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마다 찾아오는 그 시간에 대하여
한국에 장마철이 있듯이, 내가 살고 있는 애리조나 주에는 몬순 시즌이 있다. 6월 중반부터 9월 말까지를 보통 "몬순 시즌"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장마철과는 사뭇 다른 감이 있다. 비가 하루 종일 며칠 연속으로 오는 날도 물론 있지만, 사막이라 그런지 그런 경우는 꽤 드문 듯하다. 대신 잠깐씩 국지성 호우처럼 우르르 쏟아진다. 그리 멀지 않은 지역끼리도 어디는 비가 퍼붓고 어디는 해가 쨍하다. 비가 귀한 사막이라 그런지 이곳에선 비가 조금이라도 오면 사람들이 축제라도 열린 분위기인데, '운이 좋아' 제대로 된 몬순이라도 맞게 될 때면 우르르 나가서 비 구경을 한다. 지금은 재택근무를 하지만, 사무실에 매일 출근했던 2019년도에는 회사 건물 안 온 사람들이 다 신이 나서 몰려 나가 비 구경을 하는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비가 무서울 정도로 10여분 간 쏟아지다가 그쳐버리는 경우도 많은데, 그럴 때면 사람들은 짧은 하늘의 공연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렇다고 하늘에다 대고 앵콜을 외칠 수도 없고.
이건 여담인데, 신기하게도 이곳 애리조나 사람들은 애리조나의 비 냄새에 대해 꽤나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다른 어느 곳보다 냄새가 좋다나. 심지어 애리조나의 비 냄새를 모티브로 한 향초들도 있다 (우리 회사는 마닐라 지점도 있는데, 우리 팀에서 마닐라 팀에게 이걸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근데 나는 이방인이라 그런가... 글쎄, 잘 모르겠더라. 하도 대단하다고 세뇌 아닌 세뇌를 당해서 그나마 다르다고 느끼는 것 같은 건, 뭐랄까 좀 더 진한 진흙탕 냄새가 난다고 해야 하려나...? 내가 후각이 둔한 건지 나는 아무튼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향초로 가지고 싶은 향은 아니지 싶다. 역시 관점에 따라 어떤 것은 때때로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가 악역이 되었다가 하는 건가 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비 냄새가 훨씬 더 좋다.
사실 애리조나에 거의 4년째 살면서 몬순시즌 다운 몬순 시즌은 이번 해에 처음 겪고 있는 것 같다. 이전까지는 '이게 몬순 시즌이라고?' 싶을 정도로 비가 거의 오지 않았었다. 올해는 과장 조금 보태서 매일 밤, 오늘은 스톰이 올까 안 올까를 살피게 되었다. 어디 외출이라도 할 때면 비 소식이 있는지 없는지를 꼭 확인해야 하고, 예기치 못한 비 소식이 불쑥불쑥 찾아오는 게 다반사다. 몬순시즌에는 일기예보를 확인할 필요가 거의 없는 이곳에서도 매일 날씨를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몬순은 주로 밤에 발달한다는 것도 올해 처음 깨달았는데, 그래서 나에게는 더더욱 불청객이다. 안 그래도 어두운 날들을 보내는 중인데 천둥 번개가 아주 요란하다. 특히 이 시기에 내리치는 천둥 번개는 꽤 위압적이기까지 해서 나도 모르게 겁을 한 입 입에 물게 한다. 그러면 우리 멍뭉이도 놀라 깨서 짖고, 집안은 번쩍번쩍 나이트클럽으로 바뀐다 - 정작 나이트는 한 번도 가 보지 않았지만. 나는 해가 쨍한 날이 좋아 사막으로 온 건데, 6월 중순부터 9월 말이면 거의 일 년의 1/4의 시간을 비가 올까 안 올까 조마조마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왠지 억울하다 (그래도 미국 다른 주들에 비하면 날씨가 아주 온화한 편이라 자연재해는 비교적 적지만). 이게 정말 너의 민낯이냐고 애리조나에게 묻고 싶었다. 이게 네가 4년여 동안 감추어 온 진짜 얼굴인 거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올해 몬순시즌은 마치 내 상황이랑 똑 닮았네.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고 그다지 반갑지 않은 상황들이 예의도 없이 들이닥친다. 대비했던 것보다 때로는 더 세고 험궂게 와서, 때로는 그저 스쳐가기만 해서 실망도 하고 좌절도 하는 그런 나의 요즈음과 많이 닮아 있다. 도대체가 왜 이러는 거냐고 하늘에게 묻고 싶은 심정마저 똑같다. 나는 일어났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회색빛임에 실망한다. 언제 해가 보일지 알 수 없다. 어떤 집에는 침수나 지붕 피해, 담 피해 등등 재산피해와 인명피해까지 일으킨다. 나는 이런 몬순이 그저 밉기만 했다. 사막이라 - 비단 사막뿐 아니라 어느 곳이든 그렇겠지만 - 비가 필요하고 위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마냥 부인했었다. 나의 어둔 마음의 땅도 차라리 빛이 너무 세다 싶은 게 더 낫지 싶었다. 뭘 해도 안 풀리는 것만 같은 이 나날들을 힘에 겨워하기 바쁘고 아파하느라 힘이 들었다.
