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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수 Mar 15. 2022

아이를 위한 것이란 명분, 엄마의 책 사재기

책 구매의 기준을 세우다 (책육아_3)

"이게  우리 딸한테 지금 필요한 거야?"


남편의 질문에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그럼~!"하고 당당하게 말하곤 방금 도착한 책 택배 상자를 뜯었다.


책육아의 세계에 한번 발을 내딛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화려한 전집과 전문가의 북큐레이팅으로 엄선된 단행본 묶음, 창작책, 자연관찰책, 수학동화, 인성동화, 생활 이야기, 음악동화.. 수많은 책들이 안 사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을 만들어낸다.


한국어 책만이면 다행이지, 영어책은 또 왜 그렇게 예쁘고 아기자기한지 우리 아이는 영어에 부담 갖지 않고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대한민국 부모의 염원을 한껏 고취시켜 구매 버튼을 누르고야 만다.


처음에는 몰랐다. 우선 제대로 책육아를 하려면 좋아 보이는 책을 잔뜩 사야 하고 그러면 아이는 저절로 책의 바다에 풍덩 빠져 헤엄을 칠 거라 생각했다.




이런 나날이 반복되면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해 사는 것보다 내 만족을 채우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닐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어떤 것도 저절로,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책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는 게 아니라 허우적거릴 수도 있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게 되는 날이 늘어났다.


마침..

"또 책 샀어? 얼마 전에 샀잖아. 좀 나중에 사도 되지 않아?"

라는 남편의 지나가는 무심한 말에 이번엔 당당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스스로도 '이건 지금 당장 보여주기엔 좀 어려울 것 같긴 해. 저건 집에 있는 거랑 좀 겹치는 부분이 있긴 하지.' 이런 생각이 들던 차였기 때문이었다.


각종 공구 혜택을 비교하고 최저가를 찾느라 보낸 시간을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자거나 쉬는 게 나았을 것이라는 건 분명지만 화려한 수식어로 혹하는 광고를 그냥 지나치기란 쉽지 않았다.




내가 책육아를 하는 목적을 다시 상기하고 갈피를 잃은 방향성을 다잡아야 하는 시기였다. 꼭 필요한 계정만 남기고 공구 마켓 계정 팔로우를 취소했다. 눈에 보이면 또 혹할까 봐. 그럼 또 새벽 내내 책 비교하며 내 체력을 축낼까 봐. 육아카페도 불필요하게 기웃거리지 않았다. 다른 아이와 내 아이의 책을 비교하지 않기 위해. 소신 있는 엄마로 살기 위해.


대신 아이를 세심하게 관찰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더 써서 언제 어떤 책을 보여주면 좋을지를 고민했다. 그랬더니 별로 관심 없어하던 책도 흥미를 보였고 어떤 새로운 책을 원하는지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아이와의 교감, 엄마와의 즐거운 추억 쌓기', 내가 책육아를 하는 이유를 다시 되새기니 길이 보였다. 눈에 불을 켜고 좋은 책정보를 얻으려고 각종 카페를 샅샅이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이를 잘 보면 되는 것이었다.


아이에게 읽어주는 시간, 아이가 직접 책을 고르면서 하는 행동, 책장 앞을 서성이며 하는 말에 집중하다 보니,


'아, 이 책들은 많이 봐서 조금 지겨워하는구나.'

'식물, 동물에 관심이 많네. 관련된 책을 새로 보여줘야겠다.'

'예전에는 시큰둥해하던 책에 요즘 관심을 갖네?'

등등..


어떤 책을, 언제 구매해야 할지 적절한 기준이 생겨났고

한동안 새로운 책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책육아는 현재 순항 중이다. 무엇보다 아이와의 이 시간이 물 흘러가듯 자연스러워졌고 마땅히 무언가를 사야만 할 것 같은 조급함과 압박감에서 벗어나 자유롭다.


또 언제 갈대처럼 흔들릴지 모른다. 그때의 나를 잡아주기 위해 이 글을 쓴다. 혹시나 너무 흔들려서 스스로 적어놓은 글을 보지 않고선 초심을 되찾지 못할까 봐서.


그때까진 몰랐다. 책을 너무나도 좋아해서 수시로 끊임없이 읽어달라 그랬기 때문에,

"엄마랑 책 볼까?"란 질문에 "아니야~~ 안 볼 거야."라고 대답하는 딸을 만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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