가지고도 비교해대고
은근히 기 싸움을 해대는지
안 그래도 대치갈까 고민이었는데
학을 떼고 이사 갔잖아요, 내가.
보니까 나 말고도 그 엄마 땜에
여럿 이사 간 거 같더라고.
대치가고 나서도 그런 엄마들한테
또 휘말릴까 봐 마침 코로나이기도 하고
일부러 엄마들이랑 안 가까워지려고
더 거리를 둬요.
코로나가 좋은 점은 그거 딱 하나네.
지영은 혹시나 주변에 채윤 엄마 아는 사람이라도 들으면 어쩌나 싶어 주위를 살폈지만 하은맘은 눈치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민재 엄마는 워킹맘이기도 하고 아들 맘이라 아마 자세한 건 잘 모를거에요. 민재가 잘하니까 끼고 다니는 거 같더라고요.
지금까지 혹시나 누가 들을까 좌불안석이었지만 민재가 잘한다는 말만큼은 기분 좋았다.
아린맘, 이 동네 계속 살았다면서요.
채윤 엄마랑도 중학교도 같이 나왔다고
들었는데 학교 다닐 땐 그 엄마 어땠어요?
하은맘은 오늘 채윤 엄마의 뒷담을 하기로 작정한 모양인지 아린맘에게 채윤 엄마의 과거까지도 캐물었다.
사장님, 여기 500 하나 더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던 아린맘은 맥주 한잔을 추가하고 나서야 답했다.
뭐 그냥 조용하고 존재감 없는 애였던 거 같아요. 다꾸 같은 거 열심히 하고.. 공부도 뭐 엄청 잘하는 건 아니지만 나름 상위권이기는 한.
어머,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애들 레테 끝났겠어요.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던 터라 지영은 말하며 동시에 자리에서 엉덩이를 뗐다.
전 원장님께 결과 따로 듣기로 했어요. 전 여기서 더 마시고 있을 테니까 가서 결과 듣고 이리 와요.
아린맘의 말에 나머지 세 엄마는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학원이 있는 6층을 꾹 눌렀다.
어, 엄마..
하얗게 질린 얼굴의 민재가 지영을 향해 다가왔다.
어, 민재야. 레테가 많이 힘들었어?
여기가 워낙 잘하는 애들이 모이는 곳이라
레테가 엄청 어렵다고 하더라.
집에 가 있어.
지영은 안쓰러운 마음으로 민재를 먼저 보내고 상담실에 들어가 앉았다.
음.. 민재가 아린맘이 얘기한 것만큼 막 잘하는 건 아니네요? 영유에서 나름 탑이었다고 하던데 초등 가서 좀 신경을 덜 쓰셨나 봐요. 그래도 가능성이 보이고 아린맘 픽이니까 믿고 끌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원장의 피드백에 지영의 자존심이 한껏 상했다. 학원의 간택을 받았다는 묘한 안도감과 뒤섞여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모를 복잡한 기분이었다.
원장의 설명을 듣고 나온 하은맘과 이안 엄마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을 눌렀다.
민재 엄마 오랜만에 반가웠어요. 우린 애들 데리고 가야 해서. 다음에 개강하면 또 봐요.
호구 노릇 그만하고.
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반사적으로 대답했지만 하은맘은 지영의 어깨를 꽉 잡으며 얼굴을 찡긋하더니 지하 3층 버튼을 눌렀다.
1층에서 내린 지영은 밖으로 걸어나와 아린맘에게 가보니 그 사이 술을 꽤 더 마신 모양이었다.
민재엄마, 여기 앉아. 더 마셔요.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아린맘이 휘청였다.
아린맘, 이제 집에 가야죠. 너무 취했어요.
무슨 소리예요. 집에 아린 아빠가 출장 갔다 사 온 와인 기가 막힌 거 있어요. 그럼 우리 집 가서 한 잔 더 해요.
먼저 일어난 아린맘은 내려간 카디건 한쪽을 끌어올리며 걸어갔다.