몇 번의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휩쓸고 지나간 다음 날 아침, 죽어가고 있던 뒷마당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사 후 지금까지 꽤 많은 식물들을 나름 심어 봤지만, 여름이 오자 뜨거운 햇빛에 모두 죽어 나갔다. 4계절을 늘 꽃을 피운다던 쁘띠 장미 나무도 뜨겁게 태우는 여름 애리조나의 햇살에 못 이겨 그만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더랬다. 그런데 비가 내 꽃들을 다시 살렸다. 그것도 장미나무보다 훨씬 연약하고 곧 죽을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하루하루 바래져 가는 빛을 띠고 있던 꽃들을.
몬순시즌에는 무지개를 제법 흔하게 볼 수 있다. 건물들의 키가 작은 우리 동네는 무지개의 크기도 엄청나다. 거의 동네 전체를 두 팔 벌려 안는 정도니까. 쌍무지개를 보는 일도 제법 흔하다. 얼마 전 '놀면 뭐하니'에서 유재석 님은 무지개를 보고 프로젝트가 대박 날 조짐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대박이 났다. 물론 과학적인 근거로 무지개가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확신은 없다. 하지만 유재석 님의 말을 듣고 난 후, 나는 남들이 그렇게 행운으로 여기는 무지개와 쌍무지개들을 그간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막의 마른하늘에 무지개가 찾아오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나는 30대 초반이다.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한다면 여름이라고 할 만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몬순 시즌이 있는. 몇 개의 바람과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폭풍이 올 지 모르지만 그것들을 견뎌낸 여름은 가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가을을 더욱 벅찬 마음으로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 나도 이런 고난과 역경의 여름을 보내고 나면 좀 더 멋지게 성장한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겠지. 아프지 말고 행복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프더라도 잘 이겨내고 아픈 만큼 잘 자란, 멋스러운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응원해보기로 하고 나 자신을 다독여 본다. 몬순 시즌에 회색 하늘 뒤로 선물처럼 무지개가 찾아오듯이, 힘든 시간이 많은 지금이지만 예쁜 색과 반짝이는 모습으로 분명하게 나에게 주어질 무지개 같은 어떤 선물들이 찾아 올 지도 모른다고. 그때가 오면 모른 채 지나가지 말고 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자고.
나는 어떤 날씨에도 강하다고 알려져 있던 쁘띠 장미 나무보다, 연약해 보여 금방 죽을 것 같은 우리 집 뒷마당의 그 꽃을 떠 닮았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길지 않은 인생에 그렇게 많은 굴곡이 있었는데도 여태껏 잘 지내 온 걸 보면 말이다. 그리고 이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오히려 나에게 어떤 형태로든 자양분이 되어 줄 것이다. 지금은 그 어떤 위로나 응원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힘든 시간들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억울하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모든 것들이 다 나중에는 나의 든든한 발판이 되어 줄 것이라고. 이 글을 쓰면서도 스스로에게 의심이 들고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하지만 그래도 뚫고 나가는 것, 흔들리면서도 그 자리를 용케 지키고 꽃을 피워내는 사람이 되는 게 내가 해 나가야 할 몫이라는 걸 어쩌면 내 안의 나는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올해 몬순 시즌은 이제 좀 그만 끝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