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조연
*본 소설은 허구이며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 학교, 학원 이름, 인물 등은 실제 사건과 관계없습니다.
금요일 저녁, 현주는 채윤의 피아노 학원이 끝날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입이 짧은 채윤이가 유일하게 잘 먹는 반찬가게에 들려 저녁 찬거리를 샀다.
피아노 학원이 있는 옆 건물 1층 치킨집은 금요일 저녁이면 언제나 엄마들로 만석을 이룬다. 가게 앞 도로까지 다 차지할 만큼 빼곡히 내놓은 테이블에 주말을 앞두고 치맥을 기울이는 엄마들이 가득 들어앉아 있다. 그 옆에 아이들은 핸드폰을 함께 보고 있다. 간혹 이야기를 나누거나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이런 가게 하나 있으면 전문직 안 부럽겠네.
혼잣말을 내뱉으며 걷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은맘, 대치로 이사 가시고 처음 뵙네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하은맘? 하은이? 설마...'
시선이 꽂힌 곳에 민재 엄마와 하은 엄마가 앉아 있었다.
'저 둘이 왜 만났지?
하은이는 분명 대치로 이사 갔는데?!'
채윤이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따라하던 눈엣가시 하은맘이 분명했다. 대치동 카페에 앉아 그렇게 함께 흉 봐 달라고 이야기할 때는 영혼없이 방관하던 민재 엄마가 활짝 웃으며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아니꼬웠다.
건너편에 맥주잔을 들고 있는 아린맘 연지도 보였다.
몇 시부터 마셨는지 이 시간에 이미 얼굴이 벌겋다.
쟤는 이제 아주 알콜 중독이구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민재 엄마의 시야에 들어올까 싶어 어서 상가 복도로 몸을 집어넣었다.
저것들이 왜 모여 있지?
모여 있으면 분명 내 욕할 거 같은데. 하, 씨.
백화점에서 유승훈을 마주쳤을 때 이후 가장 크게 심장이 뛰었다.
민재 엄마는 어차피 친한 엄마 거의 없고
그럼 저 자리는 연지가 만든 자린가?
아니 근데 대치까지 이사 간 하은맘은
대체 또 왜 불렀지?!
짧은 시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띠리리링
엄마, 나 학원 끝났는데 왜 안 와.
수화기 너머 채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응, 응, 엄마 바로 밑이야.
지금 올라갈게.
'그럼 반 단톡방에 욕 남긴 것도 저런 식으로 연지가 사람 모아서 내 육하고 다녀서 그렇게 된 건가.
아니 대체 왜? 내 뭘 잘못해서?'
아무리 생각을 되짚어 봐도 딱히 마음에 걸릴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채윤을 데리고 내려와 치킨집과 반대 방향 출구로 빠져나가 집으로 걸었다.
채윤이 키운 뒤로는 이 동네에서 나름 중심축이 됐다고 느꼈는데 여전히 숨어 다니는 신세라니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다리에 힘이 풀려 후들거렸다.
'아니지, 전에는 나를 우주먼지 쯤으로 신경도 안 쓰던 연지가 나를 욕하고 다닌다는 건 나를 라이벌로 인식했다는 거 아니야.'
학창 시절에는 말 한마디 못 붙였던 연지가 현주를 견제하고 신경 쓰고 있다. 생각이 거기에 까지 이르자 현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가늘게 떨렸다.
엄마, 아린이네 엄마가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해?
꼬리빗에 분무기를 뿌리고 있는데 의자에 앉은 채윤이 거울을 통해 현주를 보며 물었다.
음..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근데 워낙 유명한 사람 많아서
아린이 엄마 정도는 유명한 축에도 못 껴.
그건 갑자기 왜?
꼬리빗 뒤쪽으로 가르마를 나누며 대답했다.
아린이 엄마가 되게 이쁘잖아.
그래서 애들이 좋아해.
나도 엄마가 인스타에서 유명했으면 좋겠다.
아린이는 막 엄마랑 이쁜 옷 맞춰 입고
이쁜데 가서 사진 찍어서 올린대.
'좋아요'도 엄청 받는다던데 너무 부러워.
'아휴 얜 누굴 담아 이렇게 시샘이 많을까.
맨날 지가 최고여야 되고.
어떨 땐 진짜 맞춰주기 힘들다 힘들어.'
구획을 나눠 잡은 머리를 집어 들고 땋으려는데 현주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채윤의 뒷통수 한 쪽 두피가 동그랑게 드러나 있었다.
'이거 설마 원형탈모..?'
채윤의 머리를 잡은 현주의 손이 떨렸다.
아, 엄마아.
나 이제 머리 땋는 거 그만해줘.
아린이처럼 그냥 에어랩으로 컬만 넣어줘.
엄마처럼 머리 땋아주는 거
유치원생들이나 하는 머리 같아서
유치하단 말야.
훤히 뚫린 두피를 보고 심란한 현주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볼멘 소리를 해대는 채윤이었다.