뒤따라 일어나려는데 맥주잔과 뻥튀기 그릇, 구겨진 냅킨 사이 아린맘의 핸드폰이 보였다.
아린맘, 여기 핸드폰 안 챙겼어요.
핸드폰을 잡아 드려는데 카톡 알림이 왔는지 화면이 켜졌다.
그년 좆밥이었던게 존나 기어오르네.
걔 엄마들 팀 묶어 준다고 하면서
지 딸 교육비 안 내서
그 돈으로 백화점 다닌다매.
별거 아닌게 찐부자들 사이에 끼어보겠다고 잘 사는 척 오지게 하더라.
지영은 순간 내가 뭘 본건가 싶어서 숨을 꼴깍 삼켰다.
아린맘, 민재랑 민재 아빠가 아직 저녁을 제대로 못 먹어서 저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저흰 다음에 또 봐요.
아린맘에게 핸드폰을 쥐여주고 지영은 급하기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호구 노릇. 교육비 안내서 백화점 다닌다.. 혹시 이거 다 채윤 엄마 이야기고 그 호구가 난 건가.'
집으로 가는 내내 온갖 상상이 지영의 머릿속을 덮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지영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지금까지 민재가 교육비를 내고 채윤 엄마는 돈 한 푼 안 냈다 하더라도 민재가 원래보다 교육비를 더 낸 건 아니기 때문에 딱히 할 말도 없다. 다만 평소 지영은 돈 아까워 살 엄두를 못 냈던 채윤 엄마의 옷들을 사는데 지영의 돈도 일조했다는 생각에 속이 상당히 쓰린 것은 사실이었다.
지영은 어젯밤 수학과외 선생님이 해준 말이 떠올라 일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어머니, 민재가 수업 도중에 화장실을 총 14번 갔어요. 제가 한 다섯 번째부턴 일부러 한 번 세어봤습니다. 그리고 손은 꼭 세번씩 씻어야 한다고 안나와서 어제 수업시간 내내 거의 화장실에 있느라 제대로 수업할 수가 없었어요.
학원에서도 민재가 계속 책상 밑에서 손을 가만두지 못한다고 하긴 하더라고요. 어머니께서 신경 좀 써주셔야 할 것 같아요.
'과외선생님이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겠지.'
민재의 행동을 관찰하려고 CCTV창을 켰다. 사소한 것까지 계속 물어대는 민재의 질문에 지쳐 한동안 꺼두었던 창이었다.
역시나 발을 올리고 있는 민재의 천연덕스러운 포즈에 지영은 어이없으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멀쩡하구만, 오바는.'
민재야, 다리.
하도 많이 반복했던 말이라 그 말만 들어도 민재는 바로 다리를 내렸다.
민재야, 너 수학꿈 갈 시간이다. 우유 한 잔 마시고 얼른 가.
CCTV창을 끄고 지영은 남을 일을 했다.
민재 문제로 한동안 일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었다. 뒷덜미가 욱신거렸다.
이른 퇴근에 오늘은 모처럼 민재가 좋아하는 돼지고기 김치찜을 할 생각으로 집 앞 정육점에서 돼지고기를 한 근 사 들고 도어락을 열었다.
수학꿈학원에 있어야 할 민재가 전실에 앉아 있었다.
민재야, 너 학원 안 가고 여태 여기 앉아서 뭐 해.
민재는 대답하지 않고 우물쭈물했다.
민재야! 엄마 말 안 들려?
너 학원 아예 안 간 거야? 왜 안갔어??
대답을 안 하는 민재의 모습에 지영은 돼지고기가 담긴 검은 봉지를 집어던지며 악을 썼다.
너 진짜 요즘 왜 이래! 엄마가 미쳐 돌아버리는 꼴 보려 그래?!! 어? 으아악!!
그동안의 그 어떤 순간보다 지영이 가슴 밑에서부터 끈적이는 타르같은 감정들이 울컥거리며 올라왔다.
