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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Park Jul 13. 2023

퇴사 대열에 합류하다

두려움과 신남의 사이에서

요즘은 퇴사하는 것이 유행이라도 된 듯 꽤 심심찮게 뉴스에서도 주변에서도 퇴사자들의 소식을 접할 수 있다. 좀 부러웠다. 저들은 퇴사하고 나서 엄청난 준비가 되어 있나 보다, 저들은 어쨌든 믿는 구석이랄지 의지할 데가 있나 보다, 나도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운 좋게도 비실기로 디자인을 복수 전공했고, 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전공자들과의 전쟁(?) 속에서 생존자가 되어 디자이너로 살아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결국 "생계형 장래희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제부턴가 마음속 어디선가에서 계속 웅얼대고 있었다. 나는 자라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나의 미술/예술적 재능에 대해서 숱하게 들어온 말들이 있다. "넌... 그 정도는 아니야.", "그렇게까지 잘하는 건 아니야.", "그만한 재능은 없지." 물론 꼭 그 말들 때문만은 아니기도 한 게, 사실 내가 봐도 내가 객관적으로 딱히 두드러지는 천재성이 있다거나, 그렇다고 미술에 대한 적절한 교육을 받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뭔가 "예술가"라고 할 만한 자질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속에 웅크려버린 꿈은 그대로 한동안 어디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었다.


아마 작년 이맘때만 해도, 아니, 올해 초만 해도 나는 분명 이 길을 내가 '선택' 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무조건 이직. 이직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여 개가 넘는 회사들에 지원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거절도 하고 거절을 당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내 시간과 에너지를 다 쏟아부었다. 사실 내 포트폴리오는 내가 보기에도 그리 나쁘지 않았고, 꽤나 많은 회사들이 면접 요청을 해 왔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곳으로의 이직이 그렇게 힘들 것 같지만은 않았다. 한 6개월에서 9개월쯤이면 못해도 어딘가에 가 있겠지.


그런데 이제 경력이 8년쯤 되고 나니 스스로에게 따지는 게 많아졌다. 진짜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인지, 연봉은 적정 수준 이상인지, 회사의 가치관은 어떤지, 복지는 어떤지. 이전 같았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면 무조건 갔을 텐데. 이제는 좀 따지면서 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돈을 준다 한들 하루에 8시간은 내 시간을 내어 주는 게 회사인데.


문제는 그런 회사들이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언젠가부터 의문이 든다는 것이었다. 작년 봄부터니까, 회사를 찾아 나서기 시작 한 지 1년 하고도 몇 개월이 지나는 시점인데도 나의 "드림 컴퍼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좀 솔깃한 곳이면 거절당하거나, 거의 될 뻔하다가 무슨 일이든 일어나서 막판에 엎어지곤 했다. 그렇다고 그 회사들이 진정한 나의 꿈의 회사들도 아니었는데.


2020년 중반부터 이직의 기회가 (마침내) 왔던 2022년 연말까지 나는 점점 깊어가는 우울함에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나는 그 이유가 그때 다녔던 회사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그 누구보다 창의적이고 반짝반짝 빛나는 일들을 했던 우리가, 회사의 경영방침이 달라짐에 따라 공장식 디자인 팀이 되어가는 걸 보면서 찾아온 무기력함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었다. 이 회사만 벗어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줄 알았다. 그리고 정말 숨이 턱 끝까치 차올라서 더 이상은 숨 쉴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새로운 기회가 왔고, 나를 잠시나마 다시 설레게 해 주었다.


작년 말, 정말 이러다가는 죽겠다 싶었던 순간에 감사하게도 이직의 기회가 왔다. 6개월 계약직이었지만 일 자체도 재미있을 것 같았고 면접 때 만났던 사람들과도 케미가 맞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보수도 꽤 짭짤하고 계약직인데도 기본 보험이 적용되는 그런 곳이었다 (한국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미국에서 계약직에게 보험혜택을 주는 회사가 많지는 않다). 6개월 내에 무슨 수가 나겠지 하면서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이직을 결심했다. 그리고 내가 사표를 낸 회사에 속했던, 내가 4년 동안 몸 담았던 크리에이티브 팀은 내가 이직한 지 1-2주 만에 팀 전체가 해고되었다.