안돼, 채윤아. 날도 더워지는데
그럼 그냥 하나로 묶자.
대신 포니테일 부분은 예쁘게 컬 넣어줄게.
현주는 가장 큰 리본 핀을 꺼내 두피가 드러나지 않도록 머리를 고정했다.
'하, 아린이가 진짜 뭐라고.
채윤이가 훨 이쁘구만.'
나의 모든 것.
나의 공주님.
나의 페르소나.
어딜가나 반짝이는 주인공인 채윤이가 아린이에게 이토록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
현주의 꽉 깨문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엄마, 아린이가 학교에
젤리를 들고 와서 나눠줬는데
그게 아린이네 아파트 상가
편의점에서만 파는 거래.
나도 그거 사줘.
제바알.
아린이와 같은 반이 된 이후로 부쩍 아린이를 신경쓰는 채윤이가 자기 전 또 부탁을 남겼다.
라운딩과 필라테스까지 한 번에 했더니 온몸이 쑤셔 반신욕이나 하고 쉬고 싶었다.간절하게 부탁하던 채윤의 눈빛이 생각 나 현주는 후드티를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그래 우리 채윤이 원형탈모 낫는다면
젤리인들 못 사 오랴.
근데 또 왜 하필 아린이네
아파트 편의점이라는 거야.
그놈의 아린이가 대체 뭔데.
학군지는 다 집값이 비싸지만 그 중에서도 시세를 이끄는 '대장 아파트 단지'는 존재한다.
그 동네의 랜드마크.
아린이네 아파트가 바로 그 아파트다.
현주는 바로 그 옆 아파트 단지다. 바로 옆인데도 불구하고 같은 평형 대비 시세가 5억 이상 차이 난다. 현주 사는 동네를 말하면 모두가 아린이네 단지만 알고 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을 만나면 편의상 그냥 아린이네 아파트에 산다고 대답하는 것이 편하다.
초등학교 조차 아린이네 아파트에 붙어 있어 채윤은 아침마다 횡단보도를 건너 등교한다.
어쩌면 아파트 조차
주인공 옆동네 사는 기분이냐.
더 크게 터덜거리는 게 슬리퍼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옆 단지 편의점으로 향했다.
짤랑
편의점 문을 당기자 문 위에 붙은 종이 울렸다.
어, 아, 안녕하세요.
정면에 맥주 네 캔을 팔에 안은 민재 엄마와 맞닥뜨렸다.
예.
어색하게 건넨 인사에 현주는 떨떠름한 대답을 건넸다.
예전 같았으면 함께 맥주를 나눠 마시며 동네 이야기로 한 시간은 수다를 떨었을 것이다.
'네 캔 끼고 있는 거 보니 또 만원 행사하는 거 샀구만, 궁상맞기는.'
그동안 어떻게 민재 엄마와 어울렸는지 모르겠다.
젤리코너에서 채윤이 말한 젤리를 한 움큼 집어 계산하고 나왔다.
편의점 앞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 민재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지나쳐갈까 하다가 이대로는 속이 시원하지 않을 것 같아 말을 걸었다.
엄마들이랑 뒤에서 내 얘기 했어요?
네…?
별안간 눈이 커진 민재 엄마가 현주를 응시했다.
무슨 말인지…
민재 엄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빛이 흔들리는 거 보니까 모여서 내 욕한 거 맞구나.'
얼마나 몰려서들 욕을 하고 다녔으면 저렇게 눈동자를 떨까 싶어 더욱 가증스러웠다. 붙잡고 따질까 싶었지만 이럴 땐 가장 단순한 말로 상대방의 약점을 후벼파는 것이 가장 강력한 방법이란 사실이 수많은 엄마들을 상대하며 현주가 익힌 것이다.
야릇한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민재 케어나 잘해요.
말을 잊지 못하는 민재 엄마를 두고 돌아섰다.
민재가 구체적으로 어디가 얼마나 문제인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학교도 안 나오고 민재 엄마는 저렇게 혼자 앉아 깡맥주를 마시고 있는 것 보면 가벼운 상황은 아닐 것이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이 한마디로도 충분히 민재 엄마의 마음은 난도질당했을 것이다.
내가 그동안 지 끼고 다니면서
학원 넣어주고 한 게 어딘데.
이제와서 연지 편에 딱 붙어서
나를 씹고 다녀?
민재 새끼 학교에 다시
발 못 붙일 수 있나 봐라.
아직 다 해결된 건 아니지만 당장 오늘은 최소한의 말로만으로도 충분히 민재 엄마를 무너트렸다는 생각에 현주의 만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린맘 근데 파슨스 졸업하고 어디 계셨어요?
너무 예쁘셔서 디자이너가 아니라
모델 같아 보이셨을 거 같아요.
아린이는 성격이 누구 닮았어요?주목받는 거 좋아하는 스타일인가요?
