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 안녕, 안녕히.
외할아버지를 보내드린지도 벌써 2주가 흘렀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말수도 웃음도 적은 편이었다. 우리가 외갓집을 가서 듣는 소리도 '금쪽같은 우리 손녀 왔네'와는 거리가 멀었다. 늘 밥은 제대로 먹냐는, 왜 그렇게 말랐냐는 핀잔이 대부분이었다.
"할아버지 나 살쪄서 예전에 입던 바지가 안 들어가요."라고 말해봤자 소용없었다. 풍채 좋은 할아버지 눈에 손녀딸은 아직도 어리고 여리고 아기 같았을 테니. 어차피 할머니 할아버지 눈에 타향살이 손주들은 늘 밥을 못 먹고 다니는 것이 국룰 아니었던가.
그런 외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뵀을 때는 남산만 하던 배가 어디로 사라진 건지 깡 마른 모습이었다. 뭘 잘 드시지도 화장실을 자유롭게 다니시지도 못했다. 항상 하던 잔소리도 없으셨다. 웅얼거리셔서 내가 잘 듣지 못했거나.
코로나 때문에 그 안타까운 모습을 본 것도 거의 일 년이 다 되어갈 때 즈음 할아버지는 잠이 드셨다. 일 년 동안 손녀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차마 상상하기도 죄송하다. 현실에선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지만 난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에 외할아버지와 꿈에서 만났고 이제와 혹시 그게 미리 한 작별인사가 아니었을까 그리워해 본다. 꿈에서 외할아버지는 예전의 그 푹신푹신한 배로 날 안아주시면서 '이제 괜찮다. 안 아프다.' 하셨다. 온 가족이 모였고 예전처럼 아빠랑 술도 드셨다. 웃음소리가 가득한 정말 행복한 꿈이었다. 꿈에서 깬 뒤엔 이게 꿈이었다는 게 너무 믿기지 않고 슬퍼서 엄마한테 엉엉 울며 전화할 만큼 행복한 꿈이었다.
그때의 꿈처럼 외할아버지가 가끔 웃을 때가 있었다. 내가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거나 재롱을 떨면 근엄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다 포기한 사람의 어쩔 수 없이 피식거리는 입꼬리를 보이곤 했다. 그리고 난 그게 그렇게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만큼 외할아버지도 날 아끼셨다. 단연코 외할아버지는 손주 셋 중에 유독 나를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직접 기른 손녀딸이라 그랬던 거 같다.
엄마 껌딱지였던 언니 덕에 둘째인 나는 가까이 사는 외할머니 집에 자주 맡겨지곤 했는데, 어릴 때부터 외가 손을 타서 그런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특히 좋아했다. 말을 시작했을 땐 ('할아버지'라는 발음이 안되어 '하지'라고 불렀다.) 하지 집에 데려다 달라. 하지 집 가서 잘 거다라고 생떼를 써서 같은 아파트로 이사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시간이 흘러 우린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외할머니는 여전히 오래된 그 추억 속 아파트에 살고 계신다. 몇 년 전 그 외갓집에 들러 창고방에서 매실액을 꺼내오는데 오래된 장롱에 그 스티커들을 발견했고 나는 어릴 때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정말이지 나는 친구들과 남편에게 '또 기억 안 나?'라는 말(말이라기 보단 혼쭐)을 자주 듣는 편인데, 말을 배울 때의 내가 떠올랐다는 게 잘 납득은 되지 않지만 분명 외할아버지가 '이건 코끼리. 이건 구름.' 하며 스티커를 가리키던 것, 그리고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던 촉감(?)이 기억났다. 또 신기한 건 근엄한 할아버지와 어울리지 않은 그 스티커들은 족히 30년은 되었을 텐데 때도 타지 않고 새 것 같이 붙어있었다.
이번에 외할아버지를 보내드리며 스티커를 사진에 담아왔다. 외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외할아버지가 나를 안고 '구름이 뿡 하며 방귀를 꼈네'라고 하셨단다. 내 기억은 '이건 구름, 이건 코끼리' 였는데 아무래도 나보단 외할머니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실제로 내가 찍어 온 사진 속 구름은 뿡 하고 방귀를 뀌고 있었다.
그 기억은 외할아버지가 그리워 내가 조작한 것일지라도 외할아버지의 사랑만큼은 진실일 것이다.
혹은 '이건 코끼리고 이건 구름이야. 그런데 구름이 뿡 하고 방귀를 뀌었네.'라고 하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돈 벌기 시작한 뒤 고작 몇 번 드린 용돈을 그대로 모아놓고 다시 주시면서 늘 살 좀 쩌라, 밥은 먹고 다니냐 걱정하시던 외할아버지가 이제는 아무 걱정 없이 편히 쉬시길 바랄 뿐이다.
안녕 하지.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