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소소하지만 알면 좋은 것
독일에 간 지 2주가 안 된 어느 날이었다. 대학 입학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나 친해진 같은 반 독일인이 김나지움(고등학교) 친구 무리와 함께 동네 공원에 피크닉을 갈 건데 함께하자고 날 초대했다. 그래서 대학 기숙사 앞 슈퍼마켓에서 그 친구가 독일의 자존심이라며 추천하는 맥주를 사서 함께 공원에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맥주는 이상하게도 독일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흔한 맥주 브랜드였다.
햇살 아래 풀밭에서 해가 져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피크닉을 하다 맥주캔에 적힌 글자가 안 보일 때쯤에 비로소 자리를 정리했는데 한국에서의 습관대로 다 마신 맥주캔을 발로 밟아 찌그러뜨렸다. 그런데 주위에 있던 독일인들의 표정이 희미한 가로등 아래 한순간에 미묘하게 변하는 것이었다.
나를 초대한 그 독일 친구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조금 과한 반응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때는 그 친구의 반응에 이 문화권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코드를 혼자 공유하지 못해서 끔찍한 실수를 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 친구가 그렇게 대답하는 것을 듣고 그 친구의 다른 친구 둘이 "얘, 넌 네 친구한테 그런 것도 안 가르쳐주고 뭐 했어?"라며 독일에서는 캔을 찌그러뜨리지 않고 최대한 원형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해 집에 들고 가서 모아두고 한꺼번에 슈퍼마켓에 가져가 판트 자판기에 넣으면 캔 하나당 25센트를 준다고 했다. 맥주병일 경우에는 8센트인데 위에 마개가 달린 종류는 더 비싸다. 그 시스템을 판트라고 하는데, 독일인들은 공병을 보면 판트!!! 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슈퍼마켓에서 맥주값을 지불할 때 선반에 달린 가격표의 가격에서 25센트가 더 붙어서 나왔을 텐데 확인해보지 않았냐고 물었다. 물론 보긴 했지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잊어버렸는데, 그게 판트였다니.
* 25센트: 최근의 환율 변동과 관련 없이 그간의 평균적인 유로화 가격으로 환산했을 때 1유로가 약 1300원이라고 하면 25센트는 325원 정도.
그 후로 매주 수요일에 빈 생수병과 맥주캔을 장바구니에 한가득 모아담아 300m 떨어진 슈퍼마켓에 들고 가는 건 일상이 되었다. 주말이면 동네 주민들이 아예 쇼핑카트에다 온 가족이 소비한 공병을 모아와서는 판트 요금을 30유로치나 환불받아 가기 때문에 매우 오랫동안 기다려야 해서 평일 저녁 시간대를 이용했다.
이 판트 제도가 독일의 독특한 개성 같은 것으로 자리잡은 건지 얼마 전에는 틱톡 앱에서 이런 영상도 봤다.
너무 웃겨서 몇 번이고 다시 본 영상인데 저기에 나오는 베를린 버전이 독일 어디에나 흔하게 있다.
물론 어디에나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법이니 평범하게 저런 사람들이 있는 반면 공원에서 맥주를 마신 후 벤치 주변에 캔을 한가득 쌓아두고 떠나는 고등학생 무리도 있고, 긴 집게를 들고 다니며 도시 내의 쓰레기통을 뒤져 그런 병을 수집해 판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슈퍼마켓에서 병이나 캔에 담긴 음료를 살 때에는 이 로고가 있는지 확인한다. 가끔 가다 이 로고가 없는 음료를 보면 그렇게 마음이 편해질 수가 없다! 주로 냉장보관되는 과일주스 종류나 리큐어가 담긴 술병, 와인병 종류는 재활용이 안 되는 모양이다.
판트란 것은 이런 공병에만 쓰이는 말이 아니라 도시 축제나 크리스마스 마켓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런 축제에서 맥주나 와인을 사 마시면 잔에 담아준다. 이 잔의 보증금 명목으로 2-4유로 정도를 더 받는데, 이 잔을 그냥 가질 수도 있고 되돌려주고 돈을 받아올 수도 있다. 이 잔이 예쁘고 그 도시만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어서 독일인들 중에는 도시별로 크리스마스 마켓을 돌아다니며 잔을 수집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독일인 친구들은 자기들도 예쁜 잔이 있으면 집에 가지고 오면서도 나에게 "너 또 축제에서 잔을 훔쳐 왔구나?"하며 놀려댔다. 그들은 독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이 신기한 아시안 여자애가 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귀여운 잔에 열광하는 게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이렇듯 판트는 나에게 있어 처음에는 문화충격으로 다가왔지만 나중에는 소소한 즐거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