새로 이직한 회사에서의 6개월은 꽤나 이상적이었다. 애초에 회사 예산 문제로 6개월 이후 정규직 전환이라든지 계약 연장을 할 확률이 없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 회사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쉬울 지경이었다. 팀원들은 모두 친절했고 내 작업에 나보다 더 좋은 가치를 주고 나를 격려해 주었다. 매주 통장에 들어오는 숫자도 이전에 비하면 꽤나 커졌고 사실 Fast Paced 한 환경이라고 겁을 준 것에 비해서는 일 자체도 쉬워서 나에게는 "꿀알바" 같은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그 약발이, 생각보다 오래가지를 못했다. 언제부턴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다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어차피 결론적으로는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디자인에 정말 흥미가 없구나-' 하는 깨달음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회사에 의존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내 마음속 지분을 높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소리는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머릿속에서 락 페스티벌이라도 열린 줄 알았더랬다.


사실 그동안 조금씩 소심하게 이것저것 안 건드려 본 것은 아니었다. 유튜브도 1년 전부터 2-3주에 한 번씩 업로드를 하고 있고 인스타그램에도 그림을 간간이 올려봤다. 심지어는 Etsy샵도 열었다. 그런데 다 반응이. 이렇게까지 안 나올 일인가 싶도록 반응이 없어서 감히 직장인에서 독립적인 개인 - "프리 워커"라고 하던가 - 으로 "환승"할 생각을 못했었다. 그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계약 만료일은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다른 곳에서 계약직 제안이 왔었다. 프리랜싱으로 몇 달 동안 일을 해 준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정말 울면서 일했다. 일이 너무 나와 맞지 않고 그곳에는 디자이너에 대한 어떤 존중이라든지, 하다못해 일처리 능력이 있는 사람도, 어떤 체계도 없는 듯했다. 나는 이렇게 내 시간을, 인생의 일부를 허비하는 게 맞을까 싶어 두어 달 만에 이 일을 그만두었었다. 그런데 그 일을 다시 하라고? 다시 한다면 아마 1년 동안 번 돈을 따져봤을 때, 어쩌면 내 커리어 인생 중 올해 가장 높은 숫자를 찍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럼 바짝 좀 모을 수 있고 사고 싶었던 것들을 좀 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돈에 대한 스트레스는 조금이나마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서 나를, 내 시간을 이 회사에 팔 것인가? 돈 말고 다른 가치는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고심 끝에 그 기회를 정중히 사양했다. 완전히 사양한 건 아니고 반쯤은 가능성을 열어 둔 채로. 뭐 다시 돌아갔을 때 그쪽에서 더 이상 내가 필요치 않을 수도 있지만.


결국 나는 나에게 기회를 줘 보기로 했다. 퇴사라기보다는 계약이 만료되고 그 후에 다른 직장을 잡지 않은 상황이긴 한데, 딱히 뭐라 칭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뭐 그렇게까지 해보고 싶던 일들을 한번 해 보라고, 해 보다 보면 진짜 내가 원하던 것인지 아니면 해보지 못한 아쉬움에 대한 미련이고 로망이었을 뿐인지 알게 되지 않겠냐며 스스로에게 기회를 줘 보려는 중이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럴 수 있는 기회가 올지 모른다. 아마 앞으로 평생 이만한 용기가 안 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일 죽을 수도 있잖은가. 이렇게 죽는다면 억울한 건 나뿐이다.


하여 지금은 혼자가 된 지 3일 차다. 아직 극심한 난기류를 겪으며 비행하고 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불안감이 나를 삼키고 어떻게 내 것을 만들어 나갈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저 하다 보면, 정말 내가 원하는 것들을 진심으로 즐기며 하다 보면 어딘가에 다다르지 않을까? 믿지 않던 것들, 믿기지 않던 것들, 믿기지 않을 것들을 이제는 그냥 '믿어버리'고 발을 내디뎌야 할 때인 것 같다. 결과중심적인 내가 과정을 온전히 즐기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 테지만. 스스로에게 실패를 허용해야 하는 쓰디쓴 순간들을 맞이해야 하겠지만.


아무튼, 나도 이제 퇴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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