어, 엄마. 미안해. 시, 신발 찍찍이가 내가 원하는 데로 붙질 않아서 그거 계속 하느라..
뭐? 신발? 뭐? 니가 학원 가기 싫으니까 진짜 이젠 별 핑계를 다 대는구나? 어?!
그깟 신발 아주 찍찍이를 잘라버리든가 해야지. 가위 어딨어.
전실에 택배 상자를 열 때 쓰려고 두었던 가위를 찾아 신발장 문을 거칠게 열었다. 드라이버와 구두약 틈에서 가위를 찾아들고 씩씩거리며 민재의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누런 액체가 민재의 신발 주위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이거 뭐야. 민재야.
너 이거 오줌이야?
원은 점점 커졌다.
엄마, 미, 미, 안해.
바지에 세로줄 무늬로 오줌을 적신 채 울고 있는 민재를 보며 지영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민재야.
지영은 민재를 끌어 앉고 한참을 울었다.
시계를 보니 곧 남편이 들어올 시간이다.
민재야, 곧 아빠 오시겠다. 오늘 학원은 됐고, 옷 여기다 벗어 놓고 들어가서 씻어.
꺼냈던 가위를 서랍장에 서둘러 넣고 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닦았다.
지영은 회사에 오후에 출근하겠다고 전화하고 동네 소아정신과로 향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애가 왜 저럴까.
이제는 내 컨트롤을 벗어난 수준이야.'
빼곡한 학원 간판들 사이로 빼꼼히 보이던 소아정신과에 지영이 가게 될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주변에 다른 엄마들이 혹시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 생각하며 소아정신과가 있는 4층을 눌렀다.
민재가 나온 영유와 같은 건물이라 민재가 맸던 그 가방을 맨 아이들과 인솔선생님까지 가득 탔다.
티쳐, 선생님. 저 오늘은 티렉스 보여줄 거예요.
아줌마는 선생님이 아니야. 그래, 친구들이 참 좋아하겠구나.
지영을 선생님으로 착각한 한 아이의 말에 지영은 최대한 상냥하게 대답했다.
'민재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늘 해맑고 야무지게 쇼앤텔을 하던 민재의 유치원 시절 모습이 떠올랐다. 눈물이 나올까 봐 왼쪽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4층에서 내려 소아정신과 자동문 버튼을 눌렀다.
예약하고 오셨나요? 예약자분 성함이요.
저는.. 처음 오는데요.
저희 병원 처음이신가요? 저희 병원은 100% 예약제입니다. 예약 먼저하고 오셔야 해요.
당장 답답해 미치겠는데 예약을 하고 오라니 지영은 원망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지영이었다.
그래요? 그럼 언제 가능할까요?
일반 진료 이신가요? 웩슬러 하러 오신 거면 3개월 정도면 되긴 하는데 지금 신학기라 예약이 많이 몰릴 때라 일반 상담은 최소 6개월은 기다리셔야 하거든요. 11월이나 12월 초에 가능하실 것 같아요.
네?!
지영이 너무 크게 대답하는 바람에 대기실에서 소방차를 가지고 놀고 있던 아이가 깜짝 놀라 지영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의 엄마는 불쾌하다는 듯 지영을 바라보았다. 자기 아이를 놀라게 한 것에 대한 원망인지, 이런 곳에 처음 와보는 초보 엄마에 대한 조소인지 모를 오묘한 표정이었다.
저, 저는 그 정도일지 상상도 못했어요.
전화로도 예약되는 거죠, 그럼?
네.
지영은 일단 그대로 걸음을 돌려 나왔다.
'하아, 요즘은 명품도 무슨 오픈런을 한다더니 정신과도 줄을 서야 하는구나.'
민재 영유가 있는 이 건물 외에는 동네에 소아정신과 아는 곳이 전혀 없다. 지영은 핸드폰을 보며 아린맘의 번호를 찾았다.
뚜루루 뚜루루
네.
저.. 아린맘. 민재엄만데요.
그.. 별건 아니고 혹시 소아정신과나 상담하는 곳 아시는 데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