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모든 별들에게
'환하게 빛나라'
그다지 세련되지는 않지만, 할아버지가 그 안에 담아주신 뜻을 떠올릴 때면 내 이름은 어떤 이름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가끔 방황의 길이 막막하고, 내가 한심해 보일 때는 저 뜻을 떠올린다. 이 길은 끝이 막힌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고, 나는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번아웃으로 힘들거나, 무기력하고 방황하는 시기에는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돌봐야 한다. 아픔과 후회가 있다면 그것을 충분히 쳐다보고 안아줘야 한다. 그 누가 아닌 나 자신이. 내가 했던 것처럼 나의 과거의 사건들, 나를 기쁘게 하는 것,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게 생각하는 것, 인상 깊은 책 등 나에 대해 수십 장의 글을 마구 써 내려가도 좋고, 말을 해서 풀린다면 응어리가 있던 사람과 푸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내가 회복할 때까지 또다시 충분한 시간을 줘야 한다. 그 휴식이 지겨워져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어진다면 더 좋겠다.
그리고 그 후에는 작은 시도와 도전으로 조금씩 용기를 내보자. 바로 보상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우리가 좇아야 하는 것은 유효기간이 짧은 즐거움이 아니기에 인내심을 가져보자. 단, 버나드 쇼의 묘비명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어'처럼 고민만 하다가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실수는 하지 말아야겠지(사실 이것이 나의 가장 큰 경계대상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인생의 많은 순간에 두 눈 질끈 감고 도전한 것들이 예상외의 성취를 가져다주고, 두려움은 실제 존재하는 것보다 더 큰 장애물과 한계를 만들어 나를 가두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운동을 할 때 깨달았던 것 하나,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좋지만, 그것은 내가 날 아끼기에 더 건강하고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그래야 조그만 성취에도 날 칭찬해줄 수 있고, 길게 오래 갈 수 있다. 현재의 나를 부정하고 미워하는 부정적인 에너지에서 나온다면 결국 언제나 불완전한 면을 보게 되고, 만족에 이를 수가 없다.
학부 때 교양으로 들었던 철학과 수업은 마냥 어렵기만 했지만, 방황의 시기에 사르트르를 다시 읽으니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는 부분이 와닿았다. 내가 지금 글을 쓰는 노트북은 이런 용도로 만들어진, 본질(목적)이 실존을 앞선 물건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과 다른 차원의 무엇이다. 본질에 앞서 세상에 던져진 존재, 즉 실존이 본질이 앞서는 존재다. 왠지 모르게 저 딱딱하고 철학적인 말이 마치 조건 없는 사랑과 믿음으로 날 이 세상에 낳아주신 부모님을 떠오르게 하고, 그 어떤 위로보다 따뜻하게 다가왔다. 나는 어떤 것을 하기 위해 태어난 도구가 아니라, 내 가능성을 싹틔우며 내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다. 무한 선택의 바다는 막막하고 무섭지만 자유로움과 주체성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 테니까(물론 이런 고민과 깨우침을 좀 더 어릴 때 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만, 의미 없는 후회는 하지 않기로).
마지막으로 터널의 어둠 속에서 열심히 방황하는 어른이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노래 'Lost star'의 한 구절을 남겨본다. 우리는 지금 방황하고 길 잃었을지라도, 어둠을 밝히려 열심히 노력 중이니까.
But are we all lost stars, trying to light up the dark?
우리는 모두 어둠을 밝히려 하는 길 잃은 별들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