와인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거의 매일 드시는 거 같네요?
아린이는 미국에서 대학 나온 엄마 덕분에 영어는 문제없을 것 같고,
수학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현주는 부계정으로 아린맘 계정에 댓글을 달았다.
평소 지인들과 사용하는 본계정 외에 인플루언서를 팔로우하거나 리그램용으로 사용하던 계정이었다.
대놓고 공격성이 보이진 않지만 아린맘의 속을 긁기엔 충분한 내용을 담아 댓글을 달고 나면 스트레스가 약간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린맘은 예쁘셔서 학교 다닐 때도 인기 많으셨겠어요. 일진들이 예쁘면 더 끼고 다니고싶어 하잖아요.
오늘치 댓글을 달고 게시 버튼을 누르는데 카톡 알림이 위에서 내려왔다.
내가 대학 졸업 못한 거랑
너랑 무슨 상관인..
헉, 뭐지..?
현주는 하마터면 놓칠 뻔한 핸드폰을 고쳐 쥐고 서둘러 알림창을 눌렀다.
내가 대학 졸업 못한 거랑
너랑 무슨 상관인데
너는 엄마들 학원 팀
묶어 준다고 그래 놓고
채윤이 학원비 아껴서
그 돈으로 너 꾸미는 데 쓴다며.
그거 다른 엄마들이 모를 거 같애?
존나 처절하고 더 없어 보여
핸드폰을 든 채 부들거리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잡아 쥐고 아린맘의 메세를 다시 읽었다.
대놓고 나한테 이렇게 카톡을 보낸 거야?
지금 나랑 한 번 해보자 이거지?!
흐우, 후
거칠어진 심호흡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다시 한번 카톡 창을 보니 개인톡이 아닌 반 단톡이었다.
이걸 여기에 보내?
미친 거야? 아님 전면전 해보자는 거야?
대낮부터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건가?
일단 아린맘의 메시지를 눌러 황급히 메시지를 가렸다.
방장이 메시지를 가렸습니다.
혹시 내가 댓글 다는 거 알고 이러나..?
현주는 서둘러 부계정에 들어가 확인해보았다.
아이디나 사진 등 현주인지 나타낼 수 있는 단서가 전혀 없었다. 우선 계정을 비활성화로 돌려놓고 다시 단톡 창을 확인했다.
메시지 옆에 작게 표시된 숫자가 그새 14개나 줄어들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만이 카톡방을 가득 메웠다.
아린맘이 반 단톡에 욕을 싸지르고 며칠이 지났다.
현주는 그사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열받아 미칠 것 같지만 이렇게 대놓고 욕을 들은 경우는 또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감이 오지 않았다.
그동안 사이가 틀어지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 엄마들에겐 엄마들끼리 모임이나 아이들끼리 팀 짤 때 제외하는 방법을 주로 써왔었다. 그런데 학창 시절부터 워낙 반짝였던 연지이기 때문일까 막상 정면으로 맞서려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것도 일종의 트라우마인가.
커서 알게 된 사람이면
이렇게 어렵지 않았을텐데.
인스타그램을 켰다.
제일 상단에 아린맘의 피드가 떴다.
링겔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링겔 사진은 또 뭐야.
아주 관종 오브 관종이구만.
현주는 아래 적힌 문구를 읽어 내렸다.
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야기해대는 사람들로 인해 마음이 많이 힘드네요.
몸도 고장 났나 봐요.
이 공간을 통해 아린세린이를 사랑해주시는 여러분들도 만나고
행복했습니다.
이제는 좀 쉬고 싶네요.
#입원#링겔#병원스타그램
핸드폰을 쥔 현주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뭐야, 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이거 지금 나 저격하는 거야?
사람들인 거 보니 나 말고도
자기 욕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가.
순간 아린맘 연지의 건강이 걱정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고소하다는 생각이 동시에 엉켜 알 수 없는 감정이 되었다.
아린맘,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아프셔서 어떡해요. 기다릴 테니 푹 쉬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세요.
짐작 가는 사람들이 있네요. 아무튼 다들 진짜 열등감. 아린맘이 이쁘고 잘나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짐작은 무슨 이때다 싶어 아는 체 오지네.
이런 인간들이 꼭 일터지면
원래 쎄했네 어쨌네 하지, 쎄믈리에들.
현주는 입술 양옆을 아래로 내리며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린맘같이 다 가진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혹시 안 좋은 생각하신 거 아니죠?
안 좋은 생각 하길 은근히 바란 눈치인데?
나 같은 인간 여기 또 있네.
현주는 댓글마다 혼잣말로 대댓글을 달며 읽어 내려갔다.
하아, 사는 게 뭔지.
인기 많은 것도 피곤하긴 하겠어.
어머, 내 정신 좀 봐. 시간이 벌써.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부쩍 학원가의 대면 설명회가 다시 활성화되었다.
현주는 초등 학부모 대상 특목고 준비 설명회 일정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